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람 5세

 


사산 왕조 제17대 샤한샤. 재위기간 421 - 438년.
1. 즉위
2. 동로마와의 대결
3. 아르메니아 병합
4. 훈족 공략
5. 문화대국
6. 전설


1. 즉위


야즈데게르드 1세의 아들이며, 야즈데게르드 1세가 암살당하자, 무드히르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원수인 반대 귀족들을 숙청하고 421년에 제위에 오른다. 이후 많은 업적을 달성하며 페르시아의 황금기를 구가했으며, 이로 인해 성군의 반열에 오른다.

2. 동로마와의 대결


동로마 제국은 인테르치소의 기독교 박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다.[1]421년에 동로마는 알다부리우스 장군을 아르메니아에 파견했다. 알다부리우스는 페르시아의 나르세 장군을 패배시키고 아르젠느 지역을 약탈하였다. 그리고 니시비스 지역을 공략했다. 그러나 알다부리우스는 테오도시오폴리스를 차례차례 포위하는 바흐람 5세의 강력한 군에 직면하여 공략을 포기한다. 결국 422년에는 두 국가 사이에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3. 아르메니아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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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병 이후의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의 왕위는 418년부터 바흐람 5세의 아들 샤푸르가 사퇴한 이후로 비어있었다. 바흐람 5세는 동로마와의 싸움이 끝나자 아르샤쿠니의 아들인 바흐람-샤푸르를 왕위에 앉혔다. 하지만 새롭게 지명된 왕이 인간말종이였던 탓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바흐람 5세에게 아르탁시아스의 자손을 몰아내고 한때 독립했던 아르메니아를 이참에 사산 왕조에 병합하자는 탄원을 올렸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원로 아이작이 반대하지만, 결국 428년에 아르메니아는 사산 왕조의 밑으로 병합된다.

4. 훈족 공략


바흐람 5세의 치정 말기에는 현재 이란의 북부를 유린했던 에프탈로부터 침략을 받는다. 바흐람 5세는 불시에 찾아온 위협에 평화를 제의하였고 에프탈의 왕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에프탈의 왕은 귀환하는 중 훈족의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았고 그의 부인은 인질로 납치당한다. 그러나 퇴각하는 훈족은 아무다리야 강 인근에서 쫓기며 살육당했고 이에 바흐람 5세는 훈족 본거지 깊숙한 곳까지 개발살냈다.

5. 문화대국


바흐람 5세는 환상적인 이야기들과 수많은 전설들을 옮기길 좋아하는 작가였다. 그의 명성은 조로아스터교의 저변에서부터 반 이란적인 우마이야 왕조와 몽골 등 그리고 현대 이슬람 설화에 깊게 관여하였다. 이 시대 아라비안 나이트가 지어졌다.
또한 조로아스터교의 많은 신전을 세우고 넓은 정원과 마을들을 만들기도 하는 등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황금기를 이룩해 낸 인물이다.

6. 전설


이렇듯 뛰어난 업적을 이루고 성군으로 불린 바흐람 5세는 그에 걸맞게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다.
한 전설에서는 바흐람 5세가 중국을 공략하는 인도의 왕을 지원한 적이 있었는데, 인도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마크란 지역과 신드를 페르시아에게 양도하였다. 그리고 인도의 위대한 왕에 의해 음악가의 자손들이 페르시아로 보내졌으며 이것은 페르시아인들에게 화제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를 뒷받침할 역사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한가지의 전설로는, 바흐람 5세가 인도의 공주와 결혼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결혼으로 인한 동맹이라는 결론 역시 증거가 부족한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바흐람의 이름은 펀자브의 전설적인 인도 왕자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밖에도 아시아 당나귀를 사냥하는 도중에 사랑을 만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피르다우시의 《샤나메》에선 바흐람 5세가 사자 두 마리를 살해하여 그것들로부터 왕관을 탈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1]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 박해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으로 피신한 기독교도들을 송환시키라고 요구했으나 테오도시우스 2세는 거절한다. 이에 바흐람 5세는 사산제국 내 금광에서 일하던 로마인들을 체포하는 걸로 보복하였고 전쟁이 시작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