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정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박문희·박문호는 그의 친오빠들이다.
2. 상세
박차정은 1910년 5월 7일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칠산리(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에서 아버지 박용한(朴容翰)과 어머니 김맹련(金孟蓮) 사이의 3남 2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1925년 4월 호주장로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 3월에 졸업하였다.
의열단으로 유명한 김원봉의 아내이다. 참고로 김원봉의 첫째 부인은 평안도 출신 최씨이었지만 일찍 사망하였고, 두 번째 부인이 박차정이며, 세번째 부인은 독립 운동가 최석순의 딸 최동선이다. 독립 운동가이자 북한의 초대 국가 원수 겸 초대 최고 인민 회의 상임 위원장 김두봉이 외당숙이며, 역시 독립 운동가이자 국회 프락치사건에 휘말렸던 김약수(본명은 김두전)가 외재종숙이다. 박차정의 아버지, 오빠 역시 독립 운동에 투신한 집안이었다.
동래 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독립 운동에 참여했으며, 신간회 자매 단체 근우회에서 활동하다 1930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오빠 박문희(朴文熺)의 도움으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31년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하였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의 지원 단체인 남경 조선 부녀회를 결성하여 여성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다.
1937년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창설에 관여하고 1938년 조선의용대 부녀 복무 단장으로 무장 투쟁에 관여하였다. 1939년 장시 성(江西省) 쿤륜산(昆崙山)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입은 총상의 후유증과 관절염 [2] 등의 합병증으로 1944년 충칭에서 병사했다. 유해는 해방 직후 1945년 12월 송환,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의 송산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남편 김원봉이 해방 이후 월북하여 고위직을 역임하여 그동안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1995년에서야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사후 50년이 넘게 지나서 받은 것이지만, 월북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업적에 불구하고 대접을 받지 못하는 남편보다는 나은 셈. 유관순 열사에 이어서 두번째로 대한민국 건국 훈장을 추서받은 여성 독립 운동가로 남겨져 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의 동래고등학교 근처에 생가가 남아있다.
[1] 출생지인 319번지에 박차정 의사 생가로 보존되어 있다.[2] 남편 김원봉으로부터 감염된 성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원봉이 여색을 밝혔고 미인계로 청년들을 회유했다는 의혹을 받아 김원봉이 성병 환자란 소문이 돌았으며 이로 인해 부인들이 사망했다는 소문까지 나온 것이다. 이 기록은 화암 정현섭이 남긴 글 "나의 회고록"에 나온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같이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정화암은 아나키스트 계열에서 민족주의 계열로 노선을 바꾼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김원봉에 대해서 좋지 않게 글을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박차정의 공식적인 사망 이유는 총상후유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