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호

 

1. 동래구 출신 독립운동가, 박문호
2. 만주방면 독립운동가, 박문호
3. 홍원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문호


1. 동래구 출신 독립운동가, 박문호


[image][1]
성명
박문호(朴文昊)
이명
박문성(撲文成)
본관
밀양 박씨
생몰
1907년 10월 16일 ~ 1934년 10월 3일
출생지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복천리
(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사망지
경상남도 동래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박문호는 1907년 10월 16일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복천리(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의 평민 가정에서 부친 박용한(朴容翰)과 모친 김맹련(金孟蓮)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인근의 칠산동으로 이주했다.
부친 박용한은 대한제국 탁지부 지사였고, 형제로 형 박문희, 누나 박수정(朴首貞), 여동생 박차정, 남동생 박문하(朴文夏)가 있었다. 이중 박문희와 박차정은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박차정의 남편은 김원봉이다. 여기에 조선청년동맹(朝鮮靑年同盟)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을 역임한 박일형(朴日馨)은 그의 숙부다.
박문호는 동래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급대학으로 진학을 준비했는데, 그러던 1918년 1월 부친 박용한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분노를 금치 못해 유서 한 통을 남기고 자결했다. 박문호는 이에 큰 충격을 받고 일제에 대한 깊은 반감을 품었다. 이후 그는 숙부 박일형이 집행위원장을 맡은 조선청년동맹 동래지부에 가담했고, 1924년에는 동래누룩조합 사무원으로 취업해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29년 3월 동래누룩조합 공금 1,500원을 가지고 베이징으로 망명했다.
그 후 1929년 5월 상하이로 향한 박문호는 인성학교 교장 김두봉을 만났고, 중국어 교사 정종화에게 중국어를 배우는 한편 베이징에 있는 의열단장 김원봉과 단원 박건웅을 소개받았다. 1929년 7월 다시 베이징으로 간 그는 박건웅의 소개로 9월에 화북대학 사회학부에서 수학했으며, 11월에 김원봉과 박건웅의 권유에 따라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에 가입했다. 그러던 1930년 2월 자신의 여동생이자 근우회 상무 집행위원이던 박차정이 유치장에서 가석방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동생과 재회한 뒤 동생을 베이징으로 망명시켰다. 이 당시 그는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의 부설 교육기관인 레닌주의 정치학교와 관계를 맺었고, 북평지부 선전부 책임자를 역임했다.
1931년 10월 베이징 일본공사관에서 사회주의자 검거 선풍이 불자, 그는 잠시 톈진으로 피신해 지하공작을 수행했다. 그러나 12월 14일 동포의 밀고로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어 나가사키로 압송되었으며, 1932년 6월 15일 나가사키 지방법원에서 공금 횡령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우라카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에 가담한 일을 일체 발설하지 않았고, 1933년 9월 6일에 출소했다. 그러나 출소한 지 한달 만인 10월 초 베이징 레닌주의정치학교 출신 인사들이 경찰에 체포될 때 그가 그들과 교류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동래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서대문경찰서에서 심문받고 1934년 4월 5일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다 병을 얻어 가석방되었지만 1934년 10월 3일 동래에서 사망했다. 향년 28세.
그는 좌익계 인사로 분류되었기에 반공 정서가 지배한 대한민국에서 오랫동안 외면되었다. 그러다가 2019년에서야 비로소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고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만주방면 독립운동가, 박문호


성명
박문호(朴文浩)
생몰
? ~ 1919년 3월 13일
출생지
미상
사망지
중국 지린성 연길현 용정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박문호는 1919년 3월 13일 용정 서전평야에서 명동학교(明東學校)·정동학교(正東學校) 등 인근지역 12개의 한국인학교 학생, 직원을 비롯하여 수천여명의 교민들이 운집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할 때 참가하여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다 중국군의 무차별 발포로 피살되었다. 1920년 7월 1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국민회장 구춘선을 통해 그의 유족에게 포충장(褒忠狀)을 전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박문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홍원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문호


성명
박문호(朴文昊)
생몰
? ~ 1919년 3월 23일
출생지
함경남도 홍원군
사망지
함흥검사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박문호는 함경남도 홍원군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출생년도는 알 수 없다. 그는 천도교 신자로, 1919년 3월 16일 홍원군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해 군중과 함께 홍원군청 앞으로 행진했다. 이때 경찰은 미리 준비한 붉은 잉크를 선두에 선 주동 인물들에게 뿌리고 행진을 제지했다. 이로 인해 체포된 그는 함흥검사국으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 1919년 3월 23일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문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1934년 4월 5일, 경성 서대문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