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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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장관, 정치인.
2. 생애
1907년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마전리 석계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성팔(聖八)이나 1930년대에 석호(錫虎)로 개명했다. 대구고등농림학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이던 1933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이후 관료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직전 충청남도청 광업부장(고등관 3등)으로 있었다.
그러나 8.15 광복 후 미군정청은 관료로 남아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반성의 뜻으로 사표를 제출하였다. 이후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북도 예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을 탈당하여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신파에 속하였다.[3]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정재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국방부장관을 2번,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장관을 1번 역임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두 번째 국방부장관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수감되었다 풀려났다. 1963년 장면, 김도연, 오위영, 조재천, 박순천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였다.
장면내각 내에서 차기 총리로 내정될 예정이었으나 5.16과 장면내각의 실각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3. 기타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의 조선총독부 사무관 분야에 선정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1984년 <경향잡지>에 '한 삶의 고백'이란 회고를 연재하면서 일제강점기의 관료 생활을 반성하는 내용을 글을 싣기도 하였다.
장면내각의 실각후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정계를 은퇴하였다.이후 가톨릭신자로서 "가톨릭교리연구소장"을 역임하며 장면에 이어 2번째로 로마교황청의 기사대장 칭의를 수여 받았다.
친동생 현석주 장군은 박정희와 육사동기인데 이는 문민통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밑거름이 되었다.(현석호 장관 이후 민간인 출신의 국방부장관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