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한국시리즈
1. 개요
1983년 10월 15일에 시작해서 10월 20일에 종료된 한국시리즈. 4승 1무로 해태 타이거즈가 첫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시리즈 MVP는 교통사고 후유증을 딛고 한국시리즈에서 맹타를 휘두른 김봉연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해태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진출시 100% 우승공식의 시작이기도 하다.
MBC 청룡의 내분으로 인해 자멸한 시리즈이기도 하고 경기 내용 또한 태업성 플레이가 겹치면서 졸전에 가까운 플레이가 많았다. 해태 타이거즈도 이 시리즈 이후 유명한 '''불고기 화형식 사건'''이 벌어지는 등, 이래저래 경기 자체보다는 경기 앞 뒤의 에피소드가 더 유명한 시리즈다.
2. 시리즈 전 상황
2.1. 해태 타이거즈
원년에 선수 부족에 시달리면서 4위를 차지한 해태는 김응용 감독의 취임 이후 김응용의 지도력에 더해 재일교포 포수 김무종이 안방을 책임지고, 이상윤과 주동식이 팀의 투수진을 구축하면서 선두권을 형성했다. 그러나 장명부의 괴력을 앞세운 삼미 슈퍼스타즈에 내내 끌려다니다가 6월에 열린 홈 3연전에서 김성한의 완봉승에 힘입어 모두 싹쓸이하면서 역전에 성공,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후기리그에서 페이스를 조절하며 통합 성적 2위를 차지한 해태는 김봉연을 축으로 한 타선이 장점이었지만, 그 김봉연이 전기리그 종료 후 휴식기간 중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얼굴을 백여바늘 꿰매는 중상을 입었고,[1] 그 후유증으로 타선의 폭발력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2. MBC 청룡
후기리그에서 삼미를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한 MBC는 전력 자체는 탄탄했다. 원년에 참가하지 못했던 김재박이 가세했고, 투수진 자체도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다. 하기룡, 오영일, 이길환 같은 선수들은 특급은 아니어도 언제든 팀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준척들이었고, 타선도 짜임새가 있던 편이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속은 곪아가는 중이었다. 후기리그 우승 보너스를 둘러싸고, 구단 수뇌부와 김동엽 감독, 선수 간의 3자 갈등이 있었던 것. 후기리그 우승 당시 김동엽 감독이 1인당 5백만원의 보너스를 약속한 것을 두고, 구단 수뇌부에서는 한국시리즈 우승이라고 생각하며 후기리그에는 1백만원만 지급했다. 여기에 선수들은 후기리그 우승 보너스가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을 두고 불만을 품었다. 원래 구단의 지원+개인의 사비를 털어 지급할 계획이었고, 실제로 이를 미끼로 선수들을 독려한 김동엽 감독은 보너스가 적게 나온 것을 두고 구단에 실망하고, 한편으로는 보너스 때문에 야구를 하는 것처럼 보인 선수들에게도 실망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게 되었다.
2.3.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한 한국시리즈 연기
후기리그는 원래 10월 5일 종료되었지만, 전국체전이 10월 6일부터 11일까지 열리면서 10월 12일에 시작하기로 결정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10월 9일 미얀마에서 일어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17명의 각료가 순직하는 대참사에 따라 애도 기간이 설정되면서 한국시리즈 또한 미뤄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10일을 미뤄서 10월 22일에 시작하려던 한국시리즈는 3일간의 애도기간만을 가진 후 10월 15일에 시작되었다.
중간의 애도 기간동안 MBC는 훈련을 하지 않았는데 "대통령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판에 야구단 마크가 그려진 버스를 타고 왔다갔다 하는 게 남들의 눈에 안좋게 보이지 않겠느냐"라고 구단 차원에서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훈련을 하지 못 했다.
그리고 그 갈등의 골이 깊어진데는 비극적인 참사로 인한 한국시리즈의 연기가 원인으로 작용했다. 갑자기 생긴 휴식기 동안 갈등이 수습되지 않은 것이다. 청룡이 후기리그 우승의 여세를 몰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할 수있을 것이라던 당초 예상이 빗나가는 변수가 되었다. 이 때문인지 세간에서는 "해태 우승의 숨은 공로자는 김일성"이라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한국시리즈에서 대결한 양팀의 감독 김응용, 김동엽은 모두 이북 실향민 출신이었다.[2]
3. 엔트리
3.1. 해태 타이거즈
3.2. MBC 청룡
4. 경기 결과
4.1. 1차전
1차전 하이라이트
MBC의 선발은 에이스 하기룡도 아니었고, 예고했던 이광권도 아닌 오영일이었다. 이 깜짝수는 그러나 실패로 돌아갔다. 여기에는 해태의 행운이 따랐다. 1회말 무사 1, 2루에서 3번 김성한이 친 타구는 평범한 3루 땅볼로 병살이 될 것처럼 보였지만, 부러진 방망이가 3루로 튀면서 그만 MBC의 3루수 이광은이 공을 잡는데 실패한 것이다. 그러면서 맞은 무사 만루 위기에서 오영일은 김봉연을 삼진으로 잡으면서 위기를 넘기는가 싶었지만, 5번 김종모가 친 타구는 3루 베이스를 맞고 굴절되면서 2루타가 되었다. 결국 이 때문에 1회 3점 실점했다.
문제는 이거까지는 괜찮았는데, MBC의 김동엽 감독의 전술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기용의 연속이었다는 것에 있었다.[3] 깜짝 선발로 흔들려던 의도가 실패했다면 당연히 하기룡이든 이길환이든 MBC의 괜찮은 투수 물량을 이용해야 했는데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오영일은 이 날 7실점을 하면서 완투패를 하는데, MBC가 7회와 9회 2점씩 내면서 추격을 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투수 운용으로 스스로 경기를 헌납한 것이었다.
1983년 20승을 거두며 해태의 에이스로 등극한 이상윤은 9이닝을 4실점으로 버티면서 완투승을 따내며 해태가 시리즈 첫 승을 거두는데 크게 기여한다.
4.2. 2차전
중계방송사는 KBS 1TV.
해태는 팀의 2선발인 재일교포 출신 주동식을 내세웠다. 그런데 MBC는 여기서 또 하기룡 대신에 좌완 계투인 유종겸을 올렸다.
MBC가 먼저 기세를 올렸다. 2회말 1사 2,3루의 찬스를 잡은 것. 그러나 여기서 3루 주자 송영운이 해태 포수 김무종의 견제구에 걸려 아웃되면서 기회를 날리고 만다. 한 숨 돌린 해태는 3회초에서 대타 양승호의 2루타로 2점을 내면서 기선을 잡았다. MBC가 4회 연속 3안타로 1점을 내자 해태의 김응용 감독은 바로 주동식을 내리고 김용남을 올려 불을 껐다. 그리고 5회초 볼넷 3개와 상대 실책 2개를 묶어 2점을 내면서 4:1로 도망갔다. 그리고 7회초에는 김봉연에게 희생번트를 지시하는 초강수를 던지며 1점을 도망가는데 성공했다.
이 희생번트를 통한 1점은 상당히 컸는데, 7회말 MBC가 3점을 내면서 추격하며 5:4로 따라잡은데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시 김동엽 MBC 감독의 이해할 수 없는 운영이 나왔다. 이미 바꿔도 진작 바꿔야 했던 유종겸을 다시 8회에도 올린 것이다. 지친 유종겸은 결국 8회초에서 해태에게 4안타를 내주면서 3실점했고, 그것으로 승부는 끝났다.
승리투수는 4회 구원 등판한 해태의 김용남, 패전 투수는 8실점 완투패를 기록한 유종겸. 김동엽 갑독의 태업에 가까운 운용, 고비마다 나온 선수들의 실책, 주루사와 4차례의 병살타까지. MBC는 태업이 의심되는 자멸에 가까운 플레이로 스스로 무너졌다.
4.3. 3차전
해태는 선발로 주동식을 다시 내보냈고, MBC는 이번에도 하기룡 대신에 이광권을 내세웠다. 에이스 대신에 또 다시 깜짝 카드를 선택한 MBC의 김동엽 감독의 선택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이해하기 힘든 선택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광권 카드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먼저 1회말 해태는 김봉연의 3루 강습 안타로 선취점을 냈다. 그리고 3회말 무사 2, 3루 찬스를 잡은 해태는 바뀐 투수 하기룡을 상대로 김봉연이 3점 홈런을 치면서 4:0으로 달아났다.
MBC도 앞선 두 경기와 달리 무기력하지는 않았다. 6회초 공격에서 김재박의 2타점 2루타와 서정환의 실책을 틈타 3점을 내면서 추격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김재박의 주루 미스로 아웃이 하나 늘면서 흐름이 맥이 끊어지고 만다. 한숨돌린 해태는 7회말 1사 1,3루에서 김봉연의 내야 땅볼로 5점을 내면서 승부의 쐐기를 박았다.
김봉연은 이 날 혼자 5타점을 올리면서 팀 승리의 1등 공신이 되었고, 마운드에서는 6회부터 구원등판한 이상윤이 끝까지 경기를 지키면서 해태는 시리즈 우승에 1승만 남겨놓게 되었다.
4.4. 4차전
중계방송사는 KBS 1TV.[4]
우승을 위해 해태는 다소 무리이기는 했지만 전날 구원으로 나온 이상윤을 선발로 냈고, MBC는 1983년 승률 1위 이길환을 선발로 냈다.
분명 찬스는 해태가 더 많았다. 2회 김봉연의 2루타와 김종모의 안타로 무사 1, 3루의 찬스를 잡으면서 승부를 결정지을 좋은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여기서 김무종의 병살타로 1점을 내는데 그쳤다. 해태는 15회동안 안타 16개와 볼넷 6개를 얻고도 병살타 3개를 치는 등, 타선이 집중력을 잃으면서 경기를 끝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MBC가 잘했냐면 그건 아니었다. 전날 구원으로 나온 이상윤에게 다시 끌려다니면서 8회까지 선발 5안타로 끌려갔다. 하지만 9회말 송영운의 안타로 이상윤을 끌어내리는데 성공한 후, 2사 1, 3루의 찬스에서 대타 김바위의 극적인 동점 적시타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5][6]
그리고 연장 11회말, 1사 1, 2루 상황에서 2루에 있던 이해창이 내야 땅볼 때 과감하게 홈 대시를 하면서 끝내기를 노렸다. 하지만...
홈에 뛰어들다 아웃된 후 허탈해 하는 MBC의 이해창과 "아웃이에요, 아웃" 하면서 웃고 있는 해태의 김무종. 이 장면이 이 날의 마지막 기회였고, 승부는 1:1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4차전 종료 후, 해태 선수들에게 '''호랑이 기운이 솟아날''' 소식이 들려왔다. 해태가 시리즈 우승 시 선수단에 보너스로 1억원[7] 을 풀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긴 접전 끝에 지칠대로 지친 선수들이 없던 힘까지 쥐어짤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4.5. 5차전
전날 혈전으로 투수진이 바닥한 두 팀. 해태는 하루 쉬고 다시 나온 주동식에게 선발을 맡겼고, MBC는 멕시칸리그 출신의 이원국에게 선발을 맡겼다.
그러나 시즌 내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던 이원국은 예상대로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1회말 김일권이 도루와 상대 실책으로 3루 진루에 성공하며 내야 땅볼 때 홈을 밟아 가볍게 선취점. 3회말에는 김성한과 김봉연의 적시타로 2점 더, 5회말에는 김일권의 2타점 2루타로 2점 더 내면서 5:0으로 점수를 벌렸다.
7회초 MBC가 한 점을 추격했지만, 2사 만루 찬스에서 등판한 이상윤이 이해창을 내야 플라이로 잡으면서 추격은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곧바로 7회말에 해태는 대거 3득점하면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9회말 2사에서 김인식을 땅볼로 잡고 5차전에서 낙승한 해태는 이로서 예상을 깬 첫 우승에 성공했다.
5. 기타
- 보너스 문제로 갈등을 빚은 MBC 청룡은 보너스 문제의 중심이 있던 김동엽 감독을 해임하는 것으로 문제를 정리했지만, 그 뒤로 MBC 청룡은 선수단과 프런트, 감독의 3자 갈등이 고질병이 되면서 LG그룹에 인수되기 전까지 PO 진출에 번번이 실패한다.
- 투수진에서 다소 열세였지만 무리에 가까운 운용으로 우승을 따낸 해태는 예상대로 우승 후유증으로 이후 2년 동안 정상과는 거리가 먼 성적을 내었다. 물론 그 뒤로는 프로야구의 신화가 되었지만.
- 우승 보너스로 1억원의 거금을 풀었지만, 해태의 대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듬해인 1984년 시즌, 해태가 선수들의 짭짤한 용돈벌이 수단이었던 메리트 시스템을 폐지하고 원정경기 숙소를 이전보다 낮은 등급의 호텔로 바꾸는 등 오히려 선수들 대접이 더욱 열악해진 것이다. 결국 불만을 품은 해태의 선수들이 주동해서 벌인 것이 그 유명한 불고기 화형식 사건. 1984년 시즌 개막 후 처음으로 맞이한 서울 원정경기가 끝난 후 타이거즈 구단주였던 박건배 해태그룹 회장이 저녁 회식을 베풀었는데 선수단 전체가 불고기에 손을 대지 않고 태워버리는 집단 항명을 벌인 것이다. 결국 심기가 불편해진 박건배 회장은 회식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고 김응용 감독은 노발대발했다. 당시 어느 한 선수가 꼭 주동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정작 어느 누구도 "내가 주도했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으면서 프로야구 판의 이단아 격이었던 김일권이 주동자로 찍히게 된다. 물론 실력이 있으면 악감정은 눈감는 김응용 감독은 이순철의 등장 전까지는 김일권을 주전으로 쓰기는 했다.
- 모든 해설가와 야구 전문가들이 MBC 청룡의 우세를 점쳤지만, 딱 한 사람만이 해태의 우승을 예고하면서 이 해설가는 그 뒤로 해설계의 대표주자로 떠오른다. 바로 환일고등학교 체육교사를 그만 두고 당시 KBS에서 본격적으로 프로야구 해설을 시작한 하일성이었다.[8]
- 2017년 한국시리즈 전까지 선동열과 이종범이 모두 없는 상황에서 타이거즈가 우승을 차지한 유일한 시리즈였다.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1] 그러나 김봉연은 초인적인 의지로 후기리그 막판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그가 사고 때 흉터를 가리기 위해 콧수염을 기른 것도 이 때였다.[2] 특히 김동엽 감독은 38선에서 따온 등번호 38번을 고수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생전에 김동엽은 1983년 한국시리즈 패배를 회상하며 늘 아웅산 사태를 일으킨 김일성을 원망했다는 후문이다.[3] 이에 대해 허구연의 저서 <홈런과 삼진 사이>(1992)는 당시 보너스 갈등으로 자신의 체면이 깎인 것에 심기가 불편해진 김동엽 감독이 작전 지시를 비롯한 경기 운영을 한동화 수석코치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방관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한국시리즈 내내 나타났던 청룡의 무기력한, 개연성이 부족한 경기 운영도 이를 통해 설명되는 편이다.[4] 당일 경기 중계 방송은 이장우 캐스터, 하일성 해설위원이 진행하였다.[5] 이 적시타로 MBC 청룡은 역대 한국시리즈 통틀어 패배와 함께 준우승이 확정되는 벼랑끝 상황을 극복하고 시리즈를 다음경기까지 끌고 간 유일한 사례로 현재까지도 남아있다.[6] 이후 2019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키움 히어로즈가 두산 베어스에 1점차로 지고 있던 9회말의, 준우승 확정 직전 상황에서 동점을 만드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어진 연장승부에서 결승점을 내주고 패하면서 시리즈를 다음 경기로 연장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국시리즈에서 비슷한 벼랑끝 상황에서 시리즈 전체를 뒤집거나 해당 경기에 역전승을 거둔 팀은 아직까지 없다.[7] 정확히는 시리즈 우승 배당금 2천 8백만원+구단 지원금 7천 2백만원. 참고로 이 당시에는 '''강남의 60평 짜리 아파트가 5천만원 하던 시절이다'''.[8] 이후에 방송에서 해태의 우승을 예상한 이유를 '내가 그때 뭘 알았겠어, (평소에 친한 김)응용이 형님이 감독으로 있어서 그냥 그렇게 말한거지'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