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구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민영구는 1909년 7월 21일 서울 종로구 인의동에서 부친 민제호(閔濟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9살 때 3.1 운동 참여한 후 상하이로 망명하는 부친을 따라갔다. 그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관하는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를 졸업하고, 이어 원동중학교(遠東中學校), 만국항해전문학교(萬國航海專門學校)를 졸업했다. 이후 상해화풍수선회사(上海和豊輸船會社)에서 선장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한커우와 난징간 중국 군대 및 군수품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1940년 9월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자 지달수(池達洙), 나태섭, 김태산(金泰山) 등과 함께 주계장(主計長)에 임명되었고, 1941년 11월 광복군이 시안으로 이전되자 광복군의 경리(經理)를 맡아 광복군의 살림을 꾸렸다. 또한 1942년 12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직원에 임명되어 회계 업무를 담당했다.
1943년 1월 일본군이 광저우를 공격하자 그곳에 있던 임정 요인 가족들을 이끌고 류저우로 피신시켰고, 그곳에서 항일가극단을 조직해 일제의 침략 만행을 폭로, 항쟁의식을 고취하면서 한, 중 친선 도모에 힘썼다. 그해 3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의 주계과장(主計課長)에 임명되어 1944년 6월까지 계속 늘어나는 광복군 대원의 보급지원 등 조달업무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4년 6월에는 다시 임시정부 내무부의 경무과원(警務課員)에 임명되어 1945년 1월까지 임시정부 요인의 경호업무를 맡았다. 그해 9월 류저우 마저 위험해지자 다시 임정 요인 가족들을 인솔하여 쓰촨성에 안주시키고 충칭으로 향했다.
1943년 10월 김구와 지청천의 지령에 따라 김학규, 이준식, 조시원 등과 함께 산시성 시안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시안판사처를 설치하고 전방 각 지대를 후원했다. 또한 잡지 <광복(光復)>을 발간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취지 및 활동상황, 광복군의 전투상황 등을 게재하여 항일독립사상을 널리 전파했으며, 1945년 2월 임시정부 재무부 경리국장, 광복군총사령부 상교참모(上校參謀)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1945년 6월 광복군 부령(副領)으로 광복군 총사령부 제2과에 소속되어 8.15 광복 때까지 복무했다.
광복 후에는 김구의 지시에 따라 중국에 남아서 중국 정부와 교섭하기 위한 임시정부의 주화대표단 총무처장으로 활동했으며, 1948년 6월 중국에 흩어져 있던 한인 동포 1,000명을 인솔해 조국에 귀환했다. 1948년 11월 대한민국 해군에 입대해 인천해경비 부사령관, 해군본부 함정국장, 해군대표 위원, 해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행정참모부장, 해군사관학교장 등을 역임하고 해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1976년 2월 11일 서울 종로구에서 병사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