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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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채만식(蔡萬植, 1902년 7월 21일 ~ 1950년 6월 11일)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본관은 평강(平康)이며, 호는 백릉(白菱), 채옹(采翁)이다. 대표작으로는 〈레디메이드 인생〉(1934), 《탁류(濁流)》(1937) 《태평천하(太平天下)》(1938)[1] , 〈치숙(痴叔)〉(1938), 〈여인전기(女人戰紀)〉(1944), 〈미스터 방(方)〉(1946) 등이 있다.
2. 생애
1902년 전라북도 임피군 군내면 동상리(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에서 6남매 중 5남으로 출생하였다. 서울의 중앙고보를 거쳐 와세다대학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였다. 이 와세다 고등학원은 구제고등학교 및 대학 예과 과정에 상응하는 고등교육기관이다. 그러나 1년 만에 중퇴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써 온 소설로 등단하였고, 곧 기자 생활을 그만두었다. 그 이후 동반자 작가[2] 성향의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차차 풍자적인 성향의 작품을 발표, 〈레디메이드 인생〉과 <인텔리와 빈대떡>으로 입지를 굳혔다.
40대 중반에 사망해 작품 활동기 길지 않았음에도 대표적 다작 작가로 유명한데 소설, 희곡,[3] 동화, 수필, 평론 등 2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작품의 양만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채만식은 동시대 작가 위에 도도하게 군림한다. 서동산(徐東山)이라는 가명으로 최초의 근대적 장편 추리 소설인 〈염마(艶魔)>를 발표한 작가이기도 하다. 김유정과 함께 신식교육을 받은 도시인임에도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다룬 작가인데 제주도 사투리 말고는 다 나온다. 똑같이 사투리 활용이 다채로운 김유정이 요절로 30여편만 남긴데 반해 200여편을 남긴 사람의 작품이 8도 사투리를 넘나들어서 전집 내기 힘든 작가로 유명하다.
예술가답게 잦은 검열 기준을 넘나드는[4] 풍자적 성향의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다가, 그 이후 독서회사건으로 인하여 친일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3. 친일 행적
다른 친일파 문학가처럼 강연과 친일적 소설과 시로 친일 행위를 하였다. 하지만 별로 튀는 행동은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채만식은 광복 이후에 〈민족의 죄인〉이라는 중편 소설을 발표하여, 자신의 친일 행적을 반성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친일 행위를 한 것이 정당화될 수 없지만, 채만식은 적어도 포장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 다른 친일 문인들보단 양심이 있다는 평을 받는다.
광복 이후에는 <미스터 방>이나 <논 이야기>, <이상한 선생님> 등으로 미군정 하의 남한의 상황을 풍자한 소설[5] 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을 '''정확히 2주'''(정확히는 6월 11일 사망) 앞두고 낙향한 이리(지금의 익산시)에서 48번째 생일을 한달 앞두고 47세로 사망한다.[6]
그가 죽기 두어 달 전에 남긴 말은 "인편이 허락하는 대로 원고지 20권만 보내 주소. 내가 건강이 좋아져서 글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 같이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네. 나는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본 일이 없네. 이제 임종이 가깝다는 예감을 느끼게 되는 나로서는 죽을 때나마 한 번 머리 옆에다 원고 용지를 수북히 놓아 보고 싶은 걸세."[7]
연세대학교 교수 최유찬은 자신의 저서 <문학의 모험>에서 채만식의 친일 행위를 무조건 비판하기만 하는 행태에 일침을 가했다. 상술하였듯이 채만식의 경우 인정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서인지 돌베개 출판사에서 쓴 친일파 관련 서적에선 이효석과 같이 그래도 조금은 긍정적인 평을 내리고 있다.
4. 여담
평소 육식을 즐겨서, 집안 살림이 어려워도[8] 밥상에는 꼭 고기 반찬을 올렸다고 한다. 하루는 지인이 채만식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다가 밥상을 보고 이토록 고기를 즐기니 채(菜)만 식(食)이 아니라 '육(肉)만식(食)'으로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며 농담을 하기도 했단다. 이런 습관에서 기인했는지 채만식의 작품에서는 음식에 대한 묘사가 상세한 편이며, 심지어는 먹는 산적을 가지고 소설 한 편을 쓰기도 했다.
5. 채만식 문학상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채만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채만식의 작가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소설가들에게 수여하는 문학상을 제정했다. 매년 10월 5일 군산 시민의 날에 시상식이 열린다. 2003년부터 시상되기 시작했는데, 2005년에는 채만식의 친일 논란 때문에 한 해 걸렀다. 관련 기사. 2006년부터 다시 시상하기 시작해 2018년 15회를 맞았다. 다음은 채만식문학상 역대 수상자 명단.
6. 대표작
- 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으나 생전에 출간된 단편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 민족의 죄인 : 광복 직후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반성과 변명을 소설의 형식으로 써낸 작품이다. 역시 생전에는 단행본이 발간되지 않았다.
- 명일 : 궁핍한 개화기 조선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
- 염마 : 추리소설
- 왕치와 소새와 개미와 : 채만식이 쓴 대표적 우화.
- 인텔리와 빈대떡 : 소설이 아닌 희곡 작품이다.
- 삼대 : 생전에 출간된 단편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 탁류#s-1 : 1939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 태평천하 : 1948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 소망#s-4
- 치숙
- 순공있는 일요일
- 미스터 방
- 논이야기
- 두 순정
- 이상한 선생님
[1] 《조광(朝光)》 연재 당시 원제는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2] 당시 유행하던 카프 계열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와 비슷한 경향의 소설을 쓴 일련의 작가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 동반자 작가의 대표적인 예로 이효석이 있다.[3] 동반자 작가 시절에는 오히려 소설보다 희곡을 많이 썼다.[4] 마르크스를 막걸리라고 돌려쓰는 등, 이런 경향은 〈치숙>에서 잘 드러난다. 후기 소설(시기적으로는 일제 말)로 갈수록 총독부의 탄압 강도와 정비례하는 검열 때문에 '청산가리'와 같은 고유 명사를 '○○칼리' 같은 식으로 복자 처리해서 나오기도 한 듯하다. [5] 소설 속에 나오는 미 육군들의 모습도 그리 좋게 나오지 않는데, 거만한 상급자라는 투로 표현했다. 당시 일본의 역할을 미국이 대신 맡게된 신탁통치 시대상에서는 정확한 표현이었을 것이다.[6] 사인은 폐결핵이었다. 당시 결핵은 돈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치료가 가능했었지만 채만식은 가난해서 그럴 돈조차 없었다. 게다가 창작을 격하게 하여 건강이 상했고 당시 그의 하나뿐인 아들도 장티푸스에 걸려 자신의 병세 또한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병간호를 하느라 몸을 돌보지 못하였다.[7] 평소 채만식은 결벽증이 심해 글이 자신의 마음에 들때까지 고치는 경우가 많아 원고지 한 장 분량의 초고를 쓸 때에도 10장은 기본으로 버리고 썼다고 하며 작품을 쓸 때에도 원고지 수를 항상 확인해서 담당 기자가 매우 까다로워했다고 한다. 또한 외투와 중절모를 갖춘 정장에 웃는 포즈로만 사진을 찍었고 남의 집에 갈 때에도 항상 자신의 개인 수저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8] 왜냐면 채만식은 형의 금광 사업에 투자했다가 사업이 실패하는 바람에 가난한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