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
1. 개요
KIA 타이거즈 지역팜이자 한국프로야구 선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고교 야구부다. 2020년 기준으로 졸업생 총 169명이 프로야구팀 유니폼을 입었다. 또한 한국에서 가장 많은 4명의 메이저리거를 배출한 한국 최고의 야구명문고 중 하나이다.
한국 한정이 아니라 아시아, 미국, 세계로 확장해도 메이저리거를 4명이나 배출한 고등학교는 흔하지 않다. 아직 강정호가 메이저에 진출하지 않아 3명이 진출했던 상태였을 때에도 이게 특이하게 받아들여졌는지 미국 신문에 특집 기사로 올라온 적이 있었으며, 강정호 메이저 진출 이후에는 뉴욕 타임즈에서 광주일고로 취재를 왔을 정도.
연고구단은 KIA 타이거즈이지만, 의외로 키움 히어로즈 소속 선수들도 꽤 있다. 이 때문에 2013년도 이후로 두 팀이 붙으면 말 그대로 동문회 수준이다.[6]
2. 연혁
2.1. 태동
광주일고가 광주서중이던 시절부터 야구부가 있었고, 이 야구부는 1949년 대형 사고를 쳤다. 당시 전 대회를 평정하던 경남중학교의 장태영과 맞서서 극적인 승리를 따낸 것. 그 선봉장은 철완이라 불린 김양중이었고, 1949년 청룡기 결승전에서 9회 2아웃까지 0:1로 뒤지다가 상대 실수로 만든 2사 2루의 찬스에서 김양중의 적시타로 동점을 만들었고, 다시 연장 11회말 볼넷으로 얻은 무사 1루의 기회에서 보내기 번트가 전진 수비를 한 내야수의 키를 넘어 외야로 넘어가고, 당황한 경남중의 좌익수가 공을 잡고 3루로 던진 것이 3루 베이스를 맞고 튀면서 끝내기 점수를 내며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리게 되었다. 이 때의 결승전을 보통 고교야구 최초의 명승부로 꼽는 편이다.
그리고 이 우승 이후, 호남야구는 20년 가까운 시간을 침묵하게 된다. 대규모 인구 이동 및 야구 저변이 얇았던 탓이 원인으로 보이는 이 침묵의 시간 동안 광주일고의 이름도 없었다.
2.2. 침묵의 종결
1975년 대통령배 결승은 광주일고도 오랜 침묵을 깬 결승이었다. 군산상고로부터 시작이 된 호남야구 부활의 바람은 광주일고에게도 그대로 옮겨와 대회 사상 최초로 결승전 3연타석 홈런을 날린 김윤환의 활약과 투수 강만식의 호투 속에 당시 막강했던 경북고를 제압하고 첫 우승에 성공하면서 광주일고의 이름을 다시 알렸다. 그리고 꾸준히 1970년대 4강권 팀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 괴물투수 선동열의 등장으로 고교야구의 최절정기에 광주일고는 다시금 우승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대통령배에서 선동열을 앞세워 동향의 광주상고를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했지만, 5.18 민주화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뭔가 꼬이게 되었고, 결국 1980년 봉황대기에서는 중앙고에게 일격을 당하고 2회전 탈락하더니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선동렬이 박노준에게 홈런을 맞고 물러나면서 선린상고에게 3:5 패배를 당하며 단 한 차례의 우승으로 만족해야 했다.
2.3. 1차 전성기(1983년)
1983년 광주일고는 고교야구를 평정했다. 에이스 문희수와 투타만능의 박준태라는 대들보 두 명에 카리스마 넘치는 주장 김성규와 유격수 김선진이 이끄는 탄탄한 내야수비까지. 정말 전력이 막강했던 광주일고는 1983년 시즌 개막과 함께 세광고를 한 점차로 제압하고 대통령배 우승에 성공했다. 청룡기에서는 북일고에 일격을 맞으며 탈락했지만, 봉황대기에서 포철공고를 두 점차로 따돌리고 우승에 성공하더니 마침내 황금사자기에서 대구고마저 누르고 우승에 성공하며 한 시즌 3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 때의 멤버들이 졸업한 후에도 언더핸드 에이스 이강철이 등장하며 1984년 황금사자기를 석권하면서 그들의 전성시대가 화려했음을 다시금 보여줬다.[7]
2.4. 공백기
공백기라고 하지만 우승이 없었다는 점은 아니고, 1988년 청룡기에서 이종범을 앞세워 우승을 차지했고, 1995년 청룡기에서 김병현을 내세워 역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공백기로 볼 수 있는 것이 이 시기에 배출한 선수들의 화려한 면면을 볼 때, 우승 횟수가 다소 아쉬웠기 때문이다.
특히 고교야구의 어벤저스, 전설의 92학번이 고3이었던 1991년 청룡기와 황금사자기에서 모두 결승에 올랐지만 각각 경남상고와 신일고에게 무릎을 꿇으며 정상을 놓친 것은 가장 아까운 순간이었다. 당시 박재홍과 김종국이 이끌던 광주일고[8] 의 전력은 충분히 강했지만 돌풍을 일으킨 김건덕의 경남상고와 팀 역사에 손꼽히는 전력을 구축한 조성민-설종진의 신일고에게는 한 끗 차이로 미치지 못했다.
1997년도 마찬가지였는데 최희섭-송원국-이현곤-정성훈이라는 최강의 내야 라인업을 구축했지만, 투수력이 미치지 못해[9] 신일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 1회에 그친 것도 아쉬운 대목.
이 시기에 나온 선수들 중 이름있는 선수들만 조금만 추려봐도 이종범, 박재홍, 김종국, 이호준, 최희섭, 김병현, 서재응, 게다가 이제는 감독이 된 염경엽, 김기태 등등. 그걸 여기다 쓰기에는 위키의 여백이 너무 좁다.
2.5. 제 2의 전성기(2002~2010)
광주일고는 2002년 다시 고교무대 정상으로 돌아왔다. 당시 고교 무대 쌍벽을 이루던 투수[10] 김대우와 고우석, 오준형, 이대형, 이들의 1년 후배 모창민이 모두 한 팀[11] 이었던 점만으로도 그 강력함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비록 천안북일고와 고교 무대를 나누는 통에 우승은 두 번으로 만족[12] 해야 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광주일고의 전성기는 충분히 돌아왔다.
그리고 그 전성기는 에이스 나승현과 주장이자 4번타자인 강정호를 축으로 2005년 황금사자기에서 우승하면서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뛴 선수들이 나승현, '''강정호''', '''서건창''', [13] , 김성현, 김강 같은 선수들이 뛰었던 시절로 봉황대기 결승에서 배장호가 이끌던 유신고에게 일격을 당해 우승을 놓친 것이 아쉬울 정도의 멤버였다.
이들이 대부분 졸업한 후에는 3학년 정찬헌과 2학년 장민재를 에이스로 삼아 2007년 대통령배 결승에서 서울고등학교의 에이스 이형종의 눈물을 이끌어 내면서 서울고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우승에 성공했으며,[14] 2008년에는 정성철과 장민재(당시 장민제)를 앞세운 투수진으로 황금사자기 우승에 성공했다. 2009년 심동섭과 유창식으로 봉황대기 준우승의 아쉬움(천안북일고의 김용주에 패배)은 2010년 고교최대투수 유창식 고교최대야수 허일과 함께 장충고를 꺾고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하면서 깨끗하게 아쉬움을 털어냈다.
2.6. 침체기(2011~2016)
광주일고는 유창식의 졸업 후에도 분명 호남지역 주말리그에서는 강세를 보이지만, 전국 무대에서는 그 위세가 약간 우승권 아래 정도로 내려간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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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다가 2013년과 2014년 2년 연속으로 대통령배 4강 진출에 이어 2015년 같은 대회 결승전에서 성남고와 연장 11회까지 접전끝에 우승을 차지하며 다시 위상을 높였다.[15] 2016년에는 주춤했으며 같은해 10월 김선섭 감독에서 성영재 감독으로 감독 교체가 있었다.
2.7. 예전의 명성을 찾다(2017~)
성영재 감독이 팀 전력을 재정비하고 시작한 2017년 봉황대기에서 준결승전까지 진출했으나 신입생 안인산이 투-타 양면에서 맹활약한 야탑고에게 5-7로 무릎을 꿇었다.[16]
2018년 황금사자기에서는 북일고, 덕수고, 경남고 등 강팀들을 차례로 꺾고 결승에 올라 대구고에 10:2로 승리하며 이 대회 통산 6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우승후보는 아니고 8강권 정도로 평가받았으나 매게임 선전하며[17] 성영재 감독의 첫 전국대회 우승을 일궈냈다.
주말리그 전후반기와 황금사자기, 청룡기 1회전까지 2018년도 전적 20연승을 달렸으나 2회전에서 강릉고에 4-5로 패하며[18] 연승을 마감했다. 대통령배에서는 대구상원고, 마산용마고, 부산고를 차례로 격파하고 4강에 올랐으나 준결승에서 경기고에게 6:7로 역전패[19] 했다. 2018년 전국체육대회에서 마산용마고를 결승전에서 격파하고 12년만에 전국체육대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20]
2019년 첫 전국대회인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2회전에서 화순고, 16강전에서 휘문고를 차례로 꺾었고 8강전에서는 지역 라이벌 동성고에 9-1로 승리하며 4강에 올랐으나 유신고에 0-1로 패하며 2년 연속 우승은 달성하지 못했다. 청룡기에서는 예상 외로 강릉고에 0-7 콜드게임패를 기록하며 탈락했다. 광주제일고가 전국대회에서 콜드게임패를 기록한 것은 2001년 봉황대기 1회전에서 휘문고에 6-18로 패한 이후 거의 18년 만의 일이다. 대통령배에서는 8강까지 진출했으나 충암고에게 4-6으로 패배했다. 봉황대기에서는 16강전에서 인천고에게 패배 직전의 위기까지 몰렸으나 9회말 한지운의 천금같은 역전 끝내기 안타로 8강전에 진출했다. 그러나 8강전에서는 작년 대회부터 광주일고의 천적으로 급부상한 강릉고와 대결했으나 3-8로 패배하면서 강릉고를 고비때마다 넘지 못하고 있다.강릉고 4강행 문턱…광주제일고 또 넘는다 그리고 2020년 첫 대회인 황금사자기 첫 판에 강릉고를 만나 0-5로 패했다.그리고 협회장기마저 첫판에서 서울고를 만나 1-8로 대패하며 탈락했다.이후 2020년 마지막 대회인 봉황대기에서도 1회전에서 야탑고등학교한테 7:8로 패하며 탈락했다.
2.8. 여담
경남고등학교 야구부와 더불어 유니폼 디자인이 바뀌지 않는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위의 사진을 봐서도 알겠지만 선동열이 고등학생일 때나 현재나 유니폼의 모습은 똑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광주일고' 글자의 폰트 차이 정도 뿐이다.
2010년대 들어서 야구 유망주들의 경우 동문회나 사립학교 재단의 지원이 좋아서 야구 회비가 적게 들어가는 수도권 명문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아서(그러나 매년 선수 정보를 검색하면 생각보다는 적다.) 과거와 달리 선수 구성이 힘들다고 한다.[21][22] 하지만 2018년부터 광주광역시야구협회장과 인맥이 닿게 된 료유빵[23] 키타무라 슌사쿠 회장의 지원으로 수도권 지역 야구부처럼 후쿠오카현 이토시마시 훈련장에서 해외 전지훈련을 갈 수 있게 되었다.관련 기사[24]
2019년 당시 코칭스태프는 성영재 감독 그리고 송원국, 한희, 채선관, 조성원[25] 이렇게 4명의 코치로 구성되어 있다. 한희 코치만 군산상고를 졸업했고 나머지는 모두 광주일고 동문이다. 한희는 아직 정식 등록 코치는 아니다. 송원국 코치는 안산공고 감독직을 수락하며 팀을 떠났다.
그동안 1시즌 이상 정식 감독으로 재직한 KBO 리그 1군 감독 중 이 학교 출신이 무려 4명으로 가장 많다.[26] 선동열, 이강철, 김기태, 염경엽이 그 주인공. 다만 선동열과 김기태는 나란히 고향팀 KIA 타이거즈의 감독을 맡았다가 불명예를 떠안았고 염경엽 역시 넥센 감독 시절부터 여러 논란을 안고 있다. 이강철은 부임 첫 해 소속팀 kt wiz를 창단 후 최고 성적인 6위까지 이끌었으나 장기적인 감독의 역량 평가는 두고 봐야 할 문제다.
3. 야구대제전
- 역대전적 : 6승 4패(부전승 1승 포함)
- 최고기록 : 우승(2014 야구대제전)
그후 2013년 야구대제전에서는 20강 조별예선에서 탈락했고, 2014년 야구대제전에서는 천안북일고, 상원고(6:5), 배명고(3:2), 군산상고(9:2)를 차례로 격파하고 결승까지 진출, 홈그라운드인 마산 용마고를 꺾고 첫 우승을 기록했다. 서건창, 이호준, 김대우등 프로선수들이 대거 참가한 것이 주요했으며 김대우는 야구대제전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우승상금 1000만원은 야구발전기금으로 사용할 예정.
2015 야구대제전에서는 인천고등학교에 6:4 패배를 당하며 16강 탈락.
4. 출신선수[28]
5. 대중매체에서
- 응답하라 1997과 응답하라 1994에서 두 명의 성동일이 졸업한 모교 야구부로 나왔다. 이 둘은 고교시절 선후배관계라고 하며, 성씨의 본관이 하나여서[39] 먼 친척 사이라고 한다.
-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도 김제혁과 이준호가 광주일고 야구부 출신으로 나온다.
- 서울촌놈에서 게스트로 나온 김병현의 모교 야구부로 소개되었다.
- 영화 스카우트에서 선동열이 나왔다.
6. 이야깃거리
2017년 베어스포티비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당시 두산 베어스 선수단이 광주일고 운동장에서 연습을 종료한 이후 허경민 선수가 후배들을 위해 아이스크림을 사기도 했다.[40]
훈련 시작 전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탑을 향해 묵념을 한다. 또한 전국대회 출전을 위해 상경 前 탑에 들러 참배를 하는 전통이 있다.
KIA 타이거즈와 SK 와이번스의 외국인 투수였던 아킬리노 로페즈가 한 때 네이버 인물검색에 광주일고 출신으로 잘못 기재된 바 있었다. 자세한 것은 로페즈 문서 참고.
[1] 4대 메이저 + 협회장기[2] 당시 우승한 광주일고 보다 더 주목을 받은 선수가 상대팀 서울고의 이형종 투수다. 9회 동점타와 역전타를 맞은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보는사람을 짠하게 만들었다. 현재 LG트윈스에서 타자로 전향해 활약중이다.[3] 나무위키에 등록된 선수만... 졸업 연도 순.[4] 이 사진은 2007년 대통령배 결승전 우승 사진이다.[5] 넥센 히어로즈에 소속되어 있던 한 명 빼고 전부 같은 야구단을 거쳤다.[6] 2013년에 이 학교 출신인 선동열과 염경엽이 양 팀의 감독이 되면서 정말 동문회가 되었고, 2015년에 선동열의 후임으로 염경엽과 동기동창인 김기태가 감독이 되면서 다시 한번 동문회 시리즈를 이어나간다. 게다가 2016년에는 히어로즈 수석코치+기아 타이거즈 2군 감독도 모두 광주일고 출신.[7] 저 중에서 이강철 정도만 프로에서 성공했다. 김선진은 그저그런 대타요원 정도였고, 박준태도 고교시절과 달리 프로에서는 봄에만 반짝하는 봄숭용의 원조로만 남았다. 오히려 고교시절에 안유명한 어느 성님이 성공을 거두었다...[8] 광주일고의 타격코치와 감독을 맡았던 김선섭은 이 둘의 동기생이기도 하다.[9] 당시 광주일고에는 좌완투수 김광우가 있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LG에 입단했으나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비교적 일찍 은퇴하였다. 은퇴 후 광주일고 투수코치로 부임하여 정찬헌, 장민재, 심동섭, 유창식을 키워낸 실적을 인정받아, 고려대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겼다.[10] 정작 김대우와 고우석 모두 프로에서 실패했다. 특히 고우석은 2003년에 1차지명으로 뽑혔으나, 2군에서만 있다가 은퇴했고, 김대우는 프로에서 투수로는 실패하고 타자가 되었는데, 2할 5푼도 못 치고 있다가 다시 투수로 전향했다.[11] 2002년 당시 라인업은 투수/1루수 김대우(고우석), 2루수 윤드로, 3루수 모창민, 유격수 김주호, 외야수 이창석-이대형-서정[12] 첫 번째 대회였던 대통령배와 두 번째 대회인 청룡기를 광주일고가 차지했고, 바로 다음 대회인 황금사자기-화랑대기-봉황대기를 천안북일고가 가져갔다.[13] 2005년에는 중학생이었다(...)[14] 이 경기가 마지막으로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고교야구였다. 이 경기가 열리던 날, 수업을 2교시까지만 하고는 바로 중단한 뒤 학교 전체가 교사진이 부른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서 응원, 새벽에 복귀. 다음날 늦게 등교까지 하며 단축수업을 했을 정도로 이 날의 경기는 당시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있어서 중요한 경기였다.[15] 비가 내리지 않던 경기 초반에는 양 팀 모두 수준급의 경기력을 선보였으나,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실책들이 양산됐다. 게임을 도저히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렸으나 결승전 바로 다음날부터 목동 야구장에서 넥센 히어로즈의 프로야구 경기가 있어서, 경기를 강행했다. 11회말 성남고 3루수 이동규(LG 트윈스 입단)가 내야 플라이를 낙구하면서 주자가 홈인했고 그대로 경기가 끝났다. 판정 시비가 있어서 성남고 응원석에선 오물을 그라운드로 투척하기도 했고, 성남고-광주일고 선수들간 마찰도 있었다.(성남고 이동규가 광주일고 선수의 목을 손날로 치는 아찔한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16] 이 대회에서 야탑고가 창단 후 첫 메이저 전국대회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결승전에서 심판의 오심 덕을 보기도 했다.[17] 8강전 덕수고와의 경기는 백미. 경기 후반에 힘겹게 역전승에 성공했다.[18] 패배 후 인터뷰에서 다소 방심했다고 자평했다.[19] 경기고는 대구고에 결승전에서 패하며 대통령배 첫 우승에 실패하고 준우승만 3번을 기록했다. 대구고는 내심 황금사자기 결승전 리매치을 꿈꾸며 광주일고가 올라오길 바랐다고 한다.[20] 결승전에서 주장 김창평은 상대 타자의 배트가 부정배트인지를 확인해달라고 성영재 감독에게 요청했고 성영재 감독은 제자가 마지막 고등학교 공식경기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높이 평가했다.[21] 2016년 5월 20일 라디오볼 홍희정 기자의 발언[22] 이종범 아들의 경우는 돈 문제라기 보단 동생의 교육(예술중/고교 진학)문제 등 여러 이유가 겹쳐 있는 것으로 보이며, 예술분야는 서울에 교육인프라가 집중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23] 큐슈 지역의 유명 제빵업체로, 사회인야구팀과 유소년 야구팀을 운영 중. 한국에서는 '요유빵'으로 진출해 있으며, 동대구역 근처와 마포역 근처에 지점이 있다.[24] 김병현이 인스트럭터로 전지훈련에 동행했는데 김병현만 등장해도 선수들이 한숨을 쉴만큼 강한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25] 광주일고 재학 당시 포수 마스크를 썼고 장타력이 주무기였다. 나승현, 강정호, 김성현(1987)과 동기로 2005년 드래프트에서 2차 4지명 31순위로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했다가 프로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방출됐다.[26] 두 번째로 많이 KBO 리그 감독을 배출한 학교는 부산의 명문인 경남고다. 이쪽은 박영길, 허구연(!!!), 김용희, 이종운이다. 다만 허구연은 1986년 시즌 도중 경질됐기 때문에 1시즌이라도 풀타임 시즌을 지휘한 감독 숫자로만 치면 3명이 된다. 아울러 우승 감독 2명을 배출한 광주일고와 달리 경남고 출신 감독 중에서는 1명도 우승 경험자가 없으며 준우승 경험자만 2명(박영길, 김용희)다.[27] 참고로 제2회 야구대제전 부터는 현역 고교야구 선수 출전 금지조항이 만들어져 고려대에 입학한 1981년에 선동렬을 대회에 투입할수 있었다.[28] 나무위키에 등록된 선수만... 졸업 연도 순.[29] 이중계약으로 한국화장품 야구단에 입단해 1985년 한국실업야구 시범경기까지 뛰었으나 1985년 후기리그부터 해태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30] 특이하게 현역시절 선수로서는 안습을 넘어서 그냥 말이 안 나왔었는데, 감독된 후 대박친 케이스.[31] 1993년 신인드래프트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에 지명받았으나 쌍방울 레이더스는 정영규의 지명권+트레이드 머니로 삼성 라이온즈의 신경식, 김성길과 맞트레이드 했다. 그래서 첫 데뷔경기는 삼성 라이온즈의 유니폼을 입고 기록했다.[32] 지명은 해태 타이거즈가 지명했다. 그러나 박재홍은 현대 유니콘스와 밀약을 맺고 해태 타이거즈 입단을 거부한다. 그후 해태는 그를 트레이드 카드로 현대에 보내주게 된다.[33] 1998년 1차지명을 해태 타이거즈가 했으나 곧바로 해외진출 했기에 무산되었다.[34] 특이하게 야구부가 아니라 '''고려대 법대'''에 입학했다. 물론 해외 진출로 입학하자 마자 자퇴했다.[35] 2012년 김남석에서 개명.[36] 2013년 말 장민제에서 개명.[37] 지명 당시는 투수였으나, 2017년에 타자로 전향했다.[38] 2017년부터 2020년까지도 KIA에 있었으나 이 때는 불펜 포수로 활약했고, 2021년 불펜 포수에서 정식 포수로 전환되었다.[39] 실제로 국내의 성씨는 창녕 성씨 단본이다.[40]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김창평 선수(등번호 16번)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