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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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지 에드워드 포먼'''
'''(George Edward Foreman)'''
'''출생'''
'''1949년 1월 10일''' '''(75세)'''
'''미국 텍사스 주 마셜'''
'''국적'''
[image] 미국
'''신체'''
''' 191cm / 체중 118kg[1] / 윙스팬 203cm'''
'''전적'''
'''76승 68KO 5패'''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금메달'''
'''체급'''
'''헤비급'''
1. 개요
2. 어린 시절
3. 초기 프로 경력
3.1. 초창기
3.2. 리즈시절: 선샤인 쇼다운(Sunshine Showdown)
3.3. 정글의 대소동 -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
3.4. 은퇴하고 목사가 되다
4. 늦은 나이에 복귀
4.1. 복귀 초반
4.2. 챔피언 재등극
4.3. 재은퇴
5. 은퇴 후
6. 첫 번째 조지 vs 두 번째 조지
7. 파이팅 스타일
8. 기타


1. 개요


미국의 전설적인 권투 선수, 사업가, 개신교 목사.
현역 시절,엄청난 신체능력을 자랑한 헤비급 복서로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며, 프로로 전향한 뒤 통산 76승 5패 68KO, WBC, WBA, IBF 통합 세계 챔피언을 두 번이나 차지하고 은퇴한 뒤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역대 최고의 헤비급 복서 중 한 명이다.
헤비급 복싱 역사상 최고의 신체(피지컬)를 지닌 복서 중 하나로 반드시 꼽힌다. 1차 은퇴 때 심장마비를 겪긴 했지만, 복싱 커리어 내내 큰 부상으로 경기를 오래 쉰 적도 거의 없고, 10년 동안 복싱을 쉬다가 돌아온 40대에도 114-118kg(하지만 은퇴후 언론 매체들을 통해 복귀시 147Kg였다고 밝혔다.40살이 넘어서의 제2의 포먼시절엔 132~135kg의 체중으로 경기를 했다고) 몸으로 여전히 위력적인 펀치를 발휘, 상대 복서들을 눕히며 챔피언에 또다시 등극하고 은퇴했다. 게다가 은퇴한 후 현재까지도 후유증 그런 거 없이 팔팔하다.

2. 어린 시절


텍사스 주 마셜에서 태어나, 휴스턴에서 자라났다. 어머니는 전남편 포먼과 별거하는 사이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져 포먼을 임신해서 출산했다. 그러므로 포먼이라는 성은 어머니의 남편의 성이고 친부의 성은 아니다. 몇몇 복서들처럼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세월을 보냈고[2] 어린 시절을 문제아로 보냈다. 제대로 3끼를 먹어본적이 없을 정도로 빈곤했다. 모든 흑인들에게 있어서 무하마드의 알리(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아닌 흑인 이슬람 지도자)는 신성시되었는데 밥을 굶더라도 무하마드 알리의 음성을 듣기 위해 라디오가 있는 곳을 기웃거렸다고 한다.
17세가 되었을 때 당시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의 서민 교육정책인 직업학교 광고가 TV에 나왔는데 미식축구 선수 짐 브라운 (JIM BROWN)의 훈련 광고를 보게 되고 인생이 조금씩 변한다. 직업학교를 다니면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됐기에 어머니가 흔쾌히 사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제대로 글과 공부를 배우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면서 여러 고민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 직업학교에서도 특유의 거친 문제아 기질은 남아 있어서 툭하면 시비에 휘말렸다. 그러자 친구 중 한 명이 "조지, 니가 그렇게 터프하다면 복싱을 해보는 게 어떻니?"라고 말하며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고, 191cm인 남다른 신체조건 때문에 풋볼 선수도 고려했으나 최종적으로 복싱 선수가 되었다. 아마추어로 시작하여 22승 4패,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금메달의 커리어를 남겼다. 통상적인 아마추어 복서들은 경기 일정이 굉장히 빡빡한 탓에 체력도 비축할 겸 정교한 유효타로 포인트를 쌓는 경우가 많은데 포먼은 그냥 프로 복서들처럼 KO를 노리는 붕붕 펀치를 휘두르며 올림픽 금메달까지 수집했다.

3. 초기 프로 경력



3.1. 초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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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프로에 데뷔하였고, 그 다음부터 무패를 자랑하였다. 이렇게 한동안 계속 무패행진을 계속했고 대부분의 승리를 KO로 장식하여, 1972년까지 32전 32승 29 KO라는 사기적인 실력을 보여주었고, 그 KO도 모두 3회 이내로 장식하는 무시무시한 복서였다.

3.2. 리즈시절: 선샤인 쇼다운(Sunshine Showdown)


당시 헤비급에는 전설적인 조 프레이저무하마드 알리가 버티고 있었고, 프레이저는 당시 WBA, WBC 통합 챔피언이었다. 조 프레이저는 아무도 못 이긴다는 무하마드 알리를 판정으로 이겼고, 당시 무패(29전 29승)를 자랑하고 있었다. 포먼의 신체조건이 월등히 우세하였으나(프레이저는 헤비급 선수로는 작은 편인 181cm의 신장을 가졌다), 대부분 프레이저의 승리를 점쳤다.
포먼과 프레이저의 대결을 '''선샤인 쇼다운'''이라고 하는데, 1973년 1월 22일 자메이카에서 열렸다. 포먼은 프레이저를 시작부터 무지막지하게 두들겨서 1회에 3번, 2회에 3번의 다운을 빼앗았고, 프레이저의 상태를 본 주심은 경기를 중지시키고 TKO를 선언하였다[3]. 포먼은 챔피언이 되었고, 첫번째 방어전에서 호세 로만을 1회 2분만에 KO로 이기기도 했다. 이는 타이슨 때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이었다.

위의 영상이 선샤인 쇼다운의 풀 경기 영상. 프레이저가 붙지 못하게 저지하며 핵펀치를 날리는 포먼. 1라운드 중반부터 이미 포먼이 여유 있게 펀치를 날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상대는 전해에 무하마드 알리와 1승 1패의 호각을 이뤘던 켄 노턴이었다. 이 방어전에서도 포먼은 2회 KO로 이겼다. 이때까지 전적은 '''40전 40승 37KO(92.5%).'''

3.3. 정글의 대소동 -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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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대결은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복싱 역사상 최고의 경기'''라 불리는 세기의 대결이다.
아프리카 자이르(현재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열린 이 대결은 The Rumble in the Jungle (정글의 대소동)이라고 불린다. 이때 포먼에게 불운이 닥쳤는데 훈련하다가 눈 위가 찢어진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경기를 한 달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부상 때문에 훈련량이 부족해졌다. 다시 상처가 날까 봐 스파링을 중지했기 때문이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알리는 예상과는 달리 맹공격을 퍼부었다. 그러자 포먼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고, 2회부터는 포먼이 공세를 취했다. 그래서 알리는 빠른 스피드로 파워풀하지만 느린 포먼의 펀치를 피하는 전법을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링 로프의 반동을 이용한 일명 rope-a-dope 수비[4]와 지능적인 클린치로 포먼의 포화를 피해갔다. 그리하여 포먼은 알리에게 특유의 살인 펀치를 제대로 맞출 수가 없었고, 이렇게 연장전이 되자 점점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포먼은 대부분 3회 이내에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런 지구전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포먼이 힘이 빠지자 알리는 맹공격을 하다가 8회 포먼에게 결정타를 날려 KO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것은 포먼의 '''첫 번째 패배'''가 되었다.
이후 설욕전을 바랐으나 기회가 돌아오지 않고, 목표가 없어지자 1년간 쉬다가 1977년에 페드로 아고스토를 이긴후 2달[5] 만에 다시 신예인 지미 영과 맞붙지만, 포먼이 방심한건지 너무 쉽게 펀치를 허용하는 등 좋지 않은 퍼포먼스를 보이며 12라운드 경기 후 판정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경기 후 탈의실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을 하였는데, 이것이 포먼의 인생을 크게 바꾼다.
무하마드 알리를 다룬 2001년작 영화 <알리 (Ali)>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이 조지 포먼과 알리의 대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3.4. 은퇴하고 목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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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때 포먼은 가사 상태에서 임사 체험을 하고 기적적으로 수술이 성공해서 살아남은 뒤로는 '''매우 열렬한 개신교 신자'''가 된다. 그의 간증에 따르면, 그때 저승사자에게 붙들려 지옥으로 끌려 가던 중 하나님에게 자신을 살려줄 것을 애걸하였더니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를 구해줬다는 것. 후술되지만, 그의 이러한 신앙 체험은 지극히 무뚝뚝하던 그의 '''성격'''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매우 활달하고 유머스럽게 바꿔 버린다.
그 전까지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던 포먼은 이 때부터 열심한 개신교 신앙활동을 하다 전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전도사에 그치지 않고 '''목사''' 자격증까지 따며 텍사스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한편, 전국적인 기독교 관련 방송에 나와서 자주 간증을 하기도 했다. 포먼은 그동안 모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전도활동과 청소년 센터 건립 등 신앙활동에 모조리 다 내놓았고, 더 많은 활동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현역 복귀'''를 결심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전성기를 진작에 지나버린 '''38세'''였다.

4. 늦은 나이에 복귀



4.1. 복귀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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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and after.
초창기 포먼의 외모와 복싱계 내에서의 이미지는 아무런 캐릭터성도 없는 스트리트 파이터 1의 미국 스테이지 복서 마이크[6], 또는 록키 3에 나왔던 흑인 복서와 비슷하다. 대중적인 인지도는 어느 정도 있지만 그냥 무표정하게 상대를 줘패는 흑인 복서1 수준이며 전술한대로 무자비한 강자에 알리의 현란한 게임운영에 놀아나 패한 이미지만 있을 뿐 캐릭터성이나 상업성은 전무한 선수. 반면 복귀 후 포먼은 대머리에 약간 배나온 겉으로만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다, 전까지 무표정과 달리 항상 웃는 표정이라 이는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느낌이 생겨 복귀전과는 확연히 다른 링 캐릭터를 지니게 되었다.
1987년 복귀한 그는 당시 무적의 챔피언인 마이크 타이슨과 상대하기를 바랐으나, 타이틀 매치를 위한 지명전을 위해서는 승수를 쌓아야 하는 것이 복싱계의 룰이라서 처음에는 잔챙이 복서들과 대결을 하여 승수를 쌓았다.[7][8]
포먼은 10년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원래부터 뛰어났던 피지컬과 70년대 레전드들과 치고 받은 가락만으로도 젊은 잔챙이들을 상대로 또다시 연승행진을 기록하였다. 처음에는 코웃음치던 전문가들도 포먼의 연승이 계속되자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 무표정했고, '''대중을 기피하는 성격'''이 전도사로 일하는 동안 180도로 변화, '''대중친화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거침없는 도전정신과 친근한 표정으로 호감을 주는 인물이 되었다.[9] 이 이미지 변화 덕에 많은 CF에 출연했고 상당한 돈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상대한 복서들은 세계 타이틀 수준과는 거리가 있었고 각국 챔피언 출신이나 대륙 챔피언 출신, WBF 등 마이너 기구 챔피언 출신 정도였지만, 철저히 무명 복서들하고만 경기를 가진 것은 아니고, WB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출신의 J.B. 윌리엄슨이라든지, 백인의 희망이라 불리던 강타자 제리 쿠니[10] 등 일부 유명 선수들도 KO로 압살해버리는 등 전설의 복서다운 실력을 보여주었으며, 복귀 후 타이틀 도전 직전까지 20회가 넘게 가진 경기를 전승한 것도 모자라서 판정승 1회, 기권승 1회를 빼면 그의 전성기 시절과 비슷하게 모조리 KO승이다.
재미있게도, 복귀 전 젊은 시절과 비교해서 캐릭터가 변화하면서 경기 스타일도 조금 변했다. 물론 힘과 체격을 바탕으로 일격필살로 상대를 요단강(?) 건너게 하는 것은 동일했으나, 경험과 여유가 생기면서 라운드 운영을 잘 하게 됐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상대에게도 무자비하게 확인사살 펀치를 날리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상대방이 그로기 상태에 빠지면 '''더 때리지 않고''' 조용히 코너로 물러서는 신사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더 인기를 끌었다. 물론 이게 더 무서워 보인다는 의견도 있었다.(...)
아래 영상은 1990년 1월 15일에 열린 제리 쿠니와의 경기. 당시 포먼은 41세, 제리 쿠니는 33세였으며 제리 쿠니는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해버렸다. (...) 어딘지 조급해 보이는 쿠니에 비해, 경쾌한 풋워크는 없지만 웬만한 공격은 막거나 흘려버리며 여유 있게 강펀치로 대미지를 누적시키는 포먼을 볼 수 있다. 뚜벅뚜벅 걸어오다가 어퍼컷과 스트레이트 연속기로 제리 쿠니를 컨버스에 처박아버리는 마지막 KO 장면은 공포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날아가는 마우스피스만 봐도 저 펀치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알 수 있는 부분.

아래는 마이크 재미슨과의 경기 장면 중 하나. 자비롭게도(?) 펀치를 멈추고 마우스피스를 다시 끼울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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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연승행진을 벌였는데도 타이틀전을 갖기까지 뚜렷한 프로모션을 받지 못하고 20회가 넘는 경기를 가지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점이 당시 그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아쉬울 따름.

4.2. 챔피언 재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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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먼은 계속 승리를 거듭하여 타이틀 도전권을 땄고, 1991년 만 42세의 나이로 27세의 헤비급 챔피언 에반더 홀리필드와 타이틀 매치를 벌였다. 물리적으로는 조지 포먼이 나이 때문에 이기기 힘든 경기였다. 그럼에도 12라운드까지 가는 저력을 보여주었고, 아깝게 판정패했다.[11]
홀리필드전에서는 확실히 잘 싸우기는 했지만 유효타 수가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등 이기기는 어려운 경기였다. 심판 전원일치 판정패.
이후에도 계속 선수생활을 이어갔고, 다시 한 번 세계 타이틀 도전 기회를 얻어 WBO 챔피언이던 토미 모리슨과 경기를 가졌지만 또다시 판정패를 당했다. 허나 이번에도 굴하지 않고 1994년 45세의 나이로 에반더 홀리필드를 꺾고 당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던 마이클 무어러를 10라운드 KO로 이기고[12] IBF, WBA 헤비급 챔피언을 따냈다. 이전까지만 해도 무어러는 무패의 복서였다. 그리고 이 때 포먼이 입은 트렁크는 '''바로 20년 전 알리와 싸울 때 입었던 것이었다.'''

무어러전.[13]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툭툭 꽂는 펀치가 결국 팔팔한 챔피언을 캔버스에 눕혔다.

4.3. 재은퇴


포먼은 다시 마이크 타이슨과의 대결을 원했으나, 성사되지 않았고, 토니 터커와의 방어전과 IBF 1차 방어전 상대였던 악셀 슐츠와의 재대결을 포기하면서 WBA, IBF 타이틀을 반납한다. 이후 IBA, WBU 등의 마이너 타이틀을 지키며 크로포드 그림슬리, 루 새버리스 등 젊은 선수들을 꺾고, 1997년 섀넌 브릭스[14]와 대결하였으나, 12라운드까지 가는 끝에 판정패했다. 이 판정에 대해서 여러가지 말이 많았으나, 포먼은 이 경기를 끝으로 다시 은퇴하였다. 은퇴시 나이는 48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1999년에 다시 복귀한다는 떡밥을 던지며 80년대 초반의 강펀처였던 래리 홈즈[15]와 대결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대전료 차이로 무산되었다.

5.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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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요리기구 및 주방용품을 사업을 하던 러셀 홉스 사에 고용되어서 그의 이름이 붙은 브랜드가 나왔고,[16] 노익장으로 이미지가 좋아졌기 때문에 매우 성공했다. 특히 이 요리 기구들이 기름기를 쪽 빼주어 건강에 좋다는 홍보가 매우 효과가 좋았다. 실제로 그와 동시대의 전설적인 복서인 알리는 펀치 드렁크 증세와 파킨슨병으로, 프레이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음을 상기한다면, 그는 멀쩡한데다가 은퇴 후 돈도 복서 때보다 더 많이 벌었으니, 그야말로 복 받은 노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두 번째 패배를 안겨 준 지미 영도 펀치 드렁크+약물중독으로 고생하다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특히나 위 사진에 나온 세로로 홈이 여러 개 파이고 위 아래 모두 열선이 들어간 양면 그릴을 브랜드 불문하고 조지 포먼 그릴[17]이라고 부를 정도로 성공했다.[18] 미국의 대표 MC 코난 오브라이언Clueless Gamer에서 아타리 2600게임을 했을때, 아타리 2600의 본체를 보고 "이거 조지 포먼 그릴 아님?"이라고 드립을 쳤을 정도. 한국에서도 조지 포먼 그릴의 유사품이 초창기 홈쇼핑 등에서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을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파니니나 쇠고기 스테이크, 햄버그 패티를 자주 요리한다면 추천할 만하다. 이 그릴 사업으로 수억 달러를 벌었다. 포먼 그릴 모델료로 1억 2750만 달러+회사 주식 1000만 달러를 받았는데, 그러고도 매년 그릴 수익도 일부 받고 있다(!). 이는 조지 포먼이 평생동안 받은 파이트 머니보다 훨씬 많다. 참고로 조지가 받은 가장 많은 파이트 머니는 1250만 달러를 받은 홀리필드전이다. 덕분에 조지 포먼은 복서 재산 통계에서 넘사벽 복싱재벌 플로이드 메이웨더 바로 아래 2위로 거의 항상 꼽힌다.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이미지를 남겼기 때문에 성공학 강사로 뛰기도 하고, TV에도 자주 나온다.
자식들을 12명이나 키웠다고 하는데, 한 여자가 모두 낳은 게 아니라 입양한 자식과 배다른 자식들을 포함한 수라고. 재미있는 점은 아들들의 이름을 모두 조지로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5명의 아들들이 순서대로 조지 Jr. 부터 조지 VI(...)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딸들의 이름도 조지로 하고 싶었지만 그건 좀 심한 것 같아서(...) 다른 이름으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딸들 중 한 명의 이름이 "조제타"라고 한다(....)) 그리고 조지 포먼 3세는 복서로 데뷔해서 16전 16승 15KO라는 좋은 성적을 내고 사실상 은퇴했다. 딸인 프리다 포먼도 미들급 여자 복서로 활동하여 6전 5승 1패 3ko라는 좋은 성적을 내고 은퇴. 조지 포먼은 프리다가 복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계속 은퇴를 권했다고 한다. 프리다는 안타깝게도 2019년 3월 42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때는 무하마드 알리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사이가 안 좋았으나 2000년대 초반의 인터뷰에서는 같이 행사에도 참여한 적 있다며 "알리에게 유감 없다"고 밝혔다.
NBC에서 제작하는 꽃보다 할배의 미국판 리메이크(2014년 9월 tvN 정식 라이선스)인 "Better Late Than Never"에 출연하게 되었다. 30일간 촬영된 총 6화 분량의 에피소드 중 1개 분량을 촬영하기 위해 한국도 방문했다. 에피소드 내내 적응력이 매우 빠르고 사람 좋은 캐릭터로 나오는데, 윌리엄 샤트너가 위에 나온 조지 포먼 그릴 드립을 치는 게 깨알같다.
자타가 공인하는 자동차광이다. 페라리, 람보르기니 할 것 없이 억소리 나는 슈퍼카의 오너로 유명하다. 하지만 의외로 본인이 가장 아끼는 차는 1977년형 폭스바겐 비틀로, 본인의 첫 차라고 한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였다. 참고로 미국에서 흑인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비율은 굉장히 낮다. 5퍼센트가 될까 말까 하다. 그러나 우파 성향이 강한 텍사스 출신에 기독교 신앙이 투철하여 보수적 정치 성향을 지니게 되었고 80년대 복싱 복귀 시절에 트럼프와 친분이 생겼기 때문에 트럼프를 지지한 것이다.
UFC 파이터 데릭 루이스가 포먼에게 복싱을 배웠다고 한다.

6. 첫 번째 조지 vs 두 번째 조지


처음 복서 생활할 때와 은퇴하고 신앙에 귀의하다 복귀했을 때 성격, 이미지, 파이팅 스타일 등이 너무 달라 전자를 첫 번째 조지(no.1 george) 후자를 두 번째 조지(no.2 george)로 부른다.
복싱 팬들 사이에서는 첫 번째 조지와 두 번째 조지 둘 중 누가 낫느냐는 얘기를 하는데, 각종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포먼 본인까지 두 번째 조지가 복서로써나 인간으로써나 더 낫다고 평가한다.
원래 조지 포먼은 대중을 기피하는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었고, 시합에선 비틀거리는 상대도 죽일 듯이 달려들어 두들겨 팰 만큼 냉혹했다. 그러나 두 번째 조지는 한층 여유를 가진 채 농담도 자주 하고[19] 항상 웃고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했으며, 그로기인 상대는 더 때리지 않는 매너를 보여준다.
복서로서도 더욱 발전했다. 첫 번째 조지 시절, 포먼은 강력한 펀치력 덕분에 3라운드보다 길게 가는 시합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속으로는 거만했지만 링에 올랐을 때 감정적으로 불안했고, 힘으로 상대를 두들겨 패는 것만 생각하는 단순한 복서였다. 무하마드 알리 전에서 알리가 로프에 기대서 도발하자 바디가 비어있음에도 알리의 얼굴에 큰 펀치를 날려 한 방에 눕히려고 들었고, 심지어 펀치의 강약조차 조절하지 않아 자기 체력을 혼자 다 깎아먹고 나이 든 알리보다 먼저 체력이 고갈되었다. 즉 첫 번째 조지는 선택받은 피지컬과 펀치력에 비해 멘탈과 경기 운영력이 약한 것이 분명한 단점이다.
두 번째 조지 시절엔 40세가 넘은 나이에도 훨씬 젊은 챔피언 홀리필드를 상대로 운영와 페이스 배분을 통해 체력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12라운드 판정까지 끌고 갔고, 마이클 무어러를 10라운드에서 눕혀 챔피언이 되기까지 했다! 나이가 들었으니 펀치력이나 반응속도, 스태미너는 줄었겠지만 , 정신적으로 훨씬 안정되고 여유가 생기면서 스태미너 관리능력, 끈기, 시합 운영 측면에서 발전한 게 훨씬 크게 작용했던 것. 마이클 무어러 전에서는 한방을 노리는 척 크게 레프트훅을 두어 번 날리는 심리전을 걸어 무어러의 회피할 방향을 제약한 다음 침착하게 턱을 계속 때려 K.O를 따냈다. 무하마드 알리 전에서 상대가 열어놓은 바디조차 때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경기 운영이 천지 차이 수준으로 발전한 것.
이와 같은 이유로 포먼 스스로 '두 번째 포먼은 두뇌까지 씁니다. 첫 번째 포먼이 틈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쓰러뜨릴 겁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두 번째 포먼이 이깁니다.'고 했으며 거의 모든 전문가들도 '한 방만을 노리는 슬러거 일변도에서 각종 올라운드 테크닉을 구사하게 된 두 번째 조지가 이긴다.'고 인정한다. 또 '두 번째 조지가 선샤인 쇼다운에서 알리와 붙었으면 게임은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평할만큼 두 번째 조지는 복서의 완성도로도 높이 평가받는다. 비록 젊을 때보다 순발력이나 체력, 맷집은 많이 떨어졌어도, 경험이 쌓이고 멘탈이 튼튼해진 조지 포먼은 링 캐릭터에서나 권투에서나 훨씬 나은 복서가 되었다.

7. 파이팅 스타일


'''그의 복싱 스타일은 핵주먹 한 마디로 정리된다.'''
헤비급에서 하드펀쳐 슬러거라는 포지션은 어니 세이버즈, 소니 리스턴, 켄 노턴 등 복싱 역사에 이름을 날린 쟁쟁한 슬러거들이 많지만, 사상 최강을 논할 때 조지 포먼은 반드시 거론된다. 우월한 체구에 맷집까지 사기적인 강골인데다 막강한 근육을 탑재한 슈퍼 하드 펀처라서 그냥 팔힘으로 툭툭 치는 거 같은데 상대가 픽픽 쓰러지고 붕 뜨는 것을 보면 기가 찰 정도다. 의외로 전성기 때 체중이 별로 안 나가는데, 100kg이거나 그보다 조금 가벼운 98kg 정도로 시합을 치렀다. 그런데도 상대가 휙휙 쓰러진다. 상대가 뭘 하건 말건 간에 다가가서 냅다 내지른 주먹에 적들이 나가떨어진다. K.O 장면 모음 영상을 보면 심지어 상대방이 가드 위를 맞았는데도 다운되는 장면조차 있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거구 괴물 복서인 셈.
파워와 사정거리가 너무 엄청나서 테크닉 의존도가 매우 낮은 복서라고 착각할 수 있다. 얼핏 보기에도 그냥 펀치를 내지르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비록 테크닉이 당대의 복서들과 비교했을 때 섬세하지는 않았어도, 펀치의 정확도와 타점, 회수율 등도 파괴력 못지않게 가공할 수준이었다. 즉, 필요가 없어서 화려한 기교를 쓰지는 않았지만 내지르는 한방한방의 정확도와 정교함만큼은 최상급이었다는 의미.[20] 체구나 파워를 타고난 슬러거들은 많지만 그만의 정교함도 최강 슬러거로 등극한 중요한 요인이다. 사실 내지르는 펀치 한방한방도 매우 교과서적인 힙드라이브와 체중 이동을 통해 몰아치는 것으로 피지컬 못지않게 기초 역시 탄탄했던 복서. 펀치력만으로는 어니 세이버즈가 포먼 이상이었다는 말이 많다. [21]
사실 셰이버스는 파워는 정말 강하지만 복서로서는 크게 한방을 노리는 선수라 그 한방이 들어가면 무지막지하지만 경기 운영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다.[22] 한번도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르지 못했단 걸 봐도 알 수 있고, 무하마드 알리와 래리 홈즈 둘다 자신이 상대한 복서 중 셰이버스의 펀치가 최강이라고 했지만, 결국 둘 다 셰이버스를 이겼다. 게다가 헤비급이고 슬러거임에도 턱이 약하다는 약점도 있었다. 또한 키가 183cm에 불과할 정도로 작아 피지컬상 약점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당대 최강의 복서들을 위협하는 선수였는데, 윙스팬이 조지 포먼과 같은 7피트에 달하는데다가 앞서 언급한 한방이 상식 밖으로 강하기 때문이었다. 알리와의 시합에서 알리가 판정승하긴 했지만, 초반에 알리에게 날린 한방이 얼마나 대미지가 컸는지 시합 후에 알리의 의료진이 그에게 은퇴를 권유할 정도였다. 즉, 완성도가 낮은 복서지만 역대 최강의 한방이 있어 제대로 들어가면 어마어마한 대미지를 줄 수 있는 선수. 사실 이 때문에 (한번도 붙진 않았지만) 포먼과 상성이 좋진 않다. 둘 다 피지컬로 승부하는 타입인데 포먼이 테크닉이 훨씬 좋은데다 펀치력은 셰이버스가 더 세더라도 포먼이 맷집이 좋고 덩치가 커서 그 한방을 충분히 버틸 수준이기 때문. 알리를 그토록 고전시킨 것도 아웃복서인 알리가 거의 맞지 않는 스타일이라 덩치에 비해 맷집이 그렇게까지 세진 않았던게 크다.[23] 그러나 복서로서의 완성도는 물론 전적에서도 둘은 넘사벽 차이가 있다. 이는 포먼이 파워와 테크닉을 모두 갖춘 덕분이다. 이런 파워는 선천적으로 타고났지만, 경험과 노력도 뒷받침이 되었다. 그는 복싱 역사에 남을 하드펀처 소니 리스턴의 스파링 파트너였기에 가공할 잽과 숏펀치들을 배웠다. 포먼의 잽에 턱을 맞은 선수들은 고개가 돌아갈 정도였으니 파워도 리스턴과 비슷했다.
그러다 보니 특히 상성으로까지 밀리는[24] 스워머 스타일, 즉 ''' 조 프레이저''', 마이크 타이슨 같이 맷집이나 스피드, 수비력을 내세워 파고드는 복서들은 아예 상대가 안됐다.
위 동영상에 나오는 1위가 바로 프레이저 vs 포먼 전이다. 프레이저는 포먼을 상대로 한 1차전에서 레프트 훅을 가드 사이로 적중시키며 경기를 스타트하고 초반에만 포먼의 관자놀이에 한 방, 턱에 두 방의 레프트 훅을 먹였는데, 포먼이 그걸 다 씹고 프레이저의 가드 위나 이마쪽으로 펀치를 날려 프레이저를 다운시켰다. 알리와의 대결에서 알 수 있듯이, 스워머지만 맷집에 자신이 있어서 잽 정도는 몇 대 허용하면서 파고드는 게 프레이저의 스타일인데 포먼의 주먹은 맞고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프레이저는 포먼의 무자비한 펀치 세례를 두들겨 맞고 2라운드 만에 6번이나 다운되어 TKO 당하는 등 처절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프레이저 역시 복싱 올타임 베스트 20에는 들어갈 전설적인 복서이고 알리, 포먼과 함께 헤비급을 빛낸 라이벌이지만, 맞대결에서는 상성과 체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완패했다.
저 프레이저 전의 임팩트는 실로 대단해서, 20년 가까이 지나서 아직 살아있을 때의 커스 다마토마이크 타이슨을 지도할 때 타이슨은 이 포먼 vs 프레이저의 명경기를 평소에도 분석차원에서 즐겨 보았다. 이 때 다마토는 "너나 프레이저처럼 짧고 탄탄한 체격의 스워머에게 있어 포먼과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포먼을 상대할 수 있는 건 키가 크고 리치가 긴, 계속 물러서면서 아웃복싱을 펼칠 수 있는 상대이다."라고 조언해 줬다고 한다. 물론 커스 다마토는 1985년 11월에 죽었고 포먼은 1987년 중반에 복귀했으니, 자신의 제자와 포먼이 싸울 수도 있으리란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타이슨이 제임스 더글라스에게 패배하자 재기전 상대로 포먼이 물망에 올랐다! 당시 타이슨은 네임밸류의 회복이 필요했고 포먼은 타이슨과 싸우고 싶어 안달난 상태였으므로 권투 프로모터인 돈 킹이 매치를 제안했으나, 타이슨은 죽은 코치의 조언이 생각나서인지 포먼과의 매치를 거절했다고 한다.
사실 무자비한 공격력과 우월한 피지컬이 강조되지만, 전성기 당시 경기운영 능력도 상당한 편이다. 프레이저 전에는 체격도 큰 그가 무자비하게 패버리는 것이 눈에 띄지만, 잘 보면 인파이팅을 하려는 프레이저를 주먹으로 치거나 (반칙이 안 될 정도로만) 슬쩍 밀거나 스탭을 밟아서 계속 거리를 어느 정도 두는 걸 알 수 있다. 스워머인 프레이저가 안쪽으로 들어오는 걸 막은 것. 프레이저도 당대 최고의 복서였는데 그렇게까지 속수무책 당한 건 (피지컬과 상성이 절대적이지만) 포먼의 전략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절대 피지컬만 믿고 미련하게 주먹만 휘두르는 파이터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한방 한방이 살인적인데 경기운영도 지독히 무자비해서, 전성기인 20대에는 가장 무식하게 상대방을 패는 선수라고 알려졌다. 포먼은 선수 시절에는 KO를 바로 앞둔 그로기인 상대도 무지막지하게 패는 잔인함으로 유명했고, 대중을 기피하며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여 인기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25][26]
그는 당대의 라이벌 조 프레이저와는 두 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무하마드 알리에게는 아래 언급된 부상이란 불운과 알리의 기가 막힌 운영에 걸려들어 한 번 패했다. 알리와 재대결을 원했으나, 이후 무명인 지미 영에게 패하자 권투계를 은퇴했다. 후술하겠지만, 이때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할 뻔했다.
그 이후에는 죽다 살아나면서 깨달음을 얻었는지 종교에 귀의하여 개신교 목사 안수까지 받아 종교인으로 지내다가, 1980년대 말에 다시 40대 복서로 복귀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프로 복싱이 장난이냐며 그의 도전이 무모하다고 평가했지만, 조지 포먼은 그런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20~30대 팔팔한 젊은 복서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중년 포먼 스타일은 젊을 때와 파이팅 스타일이 다소 달라졌는데, 상대에게 무자비하게 펀치를 계속 휘두르던 과거와 달리 침착하게 잽과 스트레이트를 효율적으로 쓰며 경기 지구력이 상승했다. 순발력과 스피드가 떨어졌지만 특유의 엑스자 가드를 함으로써 이를 보완하기도 했다. 비록 콤비네이션 펀치는 젊을 때보다 못하게 됐지만, 20kg 가까이 증량된 몸에서 나온 단발 펀치는 오히려 파워가 배가됐다.
그리고 마침내 만 45세의 나이에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다시 따내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 오늘날에도 조지 포먼이 유명한 것은 초창기 활동시절 보다는 1차 은퇴후 복귀한 40대 복서 포먼이 활약한 영향이 더 크다. 여담으로 그는 복귀하면서, 또 그후에도 마이크 타이슨과 대결하기를 여러차례 희망했으나, 마이크 타이슨이 철창 신세를 지고, 그 외 여러 이유로 결국 이 대결이 성사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둘이 붙었으면 어땠을까?"라며 많은 복싱팬들이 궁금해하는 부분. 1997년을 끝으로 복싱계를 떠난다.
2차 은퇴 후에는 종교인은 물론 사업가로서 면모를 과시하여 크게 돈을 벌었고, 성공학 강사로도 유명하다. 물론 목회 활동도 계속 했고 방송 출연도 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
포먼의 리즈시절은 헤비급의 전성기로 조지 포먼은 이 시대를 수놓은 전설적인 복서과 자웅을 겨루던 레전드 복서 중 하나였다. 권투 전문 잡지인 미국의 링 매거진이 선정한 역사상 펀치가 가장 강력한 복서 100명[27] 중 당당히 9위에 선정되었다.

8. 기타


권투 선수로써 전성기는 알리, 프레이저 등과 상대한 1970년대지만, 2차 복귀 때의 대머리에 약간 배불뚝이 외형으로 바뀐 쪽이 보통 사람들에게 기억에 더 남아 있는 듯하다. 아랑전설액셀 호크는 딱 조지 포먼의 외모를 본따 만든 복서 캐릭터.
[1] 70년대 전성기는 220파운드, 100kg[2] 학교에 도시락도 못 싸갔다고 한다.[3] 6번이나 벌떡벌떡 일어나는 프레이저도 사람의 맷집이 아니었다. 노년의 프레이저의 코멘트를 빌리자면 "젠장, 내가 뭘 잘못했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지?"(...) 여담이지만 이때 아나운서가 외쳤던 "Down goes Frazier! Down goes Frazier!"은 농구의 "Havlicek stole the ball" 등과 함께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멘트 중 하나이다.[4] 사각 링 로프의 반동을 이용해 포먼의 강펀치 충격을 교묘하게 분산시키고 포먼의 신경을 긁는데 성공했다.[5] 복서의 회복기로는 매우 짧은 기간이다.[6] 한때 스트리트 파이터 2의 마이크 바이슨이 이 마이크다라는 썰도 있었지만 캡콤은 부정했고, 마이크 바이슨은 오히려 타이슨을 모티브로 따온 케이스다.[7] 여기엔 '''타이슨이 포먼을 회피했다'''는 꽤 신빙성 있는 '''소문'''도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 타이슨을 키워낸 커스 다마토는 자주 타이슨에게 너는 포먼과 상성이 매우 불리하다고 교육했기 때문이다.[8] 타이슨의 명예를 위해 언급하자면 전성기의 타이슨이 늙은 포먼에게 상대도 안되는건 당연히 아니다. 이 시점의 포먼은 펀치는 전성기 이상으로 뛰어났지만 많은 나이 때문에 스피드나 체력, 전반적인 신체능력 면에서 전성기보다 훨씬 떨어진 상태고, 실제 챔피언 자리도 상당히 힘겹게 차지했다. 둘다 전성기라면 확실히 포먼이 아주 유리했겠지만, 20대 초반이라 신체능력이 극강에 오른 타이슨과 늙은 포먼이라면 타이슨이 별로 두려워해야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타이슨은 포먼을 상대로 사실상 얻을게 없다. 포먼을 때려눕혀도 40이 가까운 복서니 이기는게 당연하고, 지면 최전성기의 타이슨이 말년의 포먼에게 지는거니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포먼과 기량 차이가 나면 몰라도, 상성상 불리하고 포먼 자체도 무시무시한 복서라 질 확률도 상당하니 안 붙는게 현명한 것.[9] 당장 이 위의 두 사진의 표정을 비교해 보자. 나이 차이가 있다곤 해도 같은 인물인지조차 의심스럽다.[10] 게리 쿠니라는 표기로도 유명. 실제 발음은 제리 쿠니에 가깝다. 80년대 한국 언론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던 선수. [11] 아마도 영화 록키 발보아의 스토리 라인은 이 경기를 토대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12] 사실 경기 내용, 점수 면에선 무어러가 8:2:1로 크게 앞서고 있었으나, 고질적으로 턱이 약한 무어러가 평소 스타일이 아닌 파고들며 공세를 펼치는 스타일을 펼쳤기 때문에 턱이 열렸고 결국 10라운드에 포먼의 원투에 그로기가 되어 다시 투를 맞고 나가떨어진다. 아래 경기 영상을 보면 포먼은 무어러의 정타를 많이 맞아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경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13] 운명의 10라운드는 정확히 40분부터 시작한다.[14] 훗날 WBO 세계 챔피언이 된다[15] 전 WBC, IBF 헤비급 챔피언. 포먼처럼 30대 후반에 복귀하여 당시 통합 챔피언이던 타이슨, 홀리필드와 각각 대결하고 40대를 훌쩍 넘기고도 선수 생활을 지속했지만, 왕좌 복귀에는 끝내 실패하였다. 포먼만큼 공백기가 길진 않았다는 것도 차이점.[16] 그가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만 빌려주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운영한다고 생각했다.[17] 보통 줄여서 Foreman Grill. 자매품으로 밀폐형으로 된 Foreman Oven도 있다.[18] 본인 트윗에 따르면 알리에게 KO당했을 때 거대한 고깃덩어리가 '''"날 구워줘"'''라고 하는 환각을 봤다고 한다... 참고로 포먼이 그릴을 발명하진 않았다. 발명한 건 대만의 가정용품 기업 짠 쿠엔 회사.[19] 홀리필드 전에서는 '제가 이길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챔피언이 뱃살 때문에 벨트를 못 두르는 광경을 보실 거예요!'라고 농담해 좌중이 폭소했다.[20] 사실 그냥 내지르는 것 같아도 발을 자세히 보면 순간적으로 체중을 실어 펀치를 낸다는 걸 알 수 있다. 실제로 포먼은 체격이 알리같은 동시대 라이벌과 비슷한 체형인데(알리가 기교형이라 날렵해서 슬림할 거란 편견이 있지만 의외로 소니 리스턴과 몸무게가 거의 비슷했다) 파워는 넘사벽이다. 이는 주먹을 내지르는 짧은 순간에 체중을 실을 수 있고, 반대로 체중을 실었음에도 빈틈을 거의 주지 않을 만큼 짧고 강렬하게 때린다는 것. 한방이라면 그를 능가했던 셰이버스같은 선수들과 차이점이 이 점이다. 굳이 크게 한방을 노리지 않고도 충분히 강력한 펀치를 낸다는 것.[21] 포먼, 세이버즈 둘 다 붙어본 무하마드 알리나 켄 노턴도 세이버즈가 파워만으론 한 수 위라고 했다. 켄 노턴은 어니에게 한 번 맞을 때마다 시합을 포기하고 싶었을 정도(...)라고 고백했다.[22] 포먼과 달리 팔을 비교적 크게 휘둘러서 지르는 스타일이다.[23] 물론 알리는 포먼과 시합에서 보듯이 맷집이 강한 편이었으나 어디까지나 포먼같은 괴물에 비하면...이란 소리다.[24] 보통 복싱 스타일의 상성은 아웃복서 > 슬러거 > 인파이터(스워머) > 아웃복서로 돌고 도는 형태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복싱이 많이 진화하여 한 가지만 할 줄 아는 선수는 반쪽짜리 취급을 받는다.[25] 이점에 있어서는 알리와 매우 대조적인데, 알리는 링 밖에서 아무리 흥분된 설전을 벌여도 그로기 상태의 상대에게 불필요한 확인사살성 펀치를 날리지는 않았다. 이는 소니 리스튼과의 2차전 팬텀 펀치나 포먼과의 경기에서도 드러난다. 비틀거리면서 쓰러질 듯한 상대에 대해 알리는 펀치를 날리지 않았다. 반면 포먼은 그로기 상태로 링에 걸쳐 있는 상대에게도 펀치를 날렸다.[26] 물론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중년의 포먼은 그로기 상태의 상대를 자비롭게 기다려 주는 선수로 변했다.[27] 원제는 The 100 Greatest Punchers of All-Time!으로 2003년 발표하였는데, 1위에서 8위까지는 미국 스포츠의 흔한 과거보정 시스템에 의해 19세기 혹은 20세기 초반의 인물들이다. 포먼과의 나이 차이는 최소 30년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