미얀마/역사
1. 개관
미얀마(버마)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이 지역은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 인도 문화의 영향력이 큰 지역이었고, 특히 스리랑카와 많은 교류를 하였다. 그 덕분에 동남아에 흔히 소승불교라 불리는 상좌부 불교를 전하는 역할을 하였고, 나중에는 스리랑카에 역으로 상좌부 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한 한 나라였다. 하지만 전통적인 정령신앙인 낫 숭배도 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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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구성에서도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달리 주민족인 버마족이 주도적이긴 하나 압도하지는 못하였다. 동부 샨 고원의 타이계 민족인 샨족과 남부의 수준높은 불교 문화를 꽃피웠던 몬족, 서남부에 아라칸 산맥으로 고립된 아라칸족[1] 이 역사적으로 각기 상당한 비중을 보였다. 특히 아라칸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현재 미얀마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참고로 위의 지도는 현재 미얀마의 종족분포이고, 역사적으로 하면 남부 전체가 몬족이었지만 지금 몬족의 분포는 크게 줄었다. 이후 서술하겠지만 18세기 말 몬족이 태국으로 엑소더스를 했기 때문.[2]
2. 고대
역사의 시작은 여타 동남아 국가들처럼 연대기로 뒤섞인지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현재 미얀마의 주종족인 버마족이 도착한 때는 9세기경으로 본다. 그 전에 살고 있던 민족은 남부에는 몬족, 중북부에는 퓨족(표족)이었다. 몬족은 현재의 태국과 버마에 살던 동남아의 토착종족이었고 수준 높은 불교문화를 지닌 민족이었다. 인도의 불교문화도 이 몬족을 통해 동남아 각지로 전해질 수 있었다.
한편 미얀마 중북부에 도착한 퓨족은 약 200여 년간 거주하고 있었는데,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평화주의적인 삶을 살던 종족이었다. 남녀불문하고 7세부터 20세까지 절에 들어가 승려와 같은 생활을 했고, 잔인한 형벌도구나 처벌도 없었으며, 누에의 목숨을 해친다고 비단조차도 경멸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불교의 이상향과 같은 민족이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런 기록이 진실인지는 불확실하지만 퓨족은 남조의 확장으로 크게 쇠퇴하고 버마족으로 대체된다.
9세기 중반 전성기를 맞은 남조는 각지로 영역을 확장하였는데 북으로는 사천(촉, 쓰촨성)의 성도과 운남(윈난성)를 점령하고, 동으로는 베트남을 일시적으로 지배하고, 남으로는 현재 태국과 미얀마 일대도 공략하였다. 이 과정에서 태국에 살던 몬족과, 미얀마 중북부에 살던 퓨족은 큰 타격을 입은 듯 하고, 침공의 과정에서 운남쪽에 살던 버마족과 타이족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듯하다. 타이족은 미얀마 동부 샨 고원에 정착하기 시작해 미얀마의 타이족인 샨족이 되었고, 버마족은 미얀마 중북부에 정착해 퓨족을 대체하여 미얀마의 첫 번째 왕조인 버간 왕조를 세운다.[3]
3. 버간(파간) 왕국 (1044~1287)
버간 왕조는 849년에 성립되었다고 하나 전설과 뒤얽혀서 정확히는 알 수 없고, 그나마 역사적으로 뚜렷해지는 것은 11세기 아노야타 왕(제위 1044~1077) 때이다.[4] 아노야타 왕은 버마족을 통합하고 버마족의 전통신앙인 낫 신앙을 정리하였고 몬족의 승려 신 아라한을 통해 소승불교를 대대적으로 도입하였다. 아노야타 왕은 소승불교를 대대적으로 육성하기로 결정하고, 남쪽의 몬족 도시인 타톤에 불경을 요청하였다. 거기에 타톤이 거부하자 타톤을 공격해서 점령하고 불경을 삥뜯었다고 한다.(…) 다만 실제 그 당시 상황을 보면 전성기를 맞고 있던 캄보디아의 앙코르조가 테나세림 일대로까지 확장을 하자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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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미얀마 남부 몬족의 도시들을 병합할 수 있었지만, 몬족은 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버마족에 저항하였다. 이후 역사를 보면 버마족이 공격해서 합병하고, 몬족이 독립하고, 버마족이 진압하고, 몬족이 태국으로 탈출하고, 또 다시 버마족이 합병하는,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
이후 동남아 전역을 막론한 무역망의 쇠퇴로 버간 역시 침체기에 접어든다. 나다웅먀 왕(재위 1210~1234) 때 국고는 바닥을 드러냈으며 그에 따라 왕권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나다웅먀의 뒤를 이은 차스와 왕(재위 1234~1250)은 부패한 아리(Ari) 승가의 토지를 몰수하여 재정을 확보하려 했지만, 민중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하고 국정 운영을 세자 우즈나에게 위임했다. 하지만 우즈나 역시 사냥 다니기에 바빠 국정을 다시 신하들에게 위임했고(…) 이는 권신 야자틴잔을 필두로 한 조정 대신들의 권력이 강대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우즈나 왕(재위 1250~1254) 사후 야자틴잔은 자신과 사이가 나쁜 태자 타히투 대신 첩 소생의 나라티하파티(재위 1254~1287)를 옹립했다. 그러나 왕권을 되찾고 싶어하는 나라티하파티와 야자틴잔은 사사건건 충돌했고, 마침내 나라티하파티는 친위 쿠테타를 일으켜 야자틴잔을 숙청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권력을 잡은 나라티하파티는 자신이 건립한 파고다의 비문에 ""3600만 병력을 지휘하고 3000명의 후궁을 거느리며 300그릇의 반찬으로 식사를 한다""는 글을 새겨 넣는 등 왕의 권위를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이 타이밍에 나타난 게 바로 원나라.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던 나라티하파티는 원의 신종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사자를 처형하며 운남을 선제 공격했지만 원의 기병 전술에 대패한다.
1287년 항복을 타진하러 가던 나라티하파티가 왕자 티하투에게 살해당하며 버간은 사실상 멸망. 타가웅을 위시한 북부 지방은 원의 행정 구역에 편입되었고, 남부의 몬족은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으며[5] 중북부는 샨족 저항군이 원을 몰아내고 잉와[6] 를 수도로 왕국을 건설한다. 이로써 250여년간 미얀마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3.1. 분열 시대 (1287~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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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남부의 몬족은 13세기 말부터 깽판을 친 현재 태국의 수고타이와 아유타야에 동남부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테나세림을 빼앗겼으나 불교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고, 수도인 버고(페구,Pegu)를 중심으로 해외교류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15세기 신소부 여왕은 자신의 몸무게와 동일한 양인 약 40킬로그램의 금을 107미터 높이의 슈웨디공 파고다에 입혔고, 그 뒤를 이은 담마제디는 신소부와 자신의 몸무게의 4배의 달하는 금을 또 떡칠했다고 한다.
한편 북부의 샨족-버마족 왕국인 잉와(Ava)는 버마화가 덜한 북부의 샨족과 수도 없이 싸웠다, 이 샨족이 간덩이가 부어 운남을 공격해 버린 결과 분노한 명나라가 1444년과 1446년에 연속으로 역공을 가해 그들은 물론 잉와까지 초토화시키고 속국으로 삼은 후에야 물러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잉와는 쇠퇴하기 시작하고, 간덩이가 부은 짓을 한 북부의 샨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남아 1527년에 잉와를 멸망시켰고, 잉와의 속국이었던 버마족의 따웅우(Toungoo)가 독립해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남부의 몬족은 번영을 하였다고 하지만 새로운 변수들의 등장으로 골아픈 상황이었다. 북부에는 15세기 후반부터 힘을 키우기 시작한 버마족의 도시 따웅우와 삐의 확장으로 골치를, 남부에는 1498년부터 인도양에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고, 1511년에는 말라카까지 점령한 포르투갈인들의 확장으로 골이 아프게 되었다. 특히 포르투갈인들은 본국의 힘이 약해지면서 자구책으로 해적질과 용병짓을 하면서 주변을 어지럽혔고, 이들은 미얀마의 각 세력에게 고용되면서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 때 따웅우의 왕으로 즉위한 사람이 따빈슈웨티이다.
4. 따웅우(퉁구) 제국 (1531~1752)
1531년 따웅우의 왕으로 즉위한 따빈슈웨티는 본격적인 통일전쟁을 시작했다. 북부는 모가웅 지역의 샨족의 깽판으로 주요한 세력도 없었던 상황이라 남부의 몬족세력을 먼저 노렸고, 이를 통해 버마 남부에 포르투갈 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확장은 주변의 경계를 불러와 삐, 버고, 아라칸이 동맹을 맺어 따웅우에 맞섰으나, 따빈슈웨티는 이들을 모두 무찌르고, 삐와 버고를 통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북진해서 분열되어있던 잉와 주변과 동부의 샨족을 복속시키고 아라칸을 공격하던 중 몬족의 문제 등으로 아유타야와의 전쟁을 하게 되었다.[7]
1547년 아유타야를 공격한 따빈슈웨티는 비록 아유타야 함락에는 실패하였지만 아유타야 군을 철저하게 격파했고 사령관이었던 아유타야의 왕비 수리요타이를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버마로 돌아온 후, 포르투갈인 근위장교와 사냥을 하면서 노닥거리다가 사냥을 하던 도중 암살을 당한다. 다시 미얀마는 분열되는 듯 했으나, 따빈슈웨티의 이복형 버인나웅에 의해 미얀마는 빠른 시일 안에 안정을 되찾고 재통합되어 동남아 최강제국으로 발돋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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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인나웅 제국>
특히 버인나웅은 뛰어난 정복군주로 서로는 인도의 마니푸르, 서남은 아라칸, 북부는 중국 경계지역의 샨족까지, 동북으로는 현 태국 북부의 란나를 점령하고 아유타야를 공격했다.[8] 1563년 란나에서 진격해 온 버마군은 아유타야를 포위하였고 아유타야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9] 그리고 다시 저항하는 아유타야를 1569년 재공격해 함락하였고, 1570년에는 아유타야와 동맹을 맺어 버마에 맞선 란쌍의 위앙쨘을 공격했다. 비록 보급 문제와 게릴라전으로 철수하였으나, 란쌍의 왕 세타티랏이 사망하자 다시 공격해 1574년 란쌍마저도 정복하여 동남아 최강의 국가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버인나웅이 1581년 죽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10] , 특히 아유타야의 흑태자 나레쑤언의 등장은 치명타였다. 버마의 연이은 공격을 모두 물리치고 버마 본토까지 진격해 싸운 나레쑤언의 활약으로 버마는 북부의 잉와, 중부의 삐와 따웅우, 그리고 포르투갈인 필리페 데 브리투가 점령한 남부로 나뉘었다.[11] 이중 가장 강한 세력은 북부의 잉와로써 1605년 나레쑤언이 잉와를 공격하려다가 도중에 사망하자 위기를 넘기고 확장할 수 있었다.
4.1. 부흥 따웅우 왕조 (1611~1752)
잉와의 왕 아나욱페룬은 삐, 따웅우를 점령하고 1613년 마지막으로 남은 필리페 데 브리투의 세력까지 공략에 성공함으로써[12] 미얀마를 재통합 할 수 있었다.
이 때 미얀마의 왕조를 부흥 따웅우 왕조라고 하는데, 비록 수도는 따웅우가 아니었지만 왕족의 핏줄은 이전 따웅우와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후 버마는 한세기 이상 폐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주된 충돌이라 해봤자 1631년 태국 북부의 란나왕국 재정복과 그 이후 란나를 정복하려던 아유타야와의 충돌 정도였다.[13] 하지만 미얀마 역사의 전통으로 몬족은 다시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고 동남아에 기반을 다지려는 프랑스인들의 협조로 1740년 버마에게서 독립을 하여 부흥 한타와디 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1750년 몬족은 북부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1752년 잉와를 함락시킴으로써 부흥 따웅우 왕조는 멸망했다.
5. 꼰바웅 왕조 (1752~1885)
하지만 꼰바웅 왕조를 세운 슈웨보의 영주 알라웅파야의 등장으로 몬족은 곧바로 밀리기 시작했고, 1757년에는 수도인 버고가 함락당함으로써 다시 멸망하고 버마의 지배하에 놓였다. 그리고 200년 전처럼 몬족은 다시 몬족을 지원했던 아유타야로 엑소더스를 시작하고, 이들을 쫓던 버마군이 국경을 넘으면서 다시 전쟁이 발발.[14] 알라웅파야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유타야를 포위공격했으나 포탄의 오발로 부상을 입어 1760년 사망한다.
이후 꼰바웅 왕조의 3대 왕 신뷰신은 1765년 서와 북의 양방향으로 아유타야를 침공해서 2년간의 전쟁 끝에 1767년 아유타야를 함락해서 멸망시켰고,[15] 곧바로 일어난 (모 드라마에 묘사된) 청나라 건륭제의 침략도 무찔러 전성기를 맞는다. 하지만 청의 침공 때문에 버인나웅 때와 달리 아유타야를 합병하지 못하였고, 다수의 정예병력을 청나라와의 전쟁을위해 윈난성지역 국경으로 보냈기에 소수의 주둔군으로 아유타야전지역을 통제할수는 없었다. 구-아유타야는 딱씬에 의해 빠른 속도로 통합되고 강력하게 부활한다. 톤부리-방콕 왕조 시암은 버마에 복속된 란쌍과 란나를 종복하였고, 테나세림 일대에서 버마와 대립하였다. 대신에 서쪽으로의 확장도 계속하여 인도국경의 마니푸르를 합병하고, 아라칸을 압박할 수 있었다.
꼰바웅 왕조 6대 국왕인 보도파야의 치세에 최전성기에 달해 1784년에는 아라칸을 병합하였고, 144000명의 대군으로 시암을 침공하였다. 물론 시암으로 침공한 14만의 대군은 유럽식 신식무기를 앞세운 라마 1세의 짜끄리 왕조 군대에게 박살난다.
아라칸의 통치에 실패함으로써 아라칸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 이웃한 영국령 인도로 도주하였으며, 그 와중에 또(…) 국경을 넘어 아라칸 반란군을 공격하다 영국군과 충돌해서 긴장이 증폭되었다. 영국은 국경을 침범하지 말라고 버마에 경고를 하였는데, 버마는 국경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16] 게다가 당시 지배층이 쇄국을 고집했던 터라 서양의 침입 대응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음 왕인 버기도가 즉위한 이후에도 이러한 사태는 계속되고, 버마가 아쌈의 타이계 왕국인 아홈 왕국까지 복속시키자 긴장은 극에 달해 결국 1824년 1차 영국-버마 전쟁이 일어났다. 이 때 버마군은 벵골로 선공을 가해 벵골의 영국군을 고전시켰지만, 버마 남부에 상륙한 영국군에게 빈집털이 당하자 1826년 항복하고 아라칸과 테나세림을 영국에게 할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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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계속 일어나던 버마인과 영국인의 충돌은 2차, 3차 전쟁까지 이어졌고, 1852년에 일어난 2차 전쟁에서는 버마 남부를, 1885년의 3차 전쟁에서는 전토를 병합당하고 미얀마는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일부'''로 병합되어서 멸망했다. 수도는 영국에 의해, 원래 수도였던 만달레이에서 바다에 가까운 양곤으로 옮겨졌다. 꼰바웅 왕조 최후의 임금인 티바 왕은 인도 서해안의 작은 어촌인 라트나기리로 끌려가서 31년간 유폐당한 채 그 곳에서 숨을 거둔다.[17]
6. 영국령 시기 (인도 제국, 영국령 버마, 1885~1942/1945~1948)
7. 일본 제국령 (버마 군정부, 버마국, 1942~1945)
1942년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과 태국군의 침략으로 일본 군정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남부 일부 영토는 태국에게 병합당한다. 1943년에는 일본이 버마를 버마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시켰다. 하지만 버마국은 일본군이 주둔하며 일본의 지령을 받아 행동하는 괴뢰 국가였다. 버마국의 국가원수 바 마우는 독립국가의 국가원수로서 행동하려고 노력해보지만 버마인들 눈에는 친일파 일본에 붙어먹은 인물일 뿐이었다.[18] 점령 초기 버마인들은 일본을 '아시아의 구세주'라며 환영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제의 잔학행위가 이어지자 반일로 돌아섰으며, 이에 아웅 산 등 '30인의 동지'들이 '반 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FPFL)'을 결성했다. 이들은 일본군과 협력했으나 전쟁 말기, 영국군이 버마를 재탈환하고 만달레이 인근까지 진격해오는 과정에서 바로 편을 바꿔 영국군에 붙어 일본군을 몰아냈다.
이때 일본군의 전쟁범죄가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는 기무라 헤이타로, 죽음의 철도 등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어찌나 잔혹하였는지 지금도 미얀마에서 친일 발언을 하면 매장당할 수 있다.
8. 현대
8.1. 버마 연방 (1948~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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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연방의 국기. 쿠데타 이후에도 1974년까지 쓰였다.
1947년에 영국으로부터 버마 독립을 승인받은 후, 4월 총선에서 아웅 산이 이끄는 APNLF가 당선됐으나 7월 회의 도중 아웅 산과 내각 요원 6명이 암살을 당하는 비극을 당했다. 이에 따라 1948년애 '40인의 동지' 중 하나인 우 누를 초대 총리로 선임하면서 5개 지역을 아우르는 미얀마 연방이 수립됐으며, 의원내각제 형태의 서구식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4개 소수민족들의 자치권은 중앙정부에 의해 박탈됐고, 이에 꺼인족과 공산당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연방제는 사실상 와해 상태에 들어갔다.
위와 같은 다수 버마족과 소수민족간 민족 분규와 끊이지 않는 정당들[19] 의 경쟁, 부정부패, 물가 폭등 등으로 국가는 내전상태에 빠졌고, 반군이 미얀마의 거의 3분의 2를 장악하기까지 하면서 정부는 수도만 장악하는 무능한 정권이라는 뜻의 '랑군 정부'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수세에 몰렸다. 그러다 1962년 네 윈 장군 주도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마침내 혼란을 거듭하던 민주주의 정치는 중단되고 말았다.
8.2.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1962~1989)
8.3. 미얀마 연방 공화국 (1989~ )
하지만 버마식 사회주의 경제의 실패 등에 따른 국민적 불만이 일었다. 1970년대 들어 학생들 주도로 민주화 시위가 있었으나 군부는 폭력으로 진압해왔다. 1988년 3월부터 수개월간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유발하였고, 군인과 민간인의 충돌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였다. 또 약화된 민심에 의해 일어난 8888 항쟁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1988년 소 마웅 장군이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를 조직해 군부 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기존 정권이 무너지고 네윈은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소마웅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군사정부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9년에는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서 미얀마 연방으로 '''국호가 미얀마로 개정되었다.''' 랑군이 양곤이 된 것도 이때였다.
한편 SLORC가 주도한 군사정부는 가까운 시일내에 권력을 민간에게 되돌려주겠다며 총선 실시를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1990년 실시된 총선에서 아웅 산 수 지 여사[20] 가 이끌던 국민민주연합(NLD)이 무려 80%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과도 군사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던 국민통합당을 누르고 압승하였다. 그러나 당시 집권 군부 세력들은 선거 무효화를 선언하고 아웅 산 수 지 여사를 가택연금시켰고 강압적인 군사 독재 정치를 시도했다.
이러한 미얀마 군사정권은 소마웅 장군에 이어 탄 쉐가 뒤이어 집권하면서 더욱 억압적으로 변질되었다. 그는 김정일처럼 은둔정치를 펴며 여러 반정부 세력들을 강력하게 투옥, 탄압하였고, 2005년 이전까지는 외부 소식 차단을 위해 웹 호스팅 개설 등 인터넷 이용 자체를 허용치 않다가 이후에는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다만 독재 종식 전까지 미얀마 내에선 야후, 구글, 핫메일 등 포털사이트는 제한되거나 접속 불가였다.
1996년에는 오랫동안 골치거리였던 골든 트라이앵글의 군벌 쿤사를 항복시키고 샨족 독립 운동을 막는데 성공한다.
1997년 11월에는 기존의 SLORC를 '국가평화발전평의회(SPDC)'로 개편했다. 2006년에는 '''점성술에 따라 수도를 양곤에서 내륙 네피도(당시 핀마나)로 천도하고''' 화폐단위를 괴상하게 만드는 등의 별의 별 미친 짓을 저질렀다. 이에 미국과 EU 등은 미얀마에 대해 경제 제재, 외교관 미얀마 방문 금지, 기업 철수 등으로 강력히 대응했고, 1998년에는 사실상 원조마저 중단됐다. 반면 ASEAN 국가들은 1997년 미얀마 군사정권을 인정하고 신규 가입시켰다.[21] 2002년에는 아웅산 수치가 일시적으로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서방국가의 대 미얀마관계 단절, 원조 및 관광중단 등을 촉구하며 또다시 반군부 투쟁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런 탄 슈웨 군사정권의 강압적인 군부 독재 정치가 계속되면서 수많은 미얀마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고조되었고 2007년 승려들을 중심으로 들고 일어난 전국적 규모의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에 집권 군부 세력들은 총기 발포까지 가하는 등 무차별적으로 시위를 진압해버렸고, 결국 반정부 시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잔인무도한 유혈 진압에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은 격분했고 결국 이에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기존 미얀마 군사정권에 대한 금수조치를 더욱 강화했다.[22] 하지만 정작 국경을 접한 이웃인 중국은 미얀마를 두둔했고[23] 군부도 중국에게 굽신거리면서 막대한 자원을 수출하면서 군부 지배층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게다가 역시 다른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 인도도 중국을 견제하고자 미얀마 군부에 접촉하자 인도에게도 굽신거려 여러 자원개발권을 인도 업체가 챙기기도 했다. 또 한국의 노무현 정부도 경제적 이익 때문에 미얀마 군부 눈치를 보며 외교통상부를 통한 논평과 교민 안전문제 등 일부 사안을 거론하는 걸 빼곤 소극적으로 대응하여 NGO 단체들의 반발을 샀으며, 진보 쪽에선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와 이낙연 대통합민주신당 대변인이 지지한 게 전부였다. 오히려 보수야당인 한나라당이 시위를 지지하는 기묘한 모습을 보였고 이명박 대선후보도 민주화운동의 원인을 궁핍한 경제문제에서 찾았다.[24] 이 막대한 두 핵강국들의 옹호와 무역교류로 서구권이 벌이던 금수조치는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시위 진압 이후에도 저항이 산발적으로 터져나왔고 미국과 서구권이 중국과 인도 두 나라에도 이 일을 빌미로 항의하기 시작했으며, 2008년에는 사이클론 '나르기스'까지 터지면서 이에 미얀마 군부는 더 이상 권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집권 군부 주도로 2010년 11월 7일 민주정으로 이양하기 위한 총선이 실시되었고 국호도 미얀마 연방에서 미얀마 연방 공화국으로 개정되었다. 총선 종료 직후인 2010년 11월 13일 미얀마 군사정권은 아웅 산 수 지 여사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1년 군사정부를 이끌던 탄 슈웨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테인 세인 총리가 새 민주 정부의 4년 임기의 대통령에 공식 취임하여 개혁과 개방정책을 시작했다. 그러나 총선 과정에서 국민민주연합 등 야당 세력들이 배제되었고 총선 직후 탄 슈웨의 뒤를 이어 새 정부의 대통령에 취임한 테인 세인조차도 과거 탄 슈웨 정부 아래에서 총리직을 역임했던 사람이었고 기타 새 민주 정부 각료들조차 과거 탄 슈웨 군사정권 출신들이어서 사실상 허울뿐인 민정이양이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오랜 군부 독재정권 아래서 체득한 순종적 마인드 때문에 해당 정권이 좋니 나쁘니에 대해 거론하는 걸 꺼렸으며, 오히려 개혁정책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일부에선 수하르토 실각후 군부 주도로 정치개혁과 민주화가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처럼 미얀마도 집권 군부세력 주도로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겠느냐는 희망적인 주장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웅 산 수 지 여사의 보궐 선거 집회를 불허하면서 선거를 방해했지만,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기어코 아웅 산 수치 여사는 보궐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이때도 군부는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
8.3.1. 민주화 (2015~2021)
2015년 11월 8일 25년만에 자유 총선을 치렀다. 이 선거는 하원의원 330명과 상원의원 168명 등 상하원 의원 498명, 주 및 지역 의회 의원 644명, 민족대표 29명 등 1천171명을 뽑는 선거였다. 그러나 분쟁 등으로 일부 선거구에서 선거가 취소됨에 따라 상·하원의원은 491명을 선출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25년만에 펼쳐지는 자유총선인데다 아웅 산 수 지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승리가 점쳐지고 있던 선거여서 관심이 집중되었다. 또한 헌법에 의해 전체 의석수의 25%를 보장받게 되는 군부의 세력에 대응할 수 있는 의미있는 의석수를 NLD측이 차지할 수 있을련지, 아니면 NLD의 단독과반을 집권여당인 통합단결발전당(USDP)이 방지할 수 있을지 또한 NLD가 단독과반이 된다면 개헌선인 2/3 이상의 의석수를 확보할 수 있느냐도 역시 관심사가 되었다.
뚜껑을 열고 보니 80%가 넘어가는 투표율에 NLD측의 거의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다만 이번 승리에 대해 군부가 그대로 인정해줄 것이냐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이번 총선은 1990년 때와 달리 집권여당이 처음부터 패배선언을 하였으며, 테인 세인 대통령이 평화적 정권이양을 약속했고, 군부의 최고통수권자도 NLD의 다수 의석 확보를 축하한다고 밝혔다. 결국 군부는 선거 결과를 인정했으며, 이로서 NLD가 승리하면서 53년만에 정권교체를 이룩하였다.
2016년 3월 10일, NLD가 대통령 후보로 아웅산 수 지 여사의 대학 동문인 최측근 틴 쩌를 지명했으며, 이후 틴 쩌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군부정권 시절에 만들어진 법에 대해서 청산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군부정권이 민주화 운동가 등을 감시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던 '방문객 신고' 제도가 사라지게 됐다. # 미국에서도 경제제재를 해체하기로 했다. (단, 군부와 관련된 기업은 유지)# 1948년 이래 70년 동안 소수민족 반군과 치열한 내전을 치러온 미얀마군이 이례적으로 2018년 12월 휴전을 선포했다.#
2020년 7월 2일에 미얀마 북부의 옥광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광부 170명이 사망했다.#
2020년 11월에 민주화 이후 첫 총선을 여는데,# 코로나19 재확산 와중에 그대로 총선을 치른다.# 그리고 13곳 지역에서 취소된다.#
미얀마 정부가 라카인 주 등 8개 지역 및 친 주 1곳 등 9개 지역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 접속 차단 조치를 1년여 만에 해제했다.#
사전투표 도중에 쥐들이 투표함을 갉아 먹은 바람에 투표용지가 들어있던 봉투 일부가 훼손되는 등 관리부실이 나오고 있다.#
11월 8일에 국회의원 투표가 시작됐다.#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했다.#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했지만, 아라칸 반군 장악 지역에서 추가 선거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8.3.2. 군부 쿠데타
2021년 2월 1일, 아웅산 수치 총리와 윈 민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 인사들이 구금(!)되고 국영방송이 중단된 일이 발생했다.# ##
9. 출처
- 가로세로 세계사 2권: 동남아시아, 동방의 천년 문명이 열린다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06. p36~49.
-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지역/주제편): 동남아시아, 천년 문명의 신비에서 21세기 변화와 개혁의 주역으로 - 저자/출판사 동일. 2018. p38~52.
[1] 현재는 라카인이라는 표현도 자주 쓰이지만, 라카인이란 말 자체가 버마족이 쓰는 표현이고 아라칸 현지에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표현이다.[2] 그리고 태국으로 이주해온 몬족들은 대부분이 태국인에게 동화되었다.[3] 보통 파간(Pagan) 왕조로 알려져 있다. 버마어의 알파벳 표기법의 혼선이 심해서 버마어 발음과 표기가 상이한 기존 표기법과, 현지 발음과 비슷한 새로운 표기법의 차이가 심하다. 아직까지 혼선이 심하지만, 새로운 표기법이 정착되어 가는 듯하다.[4] 아노라타 왕으로도 알려져 있다.[5] 몬족의 이 왕국은 한타와디라는 별명이 있다. 그래서 수도를 따서 버고 왕조라고도 하지만, 한타와디 왕국이라는 표현도 자주 쓰인다.[6] 코에이 게임(징기스칸 시리즈)에서 자주 보이는 아바(Ava)가 이 도시이다.[7] 따웅우의 힘이 커지니 아유타야는 아유타야 나름대로 몬족들을 지원했고, 몬족들이 아유타야로 도주하자 버마군이 국경을 넘어서 이들을 추적하고, 이 때문에 열받은 아유타야가 선빵을 때리고, 버마도 나름대로 열받는다고 공격한 것이다. 실제 태국과 미얀마의 전쟁은 상당수가 이런 형식으로 일어났다.[8] 이 전쟁은 백상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버인나웅이 흰 코끼리 2마리를 내주면 전쟁 안하겠다고 하고, 아유타야에서 거부하자 공격해서 항복시킨 다음 흰 코끼리 4마리를 뜯어갔다.[9] 왕인 마하 짜크라팟이 버고로 끌려가 중이 된 듯 하다.[10] 버인나웅의 정복전쟁으로 인해 높은 세금이 부과된데다 버인나웅이 철권통치를 한터라 귀족들과 백성들의 불만이 매우 컸다.[11] 필리페 드 브리투는 아라칸 왕의 사령관으로 나레쑤언을 물리치기 위해 남부 버마로 왔다가 독립하고 몬족을 통합하고 자신만의 왕국을 세웠다. 미얀마에서는 파불자 응아 진까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인도 고왕의 포르투갈 부왕에게 사절을 보내 복속한 후 부왕의 딸와 결혼했던 인물이다.[12] 이 때 몇개월 간 아나욱페룬의 버마군은 포르투갈인들의 강력한 군사력을 경계하여 공격을 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땅굴로 공격했는데,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쉽게 점령이 가능했다. 이유는 그 날 미사중이어서(...)[13] 남명의 잔당문제는 그냥 쇼부처서 넘긴 것이니 충돌이라 보기도 뭐하다.[14] 200년 전과 패턴은 동일하나, 이 때의 엑소더스로 남부 버마의 몬족 인구는 크게 줄어서 현재처럼 버마족의 비중이 훨신 높아졌다.[15] 이원복 교수 교양만화 <가로세로 세계사>에 따르며, 이 전쟁 과정에서 아유타야 유물들을 버마군이 강탈하면서 현재 미얀마 국립 박물관에 보관 중이라 하나 사실여부가 불투명하다.[16] 토지에 비해 인구가 부족한 동남아에서는 지배는 땅보다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여러번 일어나긴 했지만, 버마는 좀 심한 편이었다.(…) 국경의 개념은 유럽과 동북아에서 형성되어 관료제가 발달한 국가들을 중심으로 발달한 개념이다, 넓은 땅에 비해, 인구가 부족한 유목민족들이나, 기후에 따라 항상 변화하는 정글이나 늪지대 등이 펼쳐져 있어 국경선 파악이 힘든 동남아나 중남미의 국가들에겐 이러한 종류의 영토개념이 익숙하지 않았다. 다만 시암같은 경우 1840년대 개화정책을 펼치면서 서양으로부터 국경개념을 도입하였고 베트남은 원래부터 중국의 관료제를 도입한터라 크메르나 란쌍을 정복하면서 곳곳에 성이나 식민지와같은 기미주를 설치하면서 국경의 개념을 확고히 하였다.[17] 아이러니하게도, 인도 무굴 왕조 최후의 황제인 바하두르 샤는 미얀마의 수도 랑군으로 끌려가서 유폐되고, 역시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18] 바 마우는 버마 왕령식민지의 총리까지 지냈던 인물이지만 2차대전 이후 반영적인 행동을 보여 투옥된 인물이다. 일본군이 버마에 입성한 후에 일본군이 그를 석방했다. 전후 다시 투옥되고 석방되기를 반복하다가 1977년 사망했다.[19] 특히 급진적 사회주의 도입을 주장하던 공산당과 점진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던 우누 정부간 대립이 컸다.[20] 해당 항목에도 있지만 미얀마에는 따로 성이라는 게 없다. 수 지 여사 본인이 방한시 저렇게 표기해달라고 했으므로 이후로도 이 기준에 따르는 게 옳을 듯.[21]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자면, 원체 아세안은 회원국 간 불개입주의를 천명하기 때문이다.[22] 이 과정에서 취재하던 일본 기자가 사망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던 도중 총에 맞은 것 같은데 죽는 순간까지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고. 일본 정부 또한 분노 크리. 이를 계기로 미얀마에 대한 국제적 비난 강도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었다.[23] 인도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 확보 문제도 있고, 여기서 중국이 미얀마의 상황을 비판하고 민주화 시위를 옹호했다가는 반정부시위가 자국 내로 퍼질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북한을 두둔하는 이유와 비슷한 이유.[24] 이러한 대처법은 2019년 홍콩 민주화운동 때도 재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