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1915)
독립유공자 박찬익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부친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한 채 자라다가 15살 때인 1930년 상하이로 가서 부친과 재회했다. 이후 1938년 부친의 지시를 받고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 청년공작대에 가담하여 항일연극과 강연, 합창, 그리고 전단을 배포하는 등 반일사상의 고취와 함께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39년 11월 중경(重慶)에서 임정의 인재양성계획에 따라 중국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 교통과에 입교하였으며, 1941년 12월에 중국중앙군관학교 제17기를 졸업하였다.
중앙군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0년에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자 그는 광복군 제3지대에 배속되어 지대장인 김학규의 부관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군에 강제로 징집되어 참전한 한국사병들을 초모하기에 진력하여 다수 학병과 지원병 및 징집병을 포섭하고 이들을 훈련시켜 중경(重慶)의 총사령부로 보내어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에 배치시켰다.
1942년 4월부터는 상위(上尉)를 맡아 충칭에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에 배속되어 근무하였으며, 1943년 1월에는 임정 한인청년회 문화부장으로, 그리고 동년 8월에는 총사령부 서무과장으로 근무했다. 이해에 신건식의 딸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순호와 결혼했으며, 1944년 6월에는 이시영 재무장으로부터 위임장을 받고 임정 재무부 이재과장(理財科長)으로 근무하였다.
1945년 3월부터는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 겸 제3지대 훈련총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8월에는 개봉 지구로 파견되어 그 곳에서 광복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만주로 가서 대한민국 주화대표단 동북 총판사처 외무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자위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8.15 광복 후 중국에 남아서 현지 한국인을 보호하며 그들이 조국으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주선한 그는 1948년 귀국 후 그해 12월 국군 소령으로 임관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장교로 참전한 그는 1952년 초대 정훈감을 지냈으며, 1961년 한국 전력 사장에 임명되었고 1963년 군직을 퇴임했다. 이후 광복군 동지회장, 백범기념사업회장을 역임했으며, 2000년 3월 27일 경기도 성남시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영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0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박영준은 1915년 11월 1일 중국 용정시에서 중앙군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0년에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자 그는 광복군 제3지대에 배속되어 지대장인 김학규의 부관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군에 강제로 징집되어 참전한 한국사병들을 초모하기에 진력하여 다수 학병과 지원병 및 징집병을 포섭하고 이들을 훈련시켜 중경(重慶)의 총사령부로 보내어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에 배치시켰다.
1942년 4월부터는 상위(上尉)를 맡아 충칭에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에 배속되어 근무하였으며, 1943년 1월에는 임정 한인청년회 문화부장으로, 그리고 동년 8월에는 총사령부 서무과장으로 근무했다. 이해에 신건식의 딸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순호와 결혼했으며, 1944년 6월에는 이시영 재무장으로부터 위임장을 받고 임정 재무부 이재과장(理財科長)으로 근무하였다.
1945년 3월부터는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 겸 제3지대 훈련총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8월에는 개봉 지구로 파견되어 그 곳에서 광복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만주로 가서 대한민국 주화대표단 동북 총판사처 외무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자위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8.15 광복 후 중국에 남아서 현지 한국인을 보호하며 그들이 조국으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주선한 그는 1948년 귀국 후 그해 12월 국군 소령으로 임관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장교로 참전한 그는 1952년 초대 정훈감을 지냈으며, 1961년 한국 전력 사장에 임명되었고 1963년 군직을 퇴임했다. 이후 광복군 동지회장, 백범기념사업회장을 역임했으며, 2000년 3월 27일 경기도 성남시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영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0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1] 2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