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2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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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0년 6월 15일부터 1961년 5월 18일까지 존속한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
1960년 4.19 혁명을 계기로 제1공화국이 무너지고 같은 해 6월 15일 3차 개헌으로 들어선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한 의원내각제 헌정 체제이다. 또한 대한민국 제1공화국~ 현재의 대한민국 제6공화국을 통틀어 가장 짧은 존속기간을 가진 체제이다.
체제는 사실상 5.16 군사정변으로 무너지는데, 1960년 6월 15일부터 1961년 5월 18일까지 11개월간 실질적으로 존속했으며, 내각은 1960년 8월 19일에 출범하여 약 9개월간 존재하였다. 행정부 수반은 국무총리 장면이었으며, 간선제에 의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윤보선을 두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설립된 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에 권한을 빼앗김으로서 붕괴되었다.
2. 장면 내각
2.1. 의의
2.1.1. 경제제일주의
1950년대의 이승만 정부는 경제정책을 수행함에 있어서 독립국가로서 나라의 위신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예컨대 이승만 대통령은 환율과 관련하여 미국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1957년~59년 초긴축정책을 취하였다. 그에 따른 불황보다도 국격을 고수하는 것이 그에게는 훨씬 중요하였다. 이 같은 정치제일주의가 지배한 이승만정부에서 시장의 논리에 충실한 기업인들이 경제정책의 수립에 참여할 여지는 별로 없었다. 행정부 수반 장면 총리는 한강의 기적을 역설하였으며, 민주당은 국시로 경제제일주의를 내걸었다. 이를 위해 공업화를 추진하였고 댐, 발전소, 도로건설 등의 대규모 건설을 추진하는 국토건설사업을 계획하고 국민총소득 2%에 맞먹는 400억 환을 연간 예산으로 설정하였으며[1] 장준하의 도움을 받아 국토 건설단을 설립하였다. 한편, 행정부 수반 직속에서 재정금융, 정책조정, 통계조정을 담당하고 각 부처를 평가, 계획하는 경제기획원을 준비하였다.[2] 이러한 정책과 경제관은 박정희정부에서 계승되었다.
2.1.2. 과거사 청산
4.19 혁명 이후 검찰은 3.15 부정선거 관련자 및 반민주행위자를 구속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2공화국 출범이전인 허정 과도정부의 법령으로 기소된 13명 가운데 10월 8일 선고 공판에서 유충렬 한 사람에게만 사형이 내려지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집행유예나 무죄 등을 선고받아 석방됐다. 이에 서울, 부산, 마산 등지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10월 1일 4.19 혁명 부상학생과 희생자 유가족들에 의한 의사당 난입사건에 일어났다. 그러자 민의원 본회에서는 '''민주 반역자 형사사건 임시처리법'''을 제정, 공포하여 다시 검거하였고, 현행법으로 다스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혁명입법에 의해 탄생한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에게 이를 맡겼다.[3] 동시에 11월 29일 4차 개헌이 이루어졌다.[4] 법률을 소급함으로써 4.19혁명에서의 반'''민주''' 행위자를 처벌을 위한 특별볍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5]
그 결과 혁명입법 4대 법률로서 3.15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 특별재판부·특별검찰부조직법,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 부정축재처리법이 마련되었다. 이중 1961년 1월 4일 효력이 발생한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은 각계 인사 658명의 공민권을 7년 혹은 5년 간 일률적으로 제한하였으며, 14,000명을 추가로 심사하게 하여, 총 16명의 국회의원 자격을 박탈하고[6] , 이를 포함한 666명의 공민권을 7년간 제한하였다. 그러나, 1961년 5월 4일 발휘된 부정축재 처리위원회의는 집권당인 민주당 각파간의 이해관계가 얽히는 바람에 5.16 군사정변까지 한 건도 처리하지 못하였다[7]
한편, 정부는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였다. 가장 많이 학살당한 지역인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등 학살현장을 돌며 실태조사를 벌였고, 정부에 진상조사와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했다. 각 지역에서 합동위령제가 올려지자, 장면 국무총리는 보도연맹 학살사건 희생자들에 대한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기도 했다.
2.1.3. 선건설 후평화통일론
진보당 사건 등으로 이전 정권까지 철저히 탄압당했던 평화 통일론이 4.19 혁신세력의 대두와 함께 수면위로 떠올랐고, 이에 정부는 선건설 후통일론을 내세웠다. 전쟁을 겪은지 근 10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을 고려해보면 그 의의는 자못 크다. 당장의 통일은 불필요하며 통일 역시 우리가 잘 살게 된 다음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는 제2공화국의 방침은 사실상, 혁신세력의 주장을 완전히 기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박정희 정부의 대북관에서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7.4 남북 공동 성명, 7.7 선언, 6.15 남북 공동 선언, 10.4 선언, 8.25 남북합의 등 남북 상호 인정 및 남북간 협상, 교류로 이어졌다.
2.1.4. 민주 개혁
지방자치제도[8] , 양원제[9][10] , 사법부선출제[11] 를 실시함으로써 주권재민과 삼권분립에 기여했었다.
그러나 사법부선출제는 미국처럼 일반인들이 법관을 뽑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법관 자격이 있는 사람, 즉 변호사들만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았다는 한계가 있었으며, 사법부선출제는 공정해야 할 사법부를 정파적으로 분열시킨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2.1.5. 사회
학생 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고, 교직원 조합, 노동 조합 등이 다수 설립되었다. 4.19 혁명에 고무된 문학 작품들 또한 쏟아져 나왔으며 최인훈의 광장이 발표되어 남북 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성찰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부터다.
또한 이승만 정부 내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었던 이른바 혁신 세력들이 결집하여 혁신 운동을 일으켰고, 이들 세력은 통일을 남한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로 보고 장면정부의 '선건설 후평화통일론'은 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비판하면서 중립화 통일론, 남북 협상 통일론 등을 주장하였다.
2.2. 논쟁점
2.2.1. 무능하고 혼란한 정권이었는가?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박정희 정권은 제2공화국이 전략적으로 무기력하고 통제력이 없는 정권이었다고 주장하였고 많은 보수 우파 세력들도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우파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및 민주화 세력 혹은 좌파들에게도 제2공화국은 한동안 부정적으로 비쳐졌다. 기껏 4.19 혁명을 이뤄놓고 제대로 나라를 이끌지 못해 군부에 나라를 내줬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2공화국은 정치적 불안에 시달려왔다. 1960년 6월에 국회는 의원내각제로 정부형태를 바꾸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내각제는 이승만정부에 대항해 온 민주당(1955년)이 처음부터 고수해 온 당론이었다. 민주당은 이승만의 권위주의 정치를 비판해왔는데 4.19는 민주당에게 이들이 주장해 온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새로운 국회에서 지배 정당이 된 민주당 내부에는 구파와 신파의 대립이 있었다. 그들은 무소속 당선자를 자파에 영입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그해 8월 민주당 구파에 속하던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윤보선 대통령은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으나 국회에서 1표 차이로 인준을 받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신파에 속하던 장면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였고 국회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인준하였다. 장면총리는 국무위원들을 신파 일색으로 구성하였는데, 이는 구파의 큰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후 두 당파는 서로를 근본적으로 불신하였고 신민당을 별도로 창당하였다. 2공화국은 10개월 동안 무려 세 차례나 개각을 거듭하였다. 국무위원들은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기 일쑤였다.
또한 윤보선은 상징적인 국가원수에만 머물려 하지 않았다. 헌법은 대통령이 정당에 속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민주당 내에 남아있는 구파나 신민당의 이해를 대변하였고 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발의된 이 애매한 규정은 대통령과 총리가 사사건건 대립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각료 자리를 둘러싼 2공화국의 국정운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정치 불안은 5.16이 성공하는 주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며 민주화 투쟁을 하던 이들도 내각제로의 전환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즉 제2공화국은 자신이 만든 헌법을 정파간의 갈등 때문에 스스로 실천하지 못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헌정을 훼손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화 시대가 개막하여 '장면 정권은 1961년 초에 들어가면서 차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는 반론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역사관에도 많이 반영되었다. 4.19 혁명 1주년 큰 혼란이 올 것을 예상하며 계획했던 5.16 주동세력의 예상과는 다르게 대한민국은 평온하였고[12] 이 때문에 당시의 사회 혼란을 '민주주의를 위한 당연한 진통'으로 파악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장면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절대적으로 받는 정부가 아니었던 것은 사실이고, 아직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적 의식이 확실히 자리잡지 않아 혼란상에 질려버린 국민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국민과 미국 정부는 모두 5.16 직후에는 중립적인 의견을 보냈고, 일부 지식인들은 5.16 군사 정변을 4.19 혁명의 연장 선상으로 보기도 했으며, 5.16초기에는 반체제 민주화 인사로 유명한 '''장준하'''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2.2.2. 사회 불안
4.19혁명 이후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끝도 없는 시위의 물결로 가득했다. 장면 정부 10개월동안 가두 시위는 총 2,000여건, 시위 참가자만 100만 여 명에 달하였다. 매일 평균 7~8건의 시위가 발생한 셈이다. 국민학생들은 교사의 전근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거나 어른들은 시위를 그만하라는 시위까지 발생하였다. 경찰은 국회의원이 뺨을 때렸다고 시위를 하였고, 육군훈련소의 훈련병들은 장교가 하대를 한다며 시위를 하였다.
국회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여 수많은 언론 매체들이 창간되어 일간지는 기존의 41개에서 60년 12월 말까지 390개로 증가하고 주간지, 월간지, 통신사도 마찬가지였다. 수가 늘어난 언론은 정부나 권력기관을 비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에 정부는 언론규제법을 시행하려다 실패하였다.
장면은 안보와 치안의 핵심세력인 군과 경찰을 숙청과 혁신의 대상으로 삼았다. 장면은 선거 공약으로 군 병력 10만 명 감축안을 내놓았고, 집권 후 감군 정책을 추진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3만여 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 또 잦은 군 지도부 개편으로 1년도 안 되는 재임 기간 동안 국방부장관이 세 번, 육군참모총장이 네 번이나 바뀌는 등 파행을 거듭했다.일제 식민경찰에 복무한 경력이 있던 경찰관들은 4·19를 계기로 숙청의 칼날을 맞았다. 경찰서장 81명을 포함하여 경찰관 1만 7,000명이 해직됐고, 전체 경찰관의 80%를 근무지를 변경시켰다. 민주당 정권 9개월 동안 경찰업무를 관장하는 내무장관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그 중 네 명은 각각 한 달 간씩 재직했다. 경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민주당 집권기간 중 범죄가 두 배로 늘었지만 범인 검거율은 이승만 정부 시절의 90%에서 65%로 낮아졌다. 경찰력이 허약해진 틈을 타고 깡패와 조직폭력배가 활개를 쳤으나 장면 정부는 공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책과 함께, 2012, 186p
장면이 정권을 장악한 지 몇 달 후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3.7%만이 장면을 지지할 정도로 민심이 이반됐다. 미국 정부는 장면의 리더십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 시작했다.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정치적 리더십 측면에서 볼 때 장면은 적임자가 아니며 한국 정부는 개인보다는 젊고 유망한 지도자 집단이나 조직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앞의 책 190~191p
2.2.3. 남북관계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제1공화국과 달리 제2공화국은 1948년 UN처럼 인구비례 총선거에 따른 통일을 주장했다. 북한에 대한 태도는 확실히 제1공화국에 비해서는 누그러졌다. 하지만 북한과 교류 및 대화에 있어선 제1공화국과 마찬가지로 회의적이었으며 체제 경쟁 및 대결을 지향했다.
그러나 민주당 구파에 의해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이 만들어지게 되며 현재까지도 국가보안법의 일부에 편입되어, 집시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전해지고 있다. 제2공화국 역시 반공주의적 입장에서는 제1공화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와 같은 2공화국 정부의 태도와는 별개로 이 시기에 이승만 정부 시절에 지하에 숨어든 좌익세력이 다시금 고개를 들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인민공화국 만세", "김일성 만세"와 같은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들이 자주 등장하였다.#
1961년 5월 5일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단체인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은 남북학생 회담을 제의하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북한은 즉시 환영을 표하면서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하자는 공식성명을 발표하였다. 장면 정부는 남북교류와 학생회담은 위험하여 허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하였지만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서 남북학생회담 환영 궐기대회를 여는 데에서 그 유명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가 내걸렸다. 이러한 정세에 장면 정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렇듯 장면 정부가 불과 13년 전에 성립된 신생국의 국가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을 돌파할 만한 능력을 보이지 못하자 대다수 국민은 깊은 위기감에 휩싸였고 이러한 배경들은 5.16 군사정변이 성공하는 요인이 되었다.1961년 3월 초에는 「팔리 보고서」가 등장했다. 팔리 보고서는 “장면 정부가 4월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며, 이 사태를 방치할 경우 한국에서는 공산혁명이나 그와 비슷한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김일영, 『건국과 부국』, 기파랑, 2012, 307p
2.2.4. 경제적으로 무능했는가?
경제적으로 무능했다고 비판받기에는 그 존속기간이 너무 짧아 명징하게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제2공화국 정부는 불균형 발전을 골자로 하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발표는 5.16 이후 이루어졌다. 그러나 5.16 이후 이와 차별을 두려던 군인들의 계획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결국 이를 작성한 장면정부의 경제학자, 관료들의 의견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의 경제성장은 기존 제2공화국의 정책을 온전히 따른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민주당의 계획안은 세계 4위 70만 국군의 규모를 10만명 감축하는 등 예산안 대비 국방비를 20%로 10%p 낮춤으로써 추가적인 재원 확보를 노렸지만, 감축안의 경우 5.16 이후 군부의 이해 관계와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따라 백지화되었고 따라서 총투자액 중 차관 도입 비중은 더 커졌다. 그러므로 장면정부의 계획과 1964년부터 시행한 경제정책을 동일하게 보는것에는 무리가 있다. 1962년부터 제2공화국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1964년 수출 1억 달러, 19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한 것과 중공업화에 성공한 것은 기본적으로 박정희 정부의 성과이다.
박정희 정부 출범 이후 초기 3년간 시행한 경제개발 계획은 전체적으로는 제1공화국 ~ 제2공화국 계획들에서 주요 지표들을 수정한것이다. 이는종속이론에 입각해 시행한 수입대체산업화가 골자였지만 1964년 달러당 130원의 공정환율을 265원으로 평가절하해 환율을 현실화하고 전 산업의 수출화로 전환하는 수출주도산업화로 근본적으로 뜯어고쳤다.수출주도 노선이 성과를 본격적으로 거두기 시작한 이후의 한국 경제 성장[13] 을 생각해보면 연관성은 많지 않다. 다만 세부적인 인프라 건설 계획 등은 연결된다.
다음은 장면 총리 집권기 당시에 실제로 시행된 국토개발계획들의 목록이며, 다음에 제시된 국토개발은 확실히 제2공화국의 과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댐 건설 및 수원, 전력확보 계획
- 화물철도 건설 계획
- 울산공업도시 건설계획
- 도로망 정비
2.3. 국무위원
3. 관련 문서
4. 관련 문헌
- 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 - 한승주 저. 종로서적. 1983.
- 제2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 - 백영철 저. 나남출판. 1996.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2권) - 박세길 저. 돌베개. 1989.
- 한국 현대사 산책: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1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 건국과 부국(이승만 박정희 시대의 재조명) - 김일영 저. 기파랑출판사
-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경제 성장과 민주화 그리고 미국 - 그렉 브레진스키 저. 책과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