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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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방수원 (房水源 / Soo-won Bang)
생년월일
1960년 1월 4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광주광역시
학력
광주일고 - 영남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2~1989)
지도자
해태 타이거즈 투수코치 (1990~1995)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3
1986
1987
1988
1989
1. 소개
2. 선수 시절
3. 은퇴 후
4. 여담


1. 소개


해태 타이거즈 소속의 투수다.

2. 선수 시절


야구 명문인 광주일고에서 동기 이상윤과 함께 원투펀치 역할을 거쳐 영남대로 진학했으나,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3학년 때 중퇴하고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 멤버가 되었다.
당시 해태의 창단 첫 경기 선발투수로 등판하는 등 프로 원년에는 154이닝을 던져 6승 7패, 방어율 3.91의 호성적을 기록하며 해태의 에이스 노릇을 한다. 그러나 이 후 다음해부터 이상윤이 제 컨디션으로 돌아오면서 밀려났고, 그 이후에는 문희수, 선동열 등 호남 야구의 르네상스를 만들었던 에이스 투수들이 입단하면서 선발진에는 끼지 못하고, 롱 릴리프로 강등되었다. 이 후 한 시즌도 규정이닝을 채우지 못한 채 통산 18승 29패 18세이브의 성적을 남기고 1990년 은퇴식을 가진다.
이렇게 보면 그저 그런 선수로 보이겠지만... 무려 KBO 리그 최초의 노히트 노런 기록 달성자가 바로 이 사람이다. 1984년 5월 5일[1] 광주 삼미전에 등판해서 리그 사상 최초의 노히트 노런 기록을 달성했다. 재미있는 것은 노히트 노런 경기 당일 방수원의 선발 등판은 땜빵 선발이었다는 점이다. 의도치 않게 선발진에 구멍이 났고 결국 김응용 감독이 임시방편으로 내세운 선발투수가 방수원이었는데 그 경기에서 덜컥 무피안타 3볼넷 6탈삼진이라는 초대형 사고를 치게 된다. 일각에서는 방수원의 얼굴 때문에 삼미 선수들이 집중을 하지 못해서 노히터의 제물이 됐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방수원의 얼굴과 무관하게(...) 그 당시 삼미는 그냥 너무 못하는 팀이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날의 노히터 1승이 그의 1984년 유일한 승리 기록이라는 점이다.
어쨌든 특별한 보직 없이 이리저리 궂은 일을 하던 선수였지만 통산 18세이브를 기록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중간계투로서 꽤 알토란같은 활약을 한 선수였다. 홀드 제도가 늦게 도입된 것이 참 아쉬웠던 선수 중 한 명이다.[2]
구속이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 등 변화가 심한 변화구를 주무기로 던진 투수였다. 선동열에게 슬라이더를 전수해준 바도 있다. 선동열은 이 슬라이더를 갈고 닦아 국내 최고의 투수로 성장하게 된다. 이영민 기자의 저서에 따르면, 이 슬라이더를 가르쳐주게 된 계기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게 시민군으로 오인받아 구타당하던 방수원을 선동열의 아버지인 선판규 씨가 신원보증을 서서 구해줘 집에 숨겨줬을 때, 학교 후배이기도 한 선동열이 공을 던지는 것을 보고 그립을 알려줬다고 한다.
선판규 씨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깊은 분인데 소설가 한창훈의 회고에 따르면 계엄군에게 구타당하는 시민을 뛰어들어 구해준 적도 있다고 한다.
5.18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선판규 씨가 운영하는 여관에 방수원과 함께 광주일고 선수들도 머물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계엄군 트럭에 욕을 하고 도망친 남자[3]를 쫓던 계엄군들이 근처에 있던 광주일고 선수들에게로 향했고 선수들은 여관으로 도망쳤다. 기어이 여관까지 찾아온 계엄군이 방수원의 배에 대검을 들이대며 위협하자 선판규 씨가 "야구만 하는 애들이라 아무 것도 모른다. 절대 계엄군에 욕했을 리가 없다."며 호소했다. 마침 고교야구 마니아였던 계엄군 모 장교가 선동열을 알아 부하들을 데리고 사라졌다고 한다. 방수원의 회고에 의하면 거리에서 군인에게 시민이 죽는 걸 본 터라 자신도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고.
한번은 강판을 요구하는 코감독에게 안 내려가겠다고 개기다가[4] 덕아웃으로 끌려와 경기장에서 코감독에게 맞기도 했다.
여담으로 노히트 노런을 하던 날은 원래 MBC에서 타 구장의 라디오 중계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우천취소로 인해 스케줄이 변경되어 급하게 광주 중계로 수정되었고 광주MBC의 아나운서가 급하게 전국중계를 한 일화가 있다. 김형주 전 광주MBC 아나운서의 기고글

3. 은퇴 후


은퇴한 이후 해태 2군 코치를 맡기도 했다. 지금은 운암동에서 골프 연습장을 운영하는 중이다. 골프 티칭프로 자격증도 땄다.

4. 여담


원래 이름은 방승환이었다. 방수원은 국민학생 시절 잃어버린 동생의 이름인데, 호적 정리를 하던 아버지가 그만 멀쩡히 살아있는 승환의 호적을 말소하는 실수를 범하셨고, 그래서 동생 수원의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현역 시절 해태 투수로 활약하는 것을 본 동생이 야구장에 찾아와 이산가족 상봉에 성공했고, 원래 이름이 방수원이던 동생은 방득원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동아일보 인터뷰
깡마른 외모가 마치 원숭이나 외계인을 연상케 한다며 혹성탈출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 바로 전날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무등경기장을 찾았다.[2] 홀드 제도가 늦게 도입된 것이 아쉬운 대표적 선수로는 송유석차명석이 있다.[3] 불암콩콩코믹스에서는 김병현이 군인에게 법규를 시전하는 걸로 묘사된다.[4] 한 타자만 잡으면 세이브 기록이 눈앞이라 그랬다고. 2루까지 도망갔다고 한다. 김응용은 너무 창피해서 다음부턴 투수교체 때 투수코치를 올리고 본인은 마운드에 잘 안올라갔다고 한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당시에는 이기는 것에만 몰두했지 선수 개인기록을 챙겨주지 못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자신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