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왕

 


'''발해 10대 국왕
宣王
선왕
'''
'''시호'''
'''선왕(宣王)'''
'''연호'''
건흥(建興)
'''성씨'''
대(大)
''''''
인수(仁秀)
'''왕태자'''
대신덕(大新德)[1]
'''생몰연도'''
음력
? ~ 830년
'''재위기간'''
음력
818년 ~ 830년 (12년)
1. 소개
2. 재위
2.1. 정복 전쟁
2.2. 내정
3. 《신당서》 기록
4. 평가
5. 창작물


1. 소개


발해의 제10대 국왕. 연호는 건흥(建興). 시호의 선(宣)이 베풀다라는 의미라서 역사학자들이 이를 토대로 선왕이 선정을 펼쳤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때 발해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에 그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시호란 게 수양제 급으로 웬만큼 막장이 아니면 대체로 좋은 글자를 받는 편이라 '선'자 받은 막장 임금도 널렸으니만큼 별 의미는 없는 편이다.

2. 재위


대조영 동생 대야발의 증손자로 간왕의 종부(從父). 간왕이 병사하였을 당시 대인수는 권지국무로 있었다. 다음 왕이 될 위치는 아니지만 그만큼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다는 말이다. 장기 집권하며 발해의 기틀을 닦은 문왕 이후에 발해의 정국이 혼란기에 빠져있던 상황에서 발해의 왕권을 쟁취해냈다.

2.1. 정복 전쟁


818년 즉위하자마자 말갈의 여러 부락들에 대한 정복 사업을 단행하여 2년만인 820년 마무리했다. 이때 정복한 말갈 부락은 우루, 월희, 흑수로 추정되는데 우루, 월희, 흑수의 대당 조공이 이 시기에 끝나기 때문이다. 우루, 월희는 완전히 정복하여 군현을 설치했는데 이 세력들 역시 이탈 후 재확보한 것이다. 이 지역은 무왕 대의 정복 사업 중에 이미 지나갔던 지역이었다. 이 세력은 완전히 발해에 흡수된 다른 부들과도 끝까지 버틴 흑수부와도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흑수는 복속이나 통제 정도에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3] 일부 사료에 의하면 발해가 흑수부 내의 강역까지도 점거하여 군현을 설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사료 부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정확한 실체 규명이 어려운 실정이다.
한편 요사에 의하면 서쪽으로 요동 지역까지 진출하여 군현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소고구려가 존재했다고 추정한다면 이 때 발해에 흡수되어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요사에 발해가 이 시기에 요동에 군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실 문왕 시기까지 이미 요동 지역은 발해의 영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혼란기 때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을 다시 확보했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무왕이나 문왕 시기에 이미 정복한 지역에 대해서 다시 정벌하는 기록이 선왕 시기에 자주 보인다. 우루, 월희, 흑수 모두 무왕이나 문왕 시기에 정복한 전력이 있던 지역들이다. 그런데 요동을 정복한 것이 소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고구려가 선왕에 의해 멸망된 것이 거의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다.
요사 지리지 흥료현조에서는 선왕 대인수가 당나라 원화(元和) 연간(806~820)에 남쪽 신라를 평정했다는 기록이 확인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기록의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것은 요사 자체가 중국의 24사(二十四史) 중에서 가장 정확성이 떨어지고 부실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오류가 많은 책이고 신라 측 기록이 원전일 삼국사기나 여타 다른 기록에는 발해가 신라를 침공한 기록이 없다. 고고학적으로도 신라 북변에 발해 남하의 흔적이 미약하기 때문에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다. 그래서 요사 지리지의 신라 평정 기록을 신뢰하더라도 이는 신라 북변의 대동강 이북까지 진출한 것이 와전되거나 작은 승리가 있었다면 그것이 과장된 기록으로 보이는데, 이 역시 일부 이탈한 반란 세력들을 다시 귀부시킨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신라와 발해의 국경 역시 이르면 고왕 시기, 늦어도 무왕 대에는 확정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신라가 헌덕왕 때에 대동강변에 3백 리 패강장성(浿江長城)을 짓고 황해도와 평안도 땅에 군현을 대거 설치한 것으로 보아 전쟁이나 큰 분쟁은 아니라도 발해로부터 어떤 위협이 있었을 가능성은 꽤 있다.
북쪽 방면으로는 멸망한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두막루가 이 때 선왕에 의해 발해에 병합된 것이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막루가 발해에 병합되었다는 근거는 이러한 정황적 추측 외에는 딱히 없다. 오히려 물길 때문에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반면에 당나라 방면 외교는 꽤나 유화적인 기조를 띄었고 당헌종번진 토벌이 평로치청에 이르렀을 때 평로치청 번진의 구원 요청을 무시하고 군사를 보내주지 않았다.[4] 이에 당나라는 820년에 금자광록대부, 겸고사공직을 더하여 줌으로써 화답했고 이후 당나라와의 교역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2.2. 내정


대인수는 왕위에 올라 발해의 내분을 정리했다.
2년만에 아무르강 유역에서 요동반도, 대동강에 이르는 지역으로의 정복 활동을 마무리하고 남은 재위 기간 동안은 내정 안정화에만 집중했다. 이 짧은 정복 기간 또한 맨 땅에 헤딩한 것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는 셈. 내정 활동으론, '''행정구역 5경 15부 62주를 완전히 정비하고 학문을 권장, 진흥하였으며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정복 활동은 2년만에 끝났으나 내정에 무려 10년을 투자한 것으로 보아 현재 알려진 것들 외에도 꽤 많은 정책을 실시했을 것이며 개중엔 내분으로 인해 악화된 발해 내부의 중앙 정치를 안정화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의 치세는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칭호를 얻어내는 기틀을 마련하는 등, 중흥기였다. 그만큼 국력이 크게 신장된 전성기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3. 《신당서》 기록


종부(從父)인 대인수(大仁秀)가 즉위하여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쳤으니, 그의 4세조[5]

대야발(大野勃)은 대조영의 아우이다. 대인수가 자못 바다 북쪽의 여러 부족을 토벌하여 크게 영역을 개척하였다. 공적이 있어 검교사공(檢校司空)을 제수받고 왕위를 계승하였다. 원화(元和) 연간(806년 ~ 820년)에 모두 16번, 장경(長慶) 연간(821년 ~ 824년)에 4번, 보력(寶曆) 연간(825년 ~ 826년)에 2번씩 각각 조공하였다. 태화(太和) 4년(830년)에 대인수가 죽으니, 시호는 선왕(宣王)이다.

從父仁秀立, 改年建興, 其四世祖野勃, 祚榮弟也. 仁秀頗能討伐海北諸部, 開大境宇, 有功, 詔檢校司空襲王. 元和中, 凡十六朝獻, 長慶四, 寶曆凡再. 大和四年, 仁秀死. 諡宣王.


4. 평가


발해의 전성기를 일으킨 대표 명군이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실로 안습인 수준이다.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과 수능이나 공무원 수험서에 등장하는 발해 4왕 중 한 명인지라 수험생들이나 조금 알 듯 싶다. 애초에 남은 기록 자체가 거의 없다. 삼국시대처럼 자체 기록이 있는 게 아니라 이나 거란(요나라), 신라, 일본 같은 주변국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시호가 선왕이라 인터넷에 선왕으로 검색하면 선대 왕을 의미하는 선왕(先王)에 밀려 이 사람에 대한 자료를 찾기가 꽤 힘든 편이다. 이름인 대인수로 검색하는 것이 더 좋을 정도. 그런데 대인수로 검색해도 나오는게 별로 없다. 선왕뿐 아니라 발해 왕들 대부분이 시호로 검색하면 휘로 검색하는 것에 비해 자료를 찾기 힘들다. 1대 고왕의 경우도 고왕보단 대조영으로 훨씬 널리 알려져 있고, 2대 무왕백제에도 있어서 혼동되고 3대 문왕중국주나라에도 있다. 그 외 왕들은 듣보잡이라서 검색해도 나오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혼동하고 말고를 따지는 의미도 없다.

5. 창작물


상술했듯 대중적인 인지도가 미비한 데다가 발해 자체를 대조영 외에는 사극에서 다룬 적이 없기 때문에 창작물에는 등장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다만 적당히 각색만 해주면 사극에서도 나름대로 통할 만한 요소가 있는데, 대조영 직계 계열이 아닌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후손, 즉 왕위 계승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을 방계 출신으로 왕이 되어 문왕 사후 시작된 25년 간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발해의 중흥기를 이끌었다는 점이 그것. 이와 비슷한 예[6]로는 고구려의 미천왕고려의 현종이 있다.[7]
그나마 김대원의 단편 순정만화 <답신>[8]에서 주인공이자 화자로 등장한다. 발해 상경성으로 유학 온 서경 출신 미소년 고시례[9]과의 만남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 왕계 방족이라는 사실을 반영하듯 작품에서 당시 발해 왕족들이 재능이 뛰어난 대인수를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있다는 묘사가 나온다.
[1] 유득공의 발해고 신고 기록.[2] 이는 당시의 국제 질서에서 발해와는 별개의 세력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3] 애초에 흑수부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땅 전부를 말하기 때문에 전부 통합하고 다스린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이 어려웠다. 때문에 발해의 국력이 약해지면 이탈하는 동시에 일부 부족에서는 중국으로 조공 사신을 보냈다.[2] 당나라 또한 사신들을 모두 받아주어서 발해를 엿먹이는데 이용하였다. 결국 흑수부는 발해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흡수되지 못했다.[4] 제3대 문왕이 평로치청에 위치한 등주솔빈부의 말을 보낼 정도로 교역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조치다.[5] 증조부다. 자신을 1세로 보기 때문. 단 4세가 아닌 4대면 고조부다. 이 때는 자신을 0대로 본다. "(세수)=(대수)+1"을 떠올리면 쉽다.[6] 즉 인생 전반부에 고생하다 왕이 되어 명군이 된 예.[7] 물론 인생 전반부에 한미하게 살았던 게 비슷하단 거지 이 세 왕은 상황이 매우 달랐다. 발해 선왕은 공통 조상이 개국왕 이전인 진국공 걸걸중상까지 올라가는 먼 방계 왕족이였다. 고구려 미천왕은 왕손이자 큰아버지가 왕이 된 왕의 조카로 가까운 방계 왕족이였으나 아버지가 왕한테 죽었고 본인도 살해 위협을 받았다. 고려 현종은 한국사 유일한 사생아 군주로 꼴에 혈통은 또 좋아서 출생신분만으로도 정적이 많았다.[8] 1998년 서울문화사에서 출간. 2016년부터 레진코믹스에서 서비스 중이다.[9] 사실 여인으로 본명은 고시리. 고시례는 쌍둥이 오빠의 이름으로 그 이름을 빌려 경성으로 유학을 갔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