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석
1. 소개
前 해태 타이거즈, LG 트윈스, 한화 이글스의 투수. 프로야구 초기 노예이다. 별명은 마당쇠.
2. 해태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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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대표적인 별명은 마당쇠였는데, 그 이름대로 중간계투, 마무리도 했고 땜빵 선발로 롱미들맨도 하는 등 그야말로 보직을 가리지 않고 투입된 투수였다. 정현욱에 앞선 원조 노예.
본래 창던지기 선수를 하다가 야구로 전향했던 탓에 투구 폼이 특이했다. 다른 선수들이 공을 던진다는 느낌이었다면 송유석은 창을 던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공을 내리꽂는다'''라는 느낌으로 던졌다.[3] 게다가 앞발을 굉장히 힘차게 내딛었다. 이런 특이한 동작 때문에 타자들은 타이밍을 맞추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신고선수로 입단한 뒤 배팅볼 투수로 뛰면서 실력을 가다듬다가[4][5] 1987년에 1군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1990년부터 많은 이닝을 소화하기 시작, 1991~1995년에 전성기를 맞아 이 시기에 5년 연속 110이닝 이상을 투구하면서 해태 투수진의 허리를 책임졌다. 1991년과 1993~1995년에는 주로 구원투수로 나오면서도 10승을 올리는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간간이 보조 선발로 나오기도 했지만 선발 출장 횟수는 10번을 넘긴 적이 1993년을 제외하곤 없었다. 마무리를 하던 선동열에 앞서서 나왔기 때문에 현대 야구의 개념으로 따지자면 셋업맨이 되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보직이 없었으니... 뒤늦게 생긴 홀드 제도의 빛을 못 본 케이스.
특히 1993년,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송유석은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이날 삼성은 에이스 박충식, 해태는 문희수를 선발로 예고했는데 김응용 감독은 문희수가 불안하다고 판단해 3회 2사 1,2루에서 문희수를 강판하고 선동열을 등판시켰다. 삼성 팬들의 눈에 가시 같았던 선동열은 기대대로 잘 던졌지만 승부는 길어졌고, 결국 연장 10회말까지 7과 3분의 1이닝을 호투하고 내려갔다. 선동열이 내려가는 순간 삼성팬들은 승리를 예감하고 환호를 질렀지만...
11회에 등판한 선수는 바로 송유석. 특이한 폼 때문에 전날 온 비로 인해 마운드에서 미끄러질 우려가 있었던 송유석은 땅이 거의 다 마른 상황에서 등판해 15회까지 무실점 투구를 보여주며 비록 팀이 승리하지는 않았어도 패배하지도 않게 호투했다. 당시 해태와 삼성은 1승 1패를 주고받은 상태였고, 삼성은 선발 박충식이 불가사의한 투혼을 발휘해 구원투수를 쓰지 않고 연장 15회까지 완투시켰다. 만약 여기서 해태가 졌다면 한국시리즈의 판세가 삼성에게 기울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송유석의 5이닝 무실점 호투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6]
선동열이 빈볼 투수의 조건에 대해 밝힌 바 있는데, 배짱과 제구력 그리고 연기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과거에는 송유석이 그런 투수였으며, "송유석은 두둑한 배짱을 지닌데다 뛰어난 제구력까지 갖고 있었다"고 평가한 뒤 "타자와 몸쪽 승부를 즐겼는데 가끔 몸에 맞는 공을 던지기도 했다. 그래서 고의로 몸을 맞춰도 표가 안났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송유석은 1996년 시즌을 마친 후 LG 트윈스로 최향남, 동봉철과 함께 최훈재, 조현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 원인은 1996년 2월 하와이 전지훈련에서 일어났던 항명사태. 이때 송유석은 이순철, 조계현, 정회열, 이건열과 함께 야구를 그만두겠다면서 짐을 싸는 데 동참했고 그 결과 김응용 감독에게 찍혀 트레이드된 것이었다.
3. LG 트윈스 ~ 한화 이글스 시절
LG에서도 중간계투로 그럭저럭 활약해주었지만,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말 그대로 불을 지르기도 했었다.[7][8] 그 뒤 1999년에는 LG 트윈스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시즌 후 FA를 신청했지만 방어율이 4.72로 불안정해[9] 노쇠화의 기미가 보였고, 과거 혹사 덕분에 성적이 하락세를 탈 것으로 보여 FA시장에서 FA 미아가 되어 LG와 1년, 연봉 5000만원에 울며 겨자먹기로 계약했다. 해태 시절 팀 동료인 이강철이 3년 8억이라는 FA계약으로 삼성에 이적한 것을 생각하면 안습(......)[10]
하지만, LG 구단에서는 송유석을 쓰지 않고, 2000년 시즌 개막 전에 최익성을 상대로 신국환과 묶어서 한화로 트레이드했는데, FA를 신청했다는 것, 그리고 다른 베테랑인 김기범과 같이 선수협에 우호적이었다는 점에서 구단에게 밉보였던 것이 크다.
당시 불펜진이 시망이던 한화로 이적했고, 2001시즌은 1군 4경기 3이닝 12점대 방어율을 찍었고 그해 6월에 웨이버 공시되었다. 그 뒤 소속팀을 찾지 못했고 그대로 은퇴하게 된다.
4. 은퇴 후
은퇴 이후 건설업과 숙박업에 종사하였다. 광주 CMB의 야구 해설가로 경력도 쌓았다. 한편 타이거즈 OB회 총무도 담당하고 있다.
그의 아들 송원호 군도 배명고에서 선수생활을 했으며 아쉽게도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고 동국대에 진학했으나 중도에 야구를 쉬었다. 2013년 KIA 타이거즈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가 그 해 방출되었다. 2017년에 KBO 심판이 됐다.
그리고 같은 학교 후배인 김진우에게 싱커를 전수해주었다고.
5. 역대 성적
[1] 옆에 서있는 사람은 선수 시절 동료였던 박철우 두산 베어스 코치.[2]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교됐다고 한다.[3]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인 팀 린스컴의 투구동작 역시 투창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실제로 비슷한 편.[4] 같은 팀의 고참 김성한이 타격감에 문제가 있을 땐 당시 송유석을 일찍 불러서 배팅볼을 던지게 하고 짬뽕 한 그릇을 사줬다고 한다. 땀과 눈물의 짬뽕을 먹으며 제구력을 갈고 닦아 주축 투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5] 배팅볼 투수로 뛰다가 자신만의 폼을 다듬은 뒤 기량이 만개한 것은 한용덕도 같은 사례다.[6] 다음날의 4차전에서 삼성이 승리했던 것을 생각할 때, 이 3차전에서 해태가 졌다면, 연속우승 신화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었다. 1승 1무 2패와 1승 3패는 확실히 의미가 다르다.[7] 다만 천보성 감독이 한국시리즈 매 경기마다 송유석을 등판시켰고, 정규시즌에서만 100이닝 가까이 소화한 30대 초반의 불펜투수가 가을야구에서도 혹사당한 걸 생각해보면, 한국시리즈까지 잘 하기는 쉽지는 않다.[8] 그래도 5차전에서 무실점 세이브를 챙겼다.[9] 다만 1999년에 LG 투수진이 박살 난 걸 생각해보면 차라리 재계약을 하는 게 나을 지도 몰랐다.[10] 정작 이강철은 삼성에서 7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선발, 불펜 어디에도 쓸모없는 선수였다. 결국 2001 시즌 중반에 다시 기아 타이거즈로 이적했으며 2002~2004시즌은 핵심 불펜으로 뛰면서 통산 150승을 달성하는 등의 활약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