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국기
渤海國記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총 3책으로 이루어 져있으며 송나라의 왕응린이 편찬한 백과사전인 《옥해(玉海)》 153권에 언급되는 문장이 유일한 원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옥해(玉海)》 153권
그 외 《신당서(新唐書)》, 《송사(宋史)》, 《통지예문략(通志藝文略)》, 《숭문총목(崇文總目)》, 《통지예문략(通志藝文略)》, 《국사경적지(國史經籍志)》등에서 짤막하게 인용되어 있다. 특히 신당서의 경우에는 왕의 시호나 5경 15부 62주의 존재, 상경용천부의 탄생 등 다른 사서에 나오지 않거나, 짤막하게 넘어간 부분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인용 뿐 아니라 기록 전반을 발해국기에서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근현대 중국의 역사학자인 황웨이한(黃維翰)이 저술한 발해 역사서. 3편 14장으로 분류해 작성했으며 1929년에 탈고 했으나 출판되지 못했다. 이후 1933년에 포봉관(鮑奉寬)이 손을 본 후 출판을 하게 되었다.
자서(自序)에는 출판 동기가 밝혀져 있는데, 당나라의 장건장(張建章)이 엮은 『발해국기』3권은 왕응린(王應麟)의 『옥해(玉海)』에서 발해를 설명하면서 한 구절만이 인용되었을 뿐 전하지 않으며, 근세에 와서 만주의 당안(唐晏)이 『발해국지(渤海國志)』를, 조선의 서상우(徐相雨)가 『발해강역고』를 저술했는데 모두 득실이 있기에 집필한 것이라 하였다.
내용은 상•중•하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편은 국호•종족•예속(禮俗), 중편은 지리•직관(職官)•인물•물산, 하편은 조공중국(朝貢中國)•교빙일본(交聘日本)•비린신라(比鄰新羅)•이국거란(移國契丹)•유민(遺民)•잡지(雜識)•연표 등의 순으로 엮어져 있다.
황유한은 자서에서 “지금 군적(群籍)을 망라하는 한편, 해외의 사서까지도 참고하였다.”고 자부하고 있다.
1. 장건장(張建章)이 쓴 역사서
당나라 유주 종사로 근무했던 인물인 장건장(張建章)이 쓴 발해 역사서. 장건장은 833년에 발해에 머물렀는데 834년 당나라로 귀국한 후 자신이 보고 느낀 점을 책으로 써내려갔는데 이것이 바로 발해국기다. 당시 발해의 왕호를 비롯해 각종 생활상이나 풍습등을 기록한 책으로 현존하지는 않는다. 만약 남아있었다면 교과서에 나올 발해 부분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날수도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편찬 시기가 발해의 대이진 시절이라 선왕까지만 시호가 확인되기 때문에 이후의 왕들에 대해서는 시호조차 알수 없다.(...)장건장(張建章)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이 어찌 홀로 발해 역사를 편찬할 수 없었단 말인가?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총 3책으로 이루어 져있으며 송나라의 왕응린이 편찬한 백과사전인 《옥해(玉海)》 153권에 언급되는 문장이 유일한 원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옥해(玉海)》 153권
그 외 《신당서(新唐書)》, 《송사(宋史)》, 《통지예문략(通志藝文略)》, 《숭문총목(崇文總目)》, 《통지예문략(通志藝文略)》, 《국사경적지(國史經籍志)》등에서 짤막하게 인용되어 있다. 특히 신당서의 경우에는 왕의 시호나 5경 15부 62주의 존재, 상경용천부의 탄생 등 다른 사서에 나오지 않거나, 짤막하게 넘어간 부분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인용 뿐 아니라 기록 전반을 발해국기에서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2. 황웨이한이 쓴 역사서
근현대 중국의 역사학자인 황웨이한(黃維翰)이 저술한 발해 역사서. 3편 14장으로 분류해 작성했으며 1929년에 탈고 했으나 출판되지 못했다. 이후 1933년에 포봉관(鮑奉寬)이 손을 본 후 출판을 하게 되었다.
자서(自序)에는 출판 동기가 밝혀져 있는데, 당나라의 장건장(張建章)이 엮은 『발해국기』3권은 왕응린(王應麟)의 『옥해(玉海)』에서 발해를 설명하면서 한 구절만이 인용되었을 뿐 전하지 않으며, 근세에 와서 만주의 당안(唐晏)이 『발해국지(渤海國志)』를, 조선의 서상우(徐相雨)가 『발해강역고』를 저술했는데 모두 득실이 있기에 집필한 것이라 하였다.
내용은 상•중•하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편은 국호•종족•예속(禮俗), 중편은 지리•직관(職官)•인물•물산, 하편은 조공중국(朝貢中國)•교빙일본(交聘日本)•비린신라(比鄰新羅)•이국거란(移國契丹)•유민(遺民)•잡지(雜識)•연표 등의 순으로 엮어져 있다.
황유한은 자서에서 “지금 군적(群籍)을 망라하는 한편, 해외의 사서까지도 참고하였다.”고 자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