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이진

 


'''발해 11대 국왕
大彝震
대이진
'''
'''시호'''

'''연호'''
함화(咸和)
'''성씨'''
대(大)
''''''
이진(彝震)
'''왕자'''
대창휘(大昌輝), 대명준(大明俊), 대선성(大先晟)
대명훈(大明訓), 대연광(大延廣), 대지악(大之萼)
'''아버지'''
대신덕(大新德)
'''생몰연도'''
음력
? ~ 857년
'''재위기간'''
음력
830년 ~ 857년 (27년)
1. 소개
2. 업적
3. 사후
4. 《신당서》 기록
5. 연표


1. 소개


발해의 제11대 가독부이자 국왕. 선왕 대인수의 손자인데 아버지 대신덕요절했기에 그가 왕위에 올랐다. 즉위하기 전 칭호는 동궁이 아닌 권지국무(權知國務)였는데 조선 시대로 비유하면 세자로 책봉받지 않은채 대군인 상태에서 왕위에 오른 것과 같다.

2. 업적


할아버지 대인수의 뒤를 이어 발해를 율령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아들 대명준을 832년, 836년, 837년 3차례에 걸쳐 수십 명의 신하들과 함께 당나라에 파견하였으며 또 다른 아들 대광성, 대연광(大延廣), 대지악(大之萼) 등도 833년, 839년, 846년에 각각 당나라에 파견하여 문화를 적극 받아들였다. 이중 대연광의 방문 기록은 엔닌입당구법순례행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사신단이 당나라의 수도장안에서 등주를 거쳐 발해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발해의 주요 교역 루트를 알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문득 듣건대 “며칠 전에 '''발해 왕자'''가 이곳에 이르러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칙사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떠났다.”고 하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 839년 3월 28일신라원에서 입하 공양을 마련하다

한편 15부(府) 62주(州)로 이루어진 행정 구역의 확정과 중앙 집권적인 행정 제도의 확립에 노력하였고 군사 기구를 발전시켜 모병제에 의한 상비군을 편성했다. 그리고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 좌우삼군(左右三軍), 120사(司)를 설치했다.
조부인 대인수가 마련해놓은 기틀 아래 발해를 크게 융성하게 한 왕이지만 다른 발해 왕들과 마찬가지로 기록이 별로 없다.

3. 사후


대이진부터 발해의 왕들은 시호가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후대에 시호를 올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떤 시호를 올렸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신당서》 발해열전인 《발해국기》가 대이진 치세에 와서 작성된 것이기에 당연히 이후의 기록이 없기 때문. 사실 대이진의 경우 시호가 화왕(和王)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기록된 책이 하필 환단고기라 인정받지 못한다. 형제 간에 왕위 계승을 한 경우 형 쪽에 효(孝) 시호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효왕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듯 하다.
대이진에게는 대창휘(大昌輝), 대명준(大明俊) 등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1] 왕위를 승계한건 이들이 아니라 동생인 대건황이었다. 이에 정변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4. 《신당서》 기록


(대인수의)아들 대신덕(大新德)이 일찍 죽은 탓에 손자 대이진(大彛震)이 즉위하여 연호를 함화(咸和)로 고쳤다. 다음해(831년) 조서를 내려 관작을 계승케 하였다. 당문종(文宗) 때까지 모두 12번 내조하였고, 회창(會昌) 연간(841년 ~ 846년)에 모두 4번을 사신을 보냈다.


5. 연표


830년 10월 선왕이 죽자 손자이자 권지국무인 대이진이 즉위하였다.
832년 2월 아들 대명준 등 6인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832년 12월 당의 내양 왕종우가 발해의 좌우신책군, 좌우삼군, 120사를 설치했음을 당 문종에게 아룀
833년 1월 동중서우평장사 고보영(혹은 고상영)을 당에 사신으로 보냈다
833년 2월 아들 대선성(혹은 대광성) 등 6인을 당에 사신으로 보냈다
834년 5월 8일 함화4년 발해 석불 제작
837년 1월 아들 대명준 등 19인을 당에 사신으로 보냈다
839년 12월 아들 대연광을 당에 사신으로 보냈다
841년 9월 25일 정당성 춘부경인 하수겸과 대내상 '''대건황'''의 명의로 일본의 태정관에 보내는 첩을 작성하였다
841년 12월 하복연 등 105인에게 '''함화11년 중대성첩'''을 소지케 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842년 3월 28일 함화 11년 중대성첩을 일본의 태정관에게 주었다
846년 1월 아들 대지악을 당에 사신으로 보냈다
848년 12월 영녕현승 왕문구 등 100인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857년 대이진이 죽고 권지국무이자 동생인 대건황이 국정을 대리하였다

[1] 이들은 대이진 시기에 왕자의 신분으로 당나라에 파견된 인물들이다. 이들 모두가 대이진의 아들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대이진의 아들이 한 명은 있었을 것이다. 문원영화(文苑英華) 발해서에는 왕자 대창휘라는 인명과 별개로 부왕(당시에 태자를 이르던 말)이 등장하므로 대이진의 태자는 분명히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