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죄인

 

채만식이 1948~1949년 발표한 중편소설. 자신의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의 과거를 반성하고 있는 최초의 소설이라는 것이 특징.
광복이 된 어느 날 주인공은 친구 김 군이 경영하는 신문사를 방문했다 윤 군을 만난다. 윤 군은 주인공이 친일 행위를 한 것을 경멸하며 비난한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지만, 김 군이 대신 나서 윤 군의 말에 반박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농민들 대부분이 일제에 잘 보이기 위해 공물을 낸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강제와 협박에 못이겨 공물을 낸 것처럼, 자신과 같은 대다수의 글쟁이 또한 그런 일제의 등쌀에 못 이겨 그런 것이다. 그것이 죄는 죄이지만, 자발적으로 일제에 충성하려고 달려들었던 이들과는 다르게 봐야 할 것이며, 친일파를 처단하는 것에 있어서도 전후사정을 잘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1]
이 소설을 통하여 일제하 지식인들의 내면을 짐작할수 있으며, 또한 자신 같은 지식인들이 '''어쩔수 없이 일제에게 협력했다고''' 변명하였다. 하지만 친일행위에 빠지게 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 그런 행위를 하면서 심중에서 일어나는 자괴감을 작중 내용에 계속해서 깔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잘못을 계속 의식하면서도 조카에게 '''무관심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작중 화자의 모습을 보면 변명만은 아니라 보는 입장도 존재한다.
사실 농민들이 어쩔 수 없이 공물을 낸 것처럼,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벼운 친일을 한 것도 비난만 할 수는 없는 것은 맞다. 지금의 우리의 대다수가 학교, 군대, 회사에서의 부조리에 적극 나서지 못하듯 말이다. '''문제는 악질 친일파들이 자기합리화를 하려고 이런 논리를 끌어 써서 문제지'''.
사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대놓고 '나 친일했소.'하고 나선 인물은 채만식이 유일하다고 보면 된다. '''반성조차 한 이가 드물다''' 그 이외의 사례라면 재판에서 친일파임을 인정하고 사지를 찢어죽여도 좋고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다고 하고 친일파라는 걸 부정하며 변명하던 이광수에게 입닥치라고 일갈한 최린, 스스로 친일파임을 인정하고 반민특위에 자수한 김동환, 일제강점기에 세상을 떠나긴 했어도 병든 가족을 살리고자 어쩔 수 없이 친일활동을 한 점으로 비난하기에는 그렇지만 스스로 매국노가 되었다고 부끄러워하고 살아생전 한탄하던 이효석, 제2공화국 시절의 국방부 장관인 현석호(1907-1988)[2]나 제 9대 문교부 차관을 지낸 전 홍익대학교 총장이자 법철학자 이항녕(1915~2008)[3] 정도.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친일 행각을 숨기려고 했을 때, 채만식은 오히려 양심선언을 한 격이다.
[1] 여기서 좀 미묘한 느낌을 주는 캐릭터가 저 윤군인데, 은근히 독자들에게 반감을 주는 면이 있다. 채만식이 이래저래 힘들게 살 때 저 사람은 구태여 대놓고 친일을 안 해도 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는 게 문제... 사실 더러운 꼴 안 보고 거기 안 굽히고 살아도 될 정도의 상황이 된다는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는 걸 세상 좀 살아본 사람들은 알기 때문에 윤 군의 모습이 마냥 좋게는 안 보인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채만식이 이 글을 쓴 이유가 반성인지 변명인지가 더 모호해지는 문제도 있다.[2] 그는 해방 직전 충청남도 광업부장으로 있었는데 1945년 9월 중순 충남지사로 부임한 미군정 육군 대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그는 당시 지사에게 "나는 일제에 협력한, 고급 관리로서 일한 친일파이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고 한다.[3] 이항녕은 1939년 고등문과시험에 합격해 1941년 하동군수,1942년 창녕군수를 지냈다. 해방 후 경상남도 사회과장으로 발령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표를 제출하고 이후 부산 청룡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부근에 있는 범어사에서 밤마다 수양을 했다고 한다. 1991년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사죄해 온 것으로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