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팔

 

1. 소개
2. 경력
3. 은퇴 이후


1. 소개


대한민국의 권투선수, 1970~80년대 한국 권투 중량급을 제패한 하드펀처였다. 본관은 무안(務安).

2. 경력


1958년 8월 11일,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매곡리 수반마을[1]#태생으로 IBF, WBA 슈퍼 미들급 챔피언이었다.
1977년, 프로 복싱에 데뷔, 78년 최창백에게 3라운드 KO승을 따내고 한국 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그 이후 강력한 펀치를 앞세워 KO승을 거듭, 18연속 KO승을 기록한다. 백인철의 26연속 KO승에 이은 국내 2위에 해당하는 기록. 아시아권에서는 거의 적수가 없을 정도로 펀치의 파괴력이 좋았다. 하지만 미들급 같은 중량급은 동양인 선수들이 세계 정상권에 도전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많았고 박종팔도 자신의 천적, 81년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풀헨시오 오벨메이야스와의 경기에서 8라운드 KO를 당하며 세계 정상권과의 격차를 실감한다. 동양권외에 서양쪽이나 다른 해외의 사람들이 동양인에 비해 골격이나 체격이 좋은터라 체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세계와의 격차는 클 수밖에 없었다. 박종팔 본인도 인터뷰에서 "체급은 같다하더라도 서양, 남미 등의 비동양권 선수들은 체격이나 골격이 나보다 좋은게 분명했다."라고 언급할 정도.[2]
오벨메이야스와의 경기는 세계 타이틀 전초전의 성격이었고, 이때 이겼다면 미들급의 무적최강 "도살자" 마빈 해글러와 타이틀 매치를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벨메이야스는 해글러에게 패하기 전까지는 26전 26승의 KO율 100퍼센트의 강자였고, 더군다나 베네수엘라의 높은 해발 고도에서 경기를 치르다 보니 몸이 붕붕 뜨면서 제대로 펀치가 나가지 않았다고... 당시에 패배와 해글러와의 매치가 날아간 것에 대해 아쉬움이 많지만, 그 강한 오벨메이야스는 해글러에게 처참하게 2번씩이나 KO패를 당했다...
이후 보유중인 동양챔피언 타이틀을 지속적으로 방어전을 치루면서 기회를 보다 숙적 나경민에게 7라운드 KO패를 당한다. 하지만 4개월 후 다시 리턴매치를 벌여 4라운드 KO승을 거두면서 동양타이틀을 탈환한다. 이때 국내선수들끼리의 경기임에도 박종팔과 나경민이라는 수준급의 선수들의 기량, 그리고 미들급의 파워넘치는 매력을 통해 경기자체는 상당히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에 박종팔은 신설된 복싱협회 IBF에 진출한다. 체급은 미들급 바로 윗 체급인 슈퍼 미들급. 당시 IBF는 먼저 설립된 WBA나 WBC에 비교해 봤을때 명성이나 인지도, 흥행, 그리고 선수기량면 등 모든 면에서 뒤처진 수준이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지만 동양권 선수가 넘보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중량급 체급이었다. 박종팔은 세계정상권과의 격차를 고려해 신설된 IBF에 들어갔고, 새롭게 추가된 체급, 슈퍼미들급에 뛰어 들어 결국 해당 체급 초대 챔피언 미국의 머레이 서덜랜드와 타이틀 매치를 치른다. 84년 한국에서 열린 경기에서 경기 초반 한차례 다운을 당했지만 강력한 펀치를 앞세워 4번이나 다운을 뺏어내며 11라운드 KO승을 거두고 월드 챔프에 등극한다. 이후 8차례의 방어전을 성공했고 이때가 가장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파이트 머니의 수익 자체도 엄청나게 많아서 은퇴이후에 재산이 90억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8차례의 방어전 중, 난적 린델 홈스나 비니 커토와의 일전 등이 주목할 경기인데, 특히 비니 커토와의 리턴매치는 미국 LA에서 열렸는데 이 때의 승리가 한국의 유일한 미국 원정 타이틀 매치 승리이다. 현재까지 미국 원정 타이틀 매치의 결과는 1승 27패... 물론 모두 실력에 의한 패배라고 할 수 없으나 대부분이 그러했으며 김득구 선수의 경우 맨시니와의 일전에서 사망에 이르렀을 정도로 미국원정은 한국에게 그야말로 무덤길이라고 불렸다. 비니 커토의 경우 기량면에서 세계정상권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쉽게 이길 수 있다고 할 수 없는 선수였다. 경기 도중 반나체의 여성이 링위에 난입해 춤을 추다 심판에게 쉐도우 복싱을 하는 등 해프닝이 벌어지기까지 했던 이 경기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극적인 박종팔의 KO승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박종팔과 방어전을 치른 모든 선수들이 세계 정상권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근성과 체력을 겸비한 선수들이었고 쉽게 볼만한 상대들이 아니었다.(머레이 서덜랜드의 경우 미들급의 강자 중 한 명인 헌즈와의 대결에서 패배했지만 판정까지 승부를 했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이 동양권 선수들이 비동양권 선수들과 선천적인 파워를 극복하고 싸운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다.
이후 자진해서 IBF 타이틀을 반납해야 했는데, 박종팔의 경우 IBF에 소속되어 성실히 챔피언으로서 그 임무를 수행했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 상황은 IBF 타이틀을 반납하는 상황이 더 나았다. IBF는 앞서 설명했듯이 WBA나 WBC에 비해 모든 면이 떨어졌는데 WBC나 WBA의 높은 수준을 감당하기 벅찬 한국 선수들이 IBF로 많이 진출했고 결과적으로 한국선수들의 IBF 챔프 양산이 벌어졌다. 세계 챔프가 상당히 어려운 것을 감안할 때 IBF 챔프의 양산은 세계 챔프의 질을 떨어뜨렸고, 더군다나 한국 선수들이 많이 진출해 한국 선수들끼리 타이틀 매치를 하거나 해외선수라도 선수 기량이 떨어지는 등의 경기 수준이 함량 미달인 경기가 더러 있었다. 또 80년대 IBF 챔피언이었던 권순천의 방어전 당시 해당선수가 아니라 다른 수준 낮은 선수를 둔갑시켜 내보낸 경기가 있던 사건은 한국이 IBF에 대한 실망감과 불신이 대폭 확산된 계기였다.
결국 IBF 챔피언 타이틀을 반납하고 WBA에서 슈퍼 미들급이 신설되자 박종팔은 WBA로 진출했고, 슈퍼 미들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멕시코의 헤수스 갈라도와 경기를 치렀다. 머레이 서덜랜드 전과 같이 경기 초반 다운을 당했지만 이후 수차례 다운을 시키겨 2라운드 KO승을 거두며 다시 한번 월드 챔프에 등극한다. 이후 폴리 파시레론과의 방어전에 성공했으나 다시 만나 숙적 오벨메이야스와의 경기에서 3번이나 다운 당한 끝에 3:0 판정패를 하며 챔피언 타이틀을 상실한다. 이후 한국 중량급의 강타자 중 한명인 백인철[3]과의 논타이틀 매치에서 KO패하면서 현역 은퇴한다. 총 전적 46승(39KO승) 1무 1무효 5패(4KO패).
전적으로 볼때 굉장히 훌륭한 복서였고 중량급의 묘미답게 파워넘치는 펀치력을 앞세워 46승 중에 39번이 KO승리일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보여주었다. 테크닉도 수준급이었고, IBF와 슈퍼 미들급 신설을 통해 자신의 무대를 펼칠 수 있었던 운도 작용했지만 종합적으로 평가했을 때 한 시대를 풍미할 만큼 매우 우수한 선수였다. 다만 다소 약한 수비력이나 그다지 강하지 않은 정타를 맞고도 의외로 다운되는 맷집 문제 등은 약점이라고 꼽을 수 있다. 다운 장면들을 보면 의외로 강하지 않은 수준임에도 쓰러진 경우가 더러 있다. 그리고 세계 최정상권과는 약간의 격차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마빈 해글러에게 두차례 KO패를 당한 오벨 메이야스의 경우 박종팔을 모두 유리한 게임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박종팔이 동양권 선수로는 어느정도 세계 격차를 극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그 격차의 폭은 남아있었던 것이다.

3. 은퇴 이후


박종팔은 은퇴이후에 자신의 재산으로 이런 저런 사업을 하다 큰 손해를 보기를 거듭하다 결국 전재산을 잃게 된다. 강남에 열었던 술집도 폭삭 망했다고 한다. 복싱 외에 다른 것에 대해 경험이나 기술이 전무했기에 어려웠었고 사람들의 사기행각에도 많이 휘말렸었다.[4] 전재산을 잃은 후에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했고 몸도 성치 않았지만 재혼한 부인덕에 다시 삶을 되찾아 현재는 복싱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2018년 8월 현재는 장안동 복싱체육관 및 수락산 인근에서 운영하던 고깃집 모두 접고 불암산 기슭에 1만여 평 땅을 사 건강힐링센터를 운영하는 중. 한국제주권투위원회(KJBC) 상임고문이기도 하다. 가끔씩 지상파나 케이블 TV에 나오기도 했는데 중간중간 녹슬지 않은 복싱 실력을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핸드스피드는 현역 복서들과 비교해도 여전히 전혀 꿀리지않는 수준.[5]
은퇴 이후 2003년 이효필과 이벤트매치로 이종격투기 시합을 한 적이 있다.[6] 당시에는 지금처럼 격투기가 흥행하는 종목이 아니였고 침체되어있는 격투기시장을 살리기 위한 떡밥매치로 대한민국 복싱계에서 화려한 전적을 올렸던 박종팔과 대한민국의 이종격투기 1세대였던 이효필과의 매치로 둘은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나름 언론의 주목도 받고 그런 훈훈한 매치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희대의막장매치를 벌이며 대한민국 격투기계에 흑역사를 만들었다. 경기직전 이효필은 꿀물과 카스테라 등을 박종팔에게 챙겨주며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나 경기가 시작되자 이효필은 입식경기에서 금지된 가죽신발[7] 노후킥 우정의 싸커킥을 비롯하여 쓰러져 있는 상대에게 스탬핑 등을 시도 효피르라는 닉네임을 얻으며 희대의 사기극을 연출. 지금에 와서야 누가 봐도 이효필의 더러운 반칙이 난무하는 졸렬한 경기였으나 당시 격투기가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터라 그냥 아재들의 화끈한 매치정도로 그렇게 큰 문제제기가 되지는 않았으나[8] 지금 보면 실소를 금치 못 할 희대의 막장매치를 남겼고 현재 돌고 도는 떡밥거리인 '복싱은 킥복싱한테 안된다'라는 이야기등 무수한 떡밥도 함께 남기며 두 사람의 20년 넘게 이어져 온 우정에 큰 금이 가게 되었다.
평소 이효필은 자신보다 잘 나가는 박종팔에게 큰 질투심을 품고 있었고 박종팔은 이효필을 그냥 절친한 친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생각없이 경기에 나섰다가 뒤통수를 거하게 맞고 변을 당한 것. 이 경기 이후 박종팔은 다리가 부러져 큰 수술을 받게 되었고 지금까지 다리가 불편하다고 한다. 경기가 끝난 후 이효필은 룰대로 했다 뭐가 문제냐 라는 등 박종팔을 도발하는 발언을 일삼으며 자기도 모르게 무규칙 격투단체에서 하던 버릇이 나왔다라고 변명하며 스포츠정신에 어긋난 발언을 일삼았고 그 다음 떡밥으로는 마이크 타이슨이나 리즈시절의 최홍만 등을 지목하였으나 매치는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2013년 대한민국 화해 프로젝트-용서에 출연했다. 이효필의 진심없는 사과에 박종팔은 끝내 사과를 받지 않았지만, 방송 막판에 이효필의 사과에 마음의 문이 열렸다고 언급 화해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프로 자체가 마지막에 밑도 끝도 없이 화해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각본상 어거지로 화해에 응했을 가능성도 높다.
[1] 무안 박씨 집성촌이다.[2] 키 178cm, 리치 183cm로 동양권에서는 준수한 체격이었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 선수들과 비교하면 평범한 수준이었다고.[3] 백인철은 이후 오벨메이야스마저 TKO로 꺾고 WBA 슈퍼미들급 왕좌를 한국으로 되찾아온 뒤 2차방어까지 성공한다.[4] 많은 스포츠 선수들이 비슷한 게 많다. 한국 말고도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흔한 일이다. 물론 대조적으로 사업 잘만 운영하고 되려 사업가로서 선수시절보다 더 많은 돈을 벌며 승승장구하는 경우도 꽤 있지만. 에반더 홀리필드가 선수 은퇴 후 사업가로 대박을 거둔 경우다. 조지 포먼도 이 방면에서 레전드급.[5] 하지만 스텝은 조금 어색하게 보이는데 다리가 아래 서술된 이효필과의 막장매치 이후 많이 불편해졌기에 그렇다는 이야기가 있다.[6] 당시 박종팔이 금전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때라 마지못해 했다고 한다.[7] 당시 신발신고 발차기 시도하는 격투가가 없지는 않았다. 종종 레슬러나 주짓떼루가 나와서 신발을 신고 킥을 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K-1에서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신발을 신은 경우 스탬핑은 대부분의 단체에서 금지였기에 워커 신고와서 스탬핑을 시도하는 이는 없었다. 선수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한 행동으로 끝나고 나서 대기실 분위기가 살벌했다고 한다.[8] 당시 격투기가 잘 안 알려진 마이너종목이었던 탓에 이효필 옹호론자도 많았다. "워커 신고 와서 차는게 말이나 되는거냐?" 라고 당시 이종격투기(카페)에 박종팔 선수의 딸이 하소연하는 글을 올렸었는데 로우킥 대비를 제대로 안한게 문제라고 지적질하는 황당한 덧글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