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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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東煥
일본식 성명 : 白山靑樹(시라야마 아오키)
1901년 9월 27일 ~ 1958년? (납북)
1.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파인(巴人)[1] ·취공(鷲公).[2] 필명으로는 강북인(江北人)·초병정(草兵丁)·창랑객(滄浪客)·백산청수(白山淸樹)·김파인(金巴人)·파인생(巴人生)·목병정(木兵丁)·석병정(石兵丁). 아명은 삼룡(三龍).[3]
한국 최초의 서사시《국경의 밤》의 시인. 처음에는 신경향파에 가까운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점차 서정성에 기댄 시를 많이 썼다.
2. 생애
김동환은 1901년 9월 27일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수송동(현 경성군 승암노동자구)에서 아버지 김석구(金錫龜)와 어머니 마윤옥(馬允玉)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9년 고향의 경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3월 졸업했으며, 빈곤한 가계 탓에 중학교 진학은 하지 못하고 한동안 경성군청에 근무하였다.
1916년 경성부로 이주하여 중동중학교에 입학했으며 1921년 3월 졸업하였다. 곧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토요대학 문화학과에 입학하여 재학하던 중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이 있었는데, 이때 일본인의 조선인 혐오로 인한 관동대학살 및 수용소 수감을 피해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1924년부터 북선일일신문(北鮮日日新聞) 조선문판·동아일보·시대일보·조선일보 등 신문사에서 기자로 근무하였으며, 1926년 10월 14일 경성부 돈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의동)으로 본적을 옮겼다. 1929년 6월에는 삼천리사(三千里社)를 설립하고 종합월간지 《삼천리(三千里)》를 창간해 1941년 12월까지 발행했으며, 자매지로 《만국부인(萬國婦人)》과《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을 각각 1932년 10월, 1938년 1월에 발행했다. 1942년 3월에는 대동아사(大東亞社)를 설립하고 그해 5월 《대동아(大東亞)》를 창간했다. 《대동아》는 《삼천리》의 제목을 바꾼 잡지였으나 친일 색채가 농후했으며 1942년 7월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되었다.
이후, 1944년 7월까지 김동환의 잡지 발행 및 출판은 지속되었다. 8.15 광복 후 김동환은 조선문단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지목되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는데, 이때 특기할만한 점은, 그가 1948년 9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되자 스스로 친일 행위 사실을 인정하고 자수했다고 한다. 이광수나 최남선같은 문단의 선배들이 치졸한 변명을 한 것과는 대조적이므로 높게 살 만하다. 또 해방 후 <꽃피는 한반도>라는 책에서 '반역의 죄인'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친일에 대해 사죄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1949년 8월 반민족행위자처벌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 직후인 7월 23일 납북되었으며 1956년 납북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에 위임되었다가 1958년 노동자수용소로 추방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여담
-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자식들은 대개 자신의 부모의 친일 행적을 옹호하고 두둔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동환의 셋째 아들 김영식은 그에 대한 각종 기록을 수집, 정리하고 문학적 성과를 조명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의 친일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분명히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영식은 3녀 1남을 두었고, 3대 독자 아들 김지훈은 딸 하나를 뒀다.
- 후처가 여류 소설가 최정희인데, 모윤숙, 노천명과 함께 대표적인 여류 문인계에서 친일파로 유명하다. 최정희가 친일파가 된 시기와 김동환이 친일파가 된 시기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이른지, 그리고 서로의 친일에 영향을 준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 첫 부인 신원혜(申元惠, 1903년~1993년)와 3남 1녀를 두었고, 최정희(崔貞姬, 1906년~1990년)와의 소생으로는 소설가 김지원, 김채원 자매가 있다. 그리고 김채원의 아들, 즉 그의 외손자는 현재 배우로 활동 중인 백수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