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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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작품
4. 가족관계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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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효석(李孝石, 1907년 2월 23일1942년 5월 25일)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한민국작가이다. 호는 가산(可山)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 안원대군파이다.


2. 생애


경성제국대학 재학시절 이효석
1907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에서 한성사범학교 출신으로 교직에 있었던 부친 이시후(李始厚)와 성결교단 집사였던 모친 강홍경(康洪卿) 사이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대학 재학 중인 1928년 잡지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실리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참고로 고등학교 시절 처음 만나 절친하게 지낸 친구가 유진오다. 유진오는 시를, 이효석 본인은 소설을 써서 서로 교환하여 읽고 비평하며 우정을 다져갔다. 그리고 이효석이 잡지에 글을 써서 받은 고료로 유진오와 자주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임종하기 전 보고싶다고 했던 사람도 친우인 유진오였다.
그러면서 1931년 일본인 은사의 도움으로 취직하기도 했는데 하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근무하는 서기였다. 양심의 가책과 세간의 비난을 견디지 못한 이효석은 불과 보름 만에 사직하고 말았다. 일각에서는 평론가 이갑기[1]에게 '''"네놈도 결국은 개가 다 되었구나!"'''라고 매도당한 데 충격을 받아 사직했다는 일화가 전하나, 이효석의 경성제대 영문학과 2년 후배인 조용만[2]의 회고에 따르면 이는 낭설일 개연성이 높다.
작품 활동 초기에는 사회주의 운동에 동조하는 경향의 작품을 펴냈다. 이후 작품의 경향이 바뀌어 순수 문학의 길을 걸었고,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사실 향토색 짙은 작품만 쓴 것은 아니고, 모던보이나 근대 문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도 있으며, 불륜과 치정극을 다루는 대중 소설도 냈다. 다만 의무 교육 상에서 다루어지는 이효석은 메밀꽃 필 무렵의 그늘이 너무 강해서 향토적인 작품을 낸 작가라는 부분이 아직까지도 크게 강조되는 편이다.
무엇보다 메밀꽃 필 무렵을 포함한 단편 몇 개를 제외하면 문학적으로 높게 평가받는 소설가가 아니다. 특히 장편들은 평이 나쁘다. 장편 소설가 이효석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재능. 그나마 화분 정도가 언급되는 정도.[3] 소설은 글이 다소 거칠더라도 서사 먼저 있고 문장이 다음인데 이효석은 아주 전형적인 '''문장만 예쁜 작가'''였다. 서사를 묵직하게 끌어가며 메시지를 주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의 작품들은 항상 기승전결의 '결'에 가면 힘이 빠져 흐지부지되어버린다. 당연히 글이 길어지면 질수록 이 단점이 커지니 장편들에 대한 평이 특히 박하고, 단편 몇 개만 기억에 남은 것이다.
그런 이효석이 지금까지 기억되고 이상, 김동인, 김유정 같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가들과 같이 자기 이름을 딴 문학상을 갖게 되고, 일반인들 사이에선 거장이라는 과분한 대우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친구 잘 둔 덕이다. 절친한 친구 유진오가 소설가면서 정치인이자 법조계 거물이라 정치권력을 뒤에 두고 문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간 친구를 기리고 부각시키는 데 성심을 다했다. 반민족 행위 경력이 있음에도 오래 회자되는 작가들은 서정주나 김동인처럼 차마 지워 없앨 수 없을 정도로 문학적 성과가 뚜렷한 작가들이 대부분인데[4] 전형적인 한작품갑인 이효석은 유진오의 판깔기로 예외가 될 수 있었다. 반민족 행위 경력도 가난에 찌든 말년의 비참함이 부각되어 동정표를 받을 수 있었고.
김동리는 그의 작풍에 대해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는 평을 내렸다. 비판이 아니라 거의 시인이 소설을 쓰듯, 소설의 분위기를 잡는 데 능하다는 반어이다. 이는 그의 작품 중 메밀꽃 필 무렵에 잘 나타난다.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재직 시절 이효석
1933년 8월부터 순수문학단체인 '구인회'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탈퇴, 1936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1936년에는 걸작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는 등, 교직에 있으면서도 작품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2차대전 와중에는 생활고에 시달렸고 병에 걸린 자신의 아내와 차남을 살리고자 부득이하게 친일행적을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처와 자식 둘 다 1940년 연이어 세상을 뜨고 만다'''.
지인들 앞에서 이효석은 다음의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총독부에 근무하면서 호강을 부리던 놈이 객기로 그만둔 것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나, 먹고살고자 다시 왜놈에게 아첨을 하는 글을 쓰는 건 두고두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오."

결국 그 자신도 병마로 고생하다가 1942년 5월 25일 한창 나이인 35살에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시신은 그의 부친 이시후에 의해 강원도 진부면 하진부리 곧은골에 매장되었다가 영동고속도로 개설로 인해 1998년 9월에 경기도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으로 이장되었다.
1982년 10월 문화의 날을 맞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3. 작품


그의 저작 활동은 100편에 가까운 단편에 집중되어 있으나, 경성제일고보 재학 중에 발표한 시를 비롯하여 장편소설, 수필, 평론, 희곡 · 시나리오, 번역 등 다방면에서 작품을 발표하였다.
단편집 기준으로 그의 대표작을 추리면, <노령근해(露領近海)>[5], <해바라기>[6], <이효석단편집>[7] 등이 있다.
장편으로는 『화분(花粉)』(1939년 작), 『벽공무한(碧空無限)』(1941년 작)[8]이 있으며 이 중 『화분』은 1972년 하길종 감독이 영화화하였다.
110편이 넘는 수필을 발표하여 당대에는 수필가로서도 명망이 높았으며 중 · 고교 교과서에 실린 바 있는 「낙엽을 태우면서」가 대표작이다.
1달에 7~8편의 영화를 감상한 영화광이라 전하며, 직접 희곡과 시나리오를 창작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김유영(金幽影), 서광제(徐光齊), 안석영(安夕影) 등과 함께 ‘조선씨나리오·라이터협회’를 결성하고 연작 시나리오 「화륜(火輪)」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침체의 늪에 빠진 당시 조선 영화계에 활력을 주었다고 평가 받는다. 그가 창작한 희곡 · 시나리오 7편 중 생전에 영화화한 작품은 <화륜>(1931년 개봉, 김유영 감독), <애련송(愛戀頌)>(1939년 개봉, 김유영 감독)[9]이 있다.

4. 가족관계


부인 이경원(李敬媛), 이효석, 차녀 유미(瑠美), 장남 우현(禹鉉), 장녀 나미(奈美), 1938년 4월
부인 이경원은 1914년생으로 함경북도 경성 출생이다. 이효석은 동성동본임에도 1931년 7월에 이경원과 혼인하였다. 이경원은 1940년 2월 22일 평양에서 복막염으로 요절하였으며 슬하 2남 2녀를 남겼다. 이 가운데 차남 영주(煐周)는 생후 4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5. 기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이효석문학상이 있다.
한국의 토속적 색채를 강하게 그린 메밀꽃 필 무렵과는 달리 서구적인 문화를 매우 즐겼다고 한다. 빵과 버터, 커피 등을 즐겨먹고 쇼팽과 모차르트의 피아노곡 연주, 벽돌집, 서양영화 감상 등을 즐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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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3일에 나온 탄생 105주년 기념 구글 두들
[1] 융희 2년(1908년)생으로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활약하기도 했던 사회주의 계열 문인이다. 평론가로써 민족주의 문학론을 발표했고, 임화, 백석과 마찬가지로 해방 뒤에 월북한 탓에 한국에는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에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나간 듯 하지만 언제 죽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결말이 좋지는 못했었던 모양.[2] 조용만(趙容萬, 1909~1995): 한국의 영문학자, 기자, 문학가. 경성제국대학 영문학과 졸업 후 《매일신보》 기자, 《경향신문》,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 《국도신문》 주필과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초기 영문학자 중 한 사람으로 다양한 영미문학을 한국에 소개하였으며,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1953~1975).[3] 당시 근대 작가들의 상당수는 통속 소설(특히 역사 소설, 딱 지금의 무협지 같은 위상이었다)을 냈었다. 90년대 말 ~ 2000년대 이후 미시사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이쪽에 대한 조망도 많아졌다.[4] 춘원 이광수는 그만의 특이 케이스인데 이쪽은 작가로선 형편없지만(이광수를 분석한 논문들은 대개 문학성은 논외로 하고, '문학성은 떨어지지만' 같은 전제를 아예 미리 깔고 들어간다.) '최초'라서 빼놓곤 도저히 국문학사를 설명할 수 없어서 계속 회자되었고, 앞으로도 회자될 것이다. 친일 행적마저 광신적 친일파로 분류될 정도로 매우 독보적이었으니 나쁜 의미의 언급으로라도 이름이 계속 알려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도 하다.[5] 1931년 출간된 단편집. <도시와 유령>, <기우>, <행진곡>, <추억>, <상륙>, <북국사신(北國私信)>, <북국점경(北國點景)>, <노령근해> 등 8편이 수록되어 있다.[6] 1939년 출간된 단편집. <돼지>, <삽화>, <수난>, <산정(山精)>, <장미 병들다>, <막(幕)>, <부록>, <해바라기> 등 8편이 수록되어 있다.[7] 1941년 출간된 단편집. <메밀꽃 필 무렵>이 바로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수탉>, <산양>, <독백>, <일기>, <석류>, <계절>, <공상구락부(空想俱樂部)> 등 총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8] 1940년 신문 연재 시 제목은 『창공(蒼空)』이나 단행본으로 발간 시 개제되었다.[9] 최금동(崔琴桐, 1916~1995) 원작 시나리오를 이효석이 각색한 작품이다. 최금동은 이 작품의 원작 시나리오로 데뷔하여 광복 이후 한국 시나리오 문학계를 이끌어 간 인물로서,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을 7차례나 역임하고 1970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