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재룡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우재룡은 1884년 1월 3일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왕산리 왕미마을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사과(司果)를 지낸 단양 우씨 채희(禹彩熙)와 진주 강씨의 6남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훗날 자신의 생애를 회상하면서 지은 <백산실기>에 따르면, 그는 출생 후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으로 이주해 5년을 거주했고 7살에 청송군 현서면 무계리 유전마을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는 청송에서 글공부를 시작했지만 글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군대에 입대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이후 청송에서 영천을 거쳐 대구부 성서면 신당리(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신당동)로 이사한 그는 1902년 대구부 진위대에 입대해 정미 7조약이 체결되면서 군대가 해산하는 1907년까지 5년간 복무했다.
우재룡은 대구 진위대에서 근무하면서 대구 감옥에 수감 중이던 의병장 정용기(鄭鏞基)를 만났다. 정용기는 부친인 정환직(鄭煥直)과 함께 1905년 12월 을사조약 철폐를 요구하며 영천에서 의병을 모집한 뒤 경주로 진군하다가 경주진위대에게 체포된 인물이었다. 우재룡은 전국의 우국지사들이 찾아와 정용기의 석방을 요구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그를 흠모했고, 나중에는 의제(義弟)가 되어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한다.
2.2. 의병장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당하자, 우재룡은 이에 반대해 동지들과 함께 탈영했고 정용기가 다시 청송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청송으로 찾아갔다. 정용기는 그의 의기를 높게 평가하며 의진에 편입시켰고, 그는 이때부터 정용기의 부관으로서 의병 전쟁에 참전했다. 우재룡은 ‘연습장’을 맡아 의병들에게 군대 경험을 전수했고, 1907년 7월 17일 의병 300명을 이끌고 청하현(현 포항시 북구 청하면)을 공격해 분파소를 소각하고 한인순사 1명을 사살했다. 의병대는 청하현에서 획득한 무기를 천령(泉嶺)에 감춘 뒤 8월 초 청송을 공격했지만 장마가 계속 내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다시 신령(新嶺)으로 이동했다.
<백산실기>에 따르면, 신령에 도착한 의병대는 일본군이 영천에서 청송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기다렸지만 일본군이 오지 않아 전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그들은 안동과 의성을 거쳐 신령에서 매복해 8월 14일 일본군을 기습했지만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전투를 오래 끌지 못하고 일본군을 쫓아내는데 그쳤다. 이후 8월 24일 일본군이 영천에서 자양(현 영천시 자양면)으로 이동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의병대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1개 부대는 노항동(魯巷洞 : 현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 다른 부대는 검단동(檢丹洞 : 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검단마을)에서 일본군을 공격했다. 우재룡은 선봉을 맡아 월연동(月淵洞 : 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월연마을)에서 포위된 일본군을 공격해 한 명을 참수했다.
그해 8월 말, 보현산 주위 마을에 주둔하던 의병대는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정용기는 일본군이 입암(立巖 : 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에 유숙할 것을 예상하고 의병장들에게 매복을 지시했다. 우재룡은 본진이 입암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퇴로를 막아 모두 섬멸하기 위해 매복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9월 1일 저녁 일본군이 입암에 들어와 유숙한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정용기는 어둠이 걷히는 새벽에 입암을 공격하기로 하고 우재룡을 비롯해 김일언, 이세기는 퇴로 차단을 위해 매복하기로 했다. 그러나 매복하기로 했던 이세기가 조급한 나머지 단독으로 입암을 공격해버리는 우를 범했고, 뒤이어 본진이 입암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패했다.
이 패배로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이 전사하고 입암은 초토화되었다. 우재룡은 선봉장으로서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한 뒤 정순기와 함께 정용기의 부친 정환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의진을 재편성했다. 그들은 청송의 보현산과 포항의 동대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청하분파소, 흥해분파소 등을 공격했으며, 영덕읍을 공격해 일본군을 사살하는 등 경북지역에서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 그러나 군수품이 부족해지고 일본군의 공세가 갈수록 심해지자, 정환직은 의병장들을 각지로 파견해 유격대와 군수품을 조달하며 강원도로 북상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정환직은 먼저 북상을 개시했지만 도중에 청하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우재룡은 이 소식을 듣고 이세기 등과 함께 정환직 구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정환직은 1907년 12월 7일 영암에서 처형되었다. 우재룡을 비롯한 의병장들은 최세윤(崔世允)을 대장으로 추대했다. 최세윤은 북상 계획을 중단하고 지구전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그는 경상도 일대에 각 책임자를 배정한 후 소부대로 유격전을 펼치기 위해 의진을 재편성했다. 이에 따라 우재룡은 영천 서부지역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동화사를 근거지로 삼고 팔공산 일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1908년 7월 최세윤이 일본군에게 체포되고 그를 따르던 핵심 간부들도 뒤따라 체포되면서 더이상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이때 우재룡 역시 체포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정확한 체포 날짜는 알 수 없다. 그는 1908년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가 적용되어 종신형 처분을 받았다. 그 후 감옥에 갇혔던 그는 한일병합 후 특사로 풀려났지만 일제의 감시가 심하자 은거 생활을 해야 했다.
2.3. 광복회
1914년, 허위의 제자인 박상진(朴尙鎭)이 우재룡을 찾아와 독립운동을 같이 할 것을 제안했고, 우재룡은 이를 승낙했다. 그는 이때부터 만주와 조선을 왕복하며 독립운동 거점 마련에 착수했고, 1914년에는 거처를 박상진이 거주하고 있던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로 옮겨 광복회 조직에 착수했고 1915년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가 결성되는 자리에 참석했다. 광복회는 구한말 의병계열과 계몽운동계열이 연합해 결성한 국내비밀단체로, 한일병함 후 침체된 국내 독립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광복회는 독립을 위해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무력이 준비되면 일제와 전쟁을 치르려고 했다.. 이를 위해 한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농토를 개간해 식량과 병력을 공급할 계획을 수립했다. 광복회는 비밀 폭동 암살 명령 4대 행동강령 아래 다음과 같은 투쟁 강령을 채택했다.
우재룡은 광복회에서 군자금 모집과 국외 연락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대동상점을 운영하고 있던 권영목이 제공한 비용으로 길림에서 손일민, 주진수(朱鎭洙), 양재훈(梁載勳), 이홍주(李洪珠) 등과 함께 1915년 12월 길림 광복회를 설치했다. 또한 1915년 12월 경주에서 대구로 세금이 운송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권영만과 함께 작전을 구상했다. 먼저 권영만이 환자로 가장해 우편마차 주인집에 숙박한 뒤 대구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핑계를 내세워 우편마차에 동승했다. 이후 우재룡은 경주 광명동 효현교를 파괴하고 마차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우편마차가 다리를 건너지 못하는 틈을 타 권영만과 함께 들이닥쳐서 권총으로 협박하고 8천 7백원을 탈취했다.1.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日人)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2. 남북만주에 군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3. 종래의 의병 및 해산 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4. 중국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5. 본회의 군사행동․집회․왕래 등 모든 연락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대구)에 두고, 한만(韓滿) 요지와 북경 상해 등에 지점 또는 여관 광무소(鑛務所) 등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한다.
6. 일인(日人)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隨時),수처(隨處)에서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를 둔다.
7.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日人)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을 달성한다.
이후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김경옥(金景玉), 김재수(金在洙), 김재서(金在瑞), 김상호(金尙浩), 김한조(金漢朝) 등 다양한 가명을 사용해가며 신분을 숨기던 우재룡은 전국의 자산가들에게 의연금을 요구하는 포고문을 발송했으며, 광복회는 포고문의 효력을 높이기 위해 일제에 부역하는 부자인 장승원(張承遠)[1] 과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했다. 그러나 1918년 9월 광복회 지도부를 구성했던 대부분의 인사들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크게 와해되었다. 우재룡은 국외로 탈출해 체포를 피할 수 있었고,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던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1919년 8, 9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1920년 1월 임시정부로부터 "경성에서 주비단을 조직해 조선독립을 전개하라"는 밀명을 받고 경성으로 잠입해 그해 6월 주비단을 조직했다. 그는 주비단에 가담한 이들을 광복회원으로 일컬었고, 그들은 우재룡을 지도자로 여겼다. 그러나 주비단은 곧 일제의 검거 선풍으로 인해 모조리 체포되었고, 우재룡은 논산, 서울, 군산 등지에서 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1937년에 석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러야 했고, 석방된 후에도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조용히 지내야 했다.
2.4. 광복 후 행적
1945년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된 우재룡은 광복회를 재건하기 위해 광복회와 주비단에서 활동했던 생존자들을 모아 1945년 10월 1일 서울 견지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111번지에서 광복회를 재건했다. 12월에는 광복회 부회장이 되었으며 독립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선양사업을 실시했다. 재건 광복회는 1946년 2월 15일 경상북도 입암에서 ‘고산남의진순절제공위령제(故山南義陣殉節者諸公慰靈祭)’를 거행해 입암에서 전사한 정용기를 기렸다. 그러나 재건광복회는 이 위령제를 끝으로 1946년 3월 해소되어 더이상 활동하지 못했다. 그 후 우재룡은 1955년 3월 3일 대구에서 사망했다. 향년 71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우재룡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7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