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
[image]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image]
선전 구호를 쓰는 조선의용대원.[1]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이 장개석의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1938년 10월 10일 중국 호북성 한구[2] 에서 창설한 무장 독립 운동 단체. 장개석이 이끌던 중국국민당으로부터 최초로 공인받은 조선인 독립 무장 부대다.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산하의 군사 단체로도 분류된다.
그러나 중일전쟁 와중에 1941년 분열되었다. 주력은 김원봉 및 국민당으로부터 이탈한 후 화북지방의 연안으로 가서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와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 부른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무력을 기반으로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었고, 북한 연안파의 모체가 되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2년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꾼 후 해방 후 북한의 '조선인민군'의 주력이 되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이탈한 후 김원봉에게는 자신이 직접 이끌던 본대 90여명의 병력이 남았으나, 국민당의 지원이 끊기게 되어 존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김원봉은 과거 자신이 극렬하게 해체를 주장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고, 조선의용대 잔여 병력 약 100명은 한국광복군에 흡수되었다.
일본인 반전 운동가이자 공산당원인 아오야마 가즈오(靑山和夫)[3] 가 조선 의용대 조직 계획 방안을 작성해서 국제 문제 연구소장 왕봉생, 정치 부장 진성, 부부장 주은래와 장여생, 정치부 제2청장 강택, 정치부 비서장 하충한 및 군사 위원회 위원장 장개석의 동의를 얻어냈다.
아오야마 가즈오의 초안에는 100명 정도의 조선인 독립 부대를 창설하여 조직 중인 '일본, 조선, 대만 반파시스트동맹'의 중앙 집행 위원회가 지도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조선 의용대는 국제 의용군이라고도 불렸다.
김원봉은 1926년에 황포 군관학교 4기생으로 입교해 졸업하고 국민당군 장교 신분으로 장개석의 북벌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지휘관 김원봉의 이러한 경력으로 조선 의용대는 장개석의 국민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국민당의 방첩 정보 기관 남의사의 지원을 받게 된다.[4]
국민당군과 연합 활동을 하던 조선 의용대는 주로 일본군에 대한 심리전ㆍ포로 심문ㆍ후방 교란 등을 담당했다.
그러나 대륙 본토에는 조선인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규모를 확대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대원들의 상당수는 국민당군의 후방 지원 역할보다는 일본군과 직접 싸우기를 원하였다. 이들은 "후방에서 선전만 하지 말고 만주로 가서 싸우자"고 주장하며 화북 지역으로 이동한다.
역사학계에서는 조선 의용대의 대다수가 중국 국민당에서 이탈하여 화북의 팔로군에 합류한 이유에 대해서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찾아가 세력을 키우고자 함이라고 보고 있다.
화북으로 이동한 다수 대원들은 최창익의 지도하에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에 합류하면서 중국 국민당 및 남의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참고로 이때는 2차 국공합작 시기로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협력 관계였다. ) 이후 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하던 조선 의용군의 주력부대가 모여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결성되었다. 지대장은 박효삼이었고 그 뒤 화북지대는 타이항 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여러차례 교전하였다.
1942년 7월 10일에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독립동맹과 연합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팔로군 산하에서 활동할 당시 이들의 병력은 최대 8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5][6] 일제 강점기 동안 존재했던 수많은 조선인 무장 부대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7]
조선 의용군은 화베이 지역 각지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팔로군과 협력해 일본군 점령 지구에 잠입하거나 전선에 접근해 선전⋅첩보활동을 했다. 또 중국인의 항전 의식을 일깨우는 전람회를 개최하고 민중의 팔로군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1942년 11월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열어 군사⋅정치 교육을 실시하여 간부를 양성했고, 척박한 토지에 밭을 일궈 농산물을 자급자족하는 생산 활동도 전개했다. 1943년 6월에는 팔로군과 함께 타이항 산 곳곳에서 일본군 침공에 대한 반격을 전개해 용맹을 떨쳤다.
[image]
중국 산시성(山西省) 윈터우디춘(운두저촌, 雲頭低村)에 남아있는 조선 의용대의 한글 구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하는데, '왜놈의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 의용군을 찾아 오시오'라는 내용이다. 1940년대 초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에 징집된 조선인 병사를 상대로 선전전을 펼치며 곳곳에 한글 구호를 남겼다.
조선 의용군은 1943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옌안으로 근거지를 이동하여 옌안 근교 뤄자핑에 머물렀다. 조선 의용군은 1944년부터 화베이 지역의 도시와 농촌, 그리고 만주 일대의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조직 결성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그 결과 여러 도시에 독립 동맹의 거점이 마련되었다. 이리하여 의용군과 독립 동맹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의용군에 입대했다. 또 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1944년 9월 화북조선청년군사정치간부학교, 10월 조선군정학교 산동분교, 1945년 2월 연안 조선군사정치학교(교장 김두봉, 부교장 박일우, 학도대장 박효삼) 등을 개교하여 독립운동의 간부를 양성하였는데, 1945년 5월에는 그 수가 총 850여 명에 달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일전쟁에서 싸웠고, 상당수는 일제 패망 이후 벌어진 2차 국공내전에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1948년 북한 정권이 성립하자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의 근간이 되었으며, 최창익, 김두봉, 김무정 등은 고위직에 올라서 연안파라는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 국공내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9년 5월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중공군 소속 조선인 병사들의 귀국 요청을 허가하였고, 1949년 10월부터 1950년 4월까지 조선의용군을 포함한 5만여명 규모의 중공군 소속 조선인이 북한에 도착했다. 한국전쟁 개전 당시 조선인민군 보병 21개 연대 중 10개 연대가 중공군 출신 한인 부대일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연안파 세력은 모두 몰락하였다.
한편 대다수가 화북으로 이동하면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 본대에는 대략 100여 명 정도가 잔류하였다. 이들은 중국 국민당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1942년 김구가 이끌던 중경의 임시정부에 합류, 한국 광복군 제1지대로 편제되었다. 이 과정은 조선민족혁명당 항목에 자세히 기술되어있다.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를 이끌었던 김원봉은 임시정부에서 계속 활약했고, 해방 후에 귀국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미군정과 극우 등의 위협을 받아 1948년 남북협상회의 참석차 북을 방문한 이후 그대로 잔류하였다. 조선 의용대 대장 김원봉 역시 8월 종파 사건 이후, 1950년대 후반 임정 출신 납북자들과 같이 중립화 통일안을 주장하다 숙청당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 독립 운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단체이지만, 분열 속에서 지도자들과 구성원들이 남북으로 흩어졌고, 그나마도 모두 버림받은 비운의 단체이다. 북으로 간 사람들은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김일성의 1인 독재에 걸림돌이 된다며 해서 숙청당했고, 살아남은 일부가 중국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마쳤다. 한편 남으로 온 사람들은 빨갱이로 묻혔다.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image]
선전 구호를 쓰는 조선의용대원.[1]
1. 개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이 장개석의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1938년 10월 10일 중국 호북성 한구[2] 에서 창설한 무장 독립 운동 단체. 장개석이 이끌던 중국국민당으로부터 최초로 공인받은 조선인 독립 무장 부대다.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산하의 군사 단체로도 분류된다.
그러나 중일전쟁 와중에 1941년 분열되었다. 주력은 김원봉 및 국민당으로부터 이탈한 후 화북지방의 연안으로 가서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와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 부른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무력을 기반으로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었고, 북한 연안파의 모체가 되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2년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꾼 후 해방 후 북한의 '조선인민군'의 주력이 되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이탈한 후 김원봉에게는 자신이 직접 이끌던 본대 90여명의 병력이 남았으나, 국민당의 지원이 끊기게 되어 존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김원봉은 과거 자신이 극렬하게 해체를 주장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고, 조선의용대 잔여 병력 약 100명은 한국광복군에 흡수되었다.
2. 창설
일본인 반전 운동가이자 공산당원인 아오야마 가즈오(靑山和夫)[3] 가 조선 의용대 조직 계획 방안을 작성해서 국제 문제 연구소장 왕봉생, 정치 부장 진성, 부부장 주은래와 장여생, 정치부 제2청장 강택, 정치부 비서장 하충한 및 군사 위원회 위원장 장개석의 동의를 얻어냈다.
아오야마 가즈오의 초안에는 100명 정도의 조선인 독립 부대를 창설하여 조직 중인 '일본, 조선, 대만 반파시스트동맹'의 중앙 집행 위원회가 지도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조선 의용대는 국제 의용군이라고도 불렸다.
김원봉은 1926년에 황포 군관학교 4기생으로 입교해 졸업하고 국민당군 장교 신분으로 장개석의 북벌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지휘관 김원봉의 이러한 경력으로 조선 의용대는 장개석의 국민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국민당의 방첩 정보 기관 남의사의 지원을 받게 된다.[4]
국민당군과 연합 활동을 하던 조선 의용대는 주로 일본군에 대한 심리전ㆍ포로 심문ㆍ후방 교란 등을 담당했다.
3. 분리
그러나 대륙 본토에는 조선인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규모를 확대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대원들의 상당수는 국민당군의 후방 지원 역할보다는 일본군과 직접 싸우기를 원하였다. 이들은 "후방에서 선전만 하지 말고 만주로 가서 싸우자"고 주장하며 화북 지역으로 이동한다.
역사학계에서는 조선 의용대의 대다수가 중국 국민당에서 이탈하여 화북의 팔로군에 합류한 이유에 대해서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찾아가 세력을 키우고자 함이라고 보고 있다.
3.1. 화북 이동과 조선 의용군
화북으로 이동한 다수 대원들은 최창익의 지도하에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에 합류하면서 중국 국민당 및 남의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참고로 이때는 2차 국공합작 시기로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협력 관계였다. ) 이후 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하던 조선 의용군의 주력부대가 모여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결성되었다. 지대장은 박효삼이었고 그 뒤 화북지대는 타이항 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여러차례 교전하였다.
1942년 7월 10일에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독립동맹과 연합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팔로군 산하에서 활동할 당시 이들의 병력은 최대 8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5][6] 일제 강점기 동안 존재했던 수많은 조선인 무장 부대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7]
조선 의용군은 화베이 지역 각지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팔로군과 협력해 일본군 점령 지구에 잠입하거나 전선에 접근해 선전⋅첩보활동을 했다. 또 중국인의 항전 의식을 일깨우는 전람회를 개최하고 민중의 팔로군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1942년 11월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열어 군사⋅정치 교육을 실시하여 간부를 양성했고, 척박한 토지에 밭을 일궈 농산물을 자급자족하는 생산 활동도 전개했다. 1943년 6월에는 팔로군과 함께 타이항 산 곳곳에서 일본군 침공에 대한 반격을 전개해 용맹을 떨쳤다.
[image]
중국 산시성(山西省) 윈터우디춘(운두저촌, 雲頭低村)에 남아있는 조선 의용대의 한글 구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하는데, '왜놈의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 의용군을 찾아 오시오'라는 내용이다. 1940년대 초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에 징집된 조선인 병사를 상대로 선전전을 펼치며 곳곳에 한글 구호를 남겼다.
조선 의용군은 1943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옌안으로 근거지를 이동하여 옌안 근교 뤄자핑에 머물렀다. 조선 의용군은 1944년부터 화베이 지역의 도시와 농촌, 그리고 만주 일대의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조직 결성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그 결과 여러 도시에 독립 동맹의 거점이 마련되었다. 이리하여 의용군과 독립 동맹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의용군에 입대했다. 또 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1944년 9월 화북조선청년군사정치간부학교, 10월 조선군정학교 산동분교, 1945년 2월 연안 조선군사정치학교(교장 김두봉, 부교장 박일우, 학도대장 박효삼) 등을 개교하여 독립운동의 간부를 양성하였는데, 1945년 5월에는 그 수가 총 850여 명에 달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일전쟁에서 싸웠고, 상당수는 일제 패망 이후 벌어진 2차 국공내전에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1948년 북한 정권이 성립하자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의 근간이 되었으며, 최창익, 김두봉, 김무정 등은 고위직에 올라서 연안파라는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 국공내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9년 5월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중공군 소속 조선인 병사들의 귀국 요청을 허가하였고, 1949년 10월부터 1950년 4월까지 조선의용군을 포함한 5만여명 규모의 중공군 소속 조선인이 북한에 도착했다. 한국전쟁 개전 당시 조선인민군 보병 21개 연대 중 10개 연대가 중공군 출신 한인 부대일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연안파 세력은 모두 몰락하였다.
3.2. 본대 잔류와 한국 광복군
한편 대다수가 화북으로 이동하면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 본대에는 대략 100여 명 정도가 잔류하였다. 이들은 중국 국민당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1942년 김구가 이끌던 중경의 임시정부에 합류, 한국 광복군 제1지대로 편제되었다. 이 과정은 조선민족혁명당 항목에 자세히 기술되어있다.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를 이끌었던 김원봉은 임시정부에서 계속 활약했고, 해방 후에 귀국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미군정과 극우 등의 위협을 받아 1948년 남북협상회의 참석차 북을 방문한 이후 그대로 잔류하였다. 조선 의용대 대장 김원봉 역시 8월 종파 사건 이후, 1950년대 후반 임정 출신 납북자들과 같이 중립화 통일안을 주장하다 숙청당했다.
4. 결말
일제 강점기 말기 독립 운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단체이지만, 분열 속에서 지도자들과 구성원들이 남북으로 흩어졌고, 그나마도 모두 버림받은 비운의 단체이다. 북으로 간 사람들은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김일성의 1인 독재에 걸림돌이 된다며 해서 숙청당했고, 살아남은 일부가 중국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마쳤다. 한편 남으로 온 사람들은 빨갱이로 묻혔다.
5. 출신 인물
- 강진세
- 김두봉
- 김무정(무정이라고 한다.)
- 김세일
- 김승곤
- 김원봉
- 김창만
- 김학무
- 김학철(1916)
- 김한중
- 박무
- 박일우
- 박차정
- 박철동
- 박효삼
- 방우용
- 손일봉
- 양민산
- 유신
- 윤세주
- 이춘암
- 이유민
- 이익성
- 장중광
- 장철부
- 진광화
- 차일혁
- 최창익
- 한빈
- 한지성
- 허정숙
- 호철명
6. 관련 문서
[1] '한국과 중국 양 민족이 연합하여 일본 강도를 타도하자!'라는 내용이다.[2] 현재의 우한(武漢)이다.[3] 1933년 5월에는 일본 전투적 무신론자 동맹에 참가하였다. 1934년에 검거되었으나, 전향을 강요하는 문서에 서명하여 출옥하였다. 그러나, 1937년 3월에 중화민국의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상하이 함락 후에는 홍콩과 베트남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무한에서 활동을 하면서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을 폭로하는데 참여했다.[4] 훗날 김원봉은 북한 정권에 참여했을 때 이 전력 때문에 입지가 매우 좁아졌다.[5] 1948년 3월 15일 기준. 제1연대 1301명 제2연대 1709명 제3연대 1608명 등을 포함하여 총 인원 8274명. (출처:특별연구 조선의용군,염인호,1994) [6] 일제 패망할 당시에는 1000명 정도 (출처: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의 비교 연구,김광재,2006)[7] 1920년대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이 이끌었던 만주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러시아 연해주에서 창설했던 대한독립군단, 1929년 양세봉, 김학규 장군의 조선혁명군 , 1930년대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이 이끌었던 동북항일연군 산하의 공산주의 계열 유격대, 1940년대 지청천, 이범석 장군이 이끌었던 임시 정부 산하의 한국 광복군, 그 외 재미 교포들이 조직했던 박용만(1881)의 국민 군단 등등, 일제 강점기에 존재했던 수많은 무장 부대들 중에서 이만한 규모의 조선인 군사 단체는 없었다. 참고로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연이은 승전 이후 만주 지역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들이 일제의 토벌을 피해서 러시아 연해주에 집결해서 대한독립군단을 창설했을때 병력이 3500여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