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한국시리즈
'''스윙! 아웃입니다! 경기 끝났습니다! 경기 끝났습니다. 해태 타이거즈가 빙그레 이글스에게 4:1로 승리를 거두면서 88프로야구 패권을 차지했습니다. 해태 타이거즈 4:1로 승리! 해태 타이거즈, 이번 88 패권을 차지함으로써 한국시리즈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합니다.'''
중계진 우승콜
1. 개요
198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6일까지 펼쳐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로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하면서 통산 4번째 우승이자, 최초의 3연패를 달성한 시리즈다. 삼성 라이온즈가 2013년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며 3연패를 가져가기 전까지 25년동안 깨지지 않았던 기록이다. 그야말로 해태가 당대 최강자로서의 위엄을 과시한 시리즈. 1986년과 1987년이 제도의 허점 때문에 해태가 유리했다는 말을 전후기 통합 우승 및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그런 말을 들어가게 만들었다.
시리즈 MVP는 1차전 세이브와 3차전 완봉승, 6차전 완투승을 거두면서 2승 1세이브로 맹활약한 문희수다.
1차전~ 6차전 하이라이트 영상
2. 시리즈 전 상황
1986년에는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2위를 차지해 전후기리그 우승 없이 한국시리즈에 직행해서 우승을 차지했고, 1987년에는 후기리그에서 천신만고 끝에 2위를 차지한 후, 다시 PO에서 천신만고 끝에 우승한 해태였기 때문에 해태가 전력이 강한 것이 아니라 제도적인 허점에 힘입은 우승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1987 시즌 종료 후, 제도 변경에 대한 논의가 나올 때, 김응용 감독은 "만일 제도가 바뀐다면 우리는 또한 그 바뀐 제도에 따라 우승할 것."이라면서 강한 자신감을 보여줬고, 그 결과는 1988년 전기리그와 후기리그에서 잇따라 우승하면서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승률은 그당시로써는 1986년보다 못했고(.639<.644) 무승부를 0.5승으로 포함한 그 이후의 제도(~1997)에서는 똑같았다.[1]
한국시리즈 돌입 전 김성한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어 타선에 균열이 생겼다. 이 해 김성한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30홈런을 친 타자였기에 해태 입장에선 부상으로 인한 그의 공백이 뼈아팠다.
한편 1988년에는 새로운 돌풍이 불었는데, 바로 빙그레 이글스의 대두였다. 1군 창단 첫 해인 1986년에는 꼴찌를 차지했지만, 198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전력을 강화하며 가능성을 보여 줬던 빙그레는 김영덕 감독을 영입한 후, 마침내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기존의 이상군과 한희민을 포함한 탄탄한 마운드를 비롯하여 이정훈, 장종훈 같은 신예 타자들의 성장으로[2] 전력이 급상승, 급기야 전기리그 2위와 후기리그 3위를 차지하며 PO에 진출했다. 그리고 PO에서 천하의 삼성 라이온즈를 3:0으로 완파하며 파죽지세로 한국시리즈를 노려보게 되었다.
3. 경기결과
3.1. 1차전
해태는 기선 제압을 위해 선동열을 내세웠고, 빙그레는 선동열 상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쌍두마차 이상군과 한희민을 아끼기로 결정한다. 그 대신 1988년에 선동열과 맞상대해 노히트 노런을 일궈낸 이동석을 선발로 올렸다. 빙그레의 구상은 제법 먹혔는데, 이동석은 해태 타선을 상대로 5회까지 무실점으로 잘 버텼다. 비록 6회말 이순철에게 솔로 홈런을 맞았지만 6이닝 1실점으로 잘 막았다. 그리고 7회 올라온 한용덕도 7회말에 서정환에게 적시타를 내주면서 1실점하기는 했지만, 분명 마운드는 기대 이상이었다.
문제는 선동열이 너무 사기였다는 점이었다. 이 날 선동열은 안타 3개만을 허용하며 삼진을 무려 14개를 잡으면서 빙그레 타선을 농락했다. 선동열의 삼진 14개는 한 투수가 기록한 한국시리즈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이었다. 완봉도 노리던 선동열은 그러나 8회 1사 후 손가락 물집으로 자진해서 마운드를 내려왔고, 후속 투수인 문희수는 9회 1사 1, 3루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무실점으로 막으며 팀의 첫 승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 물집으로 선동열은 더 이상 한국시리즈 등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3.2. 2차전
중계방송사는 KBS 1TV.
빙그레의 선발은 한희민, 해태는 이상윤을 선발로 내세웠다. 빙그레가 구사한 전략에 따르면 이 경기는 한희민으로 잡아야 했는데, 일단 초반에는 맞는 듯 싶었다. 1회초에 이상윤의 제구 난조, 급히 1회에 올라온 김정수의 난조를 틈타 4점을 내면서 앞서 나간 것. 문제는 한희민도 똑같이 투구가 좋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1회말 공격에서 빙그레는 해태의 김준환, 김봉연, 서정환에게 잇따라 안타를 맞으며 3점을 내주고 만다.
4회초 빙그레는 이정훈의 안타로 도망갔지만, 5회말에 해태가 바로 이순철의 안타로 추격에 성공했다. 5:4의 살얼음 승부를 가른 것은 실책이었다. 6회말 해태 공격에서 김봉연의 평범한 내야 뜬공을 빙그레 2루수 조양근이 놓치면서 경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평정심을 잃은 한희민을 급히 이상군으로 교체했지만, 이상군은 백인호에게 3루타를 맞고 동점을 허용했고, 이순철에게 역전 적시타를 내주며 결국 빙그레는 시리즈의 중요한 분수령이 될 수 있었고, 잡아야만 했던 경기를 어이없이 놓치고 말았다. 이순철은 이틀 연속 결승타를 날리면서 김성한이 빠진 공백을 아주 훌륭하게 매웠다.
3.3. 3차전
중계방송사는 MBC TV.
해태는 선발로 문희수를, 2차전에서 이상군을 소모한 빙그레는 선발로 김대중을 올렸다. 해태나 빙그레 모두 공격이 딱히 신통하지는 않았지만, 집중타는 해태가 나왔고, 그걸로 경기가 갈렸다. 해태는 2회초 공격에서 1사 1,3루에서 나온 서정환의 땅볼로 선제점을 냈고, 6회초에 무사 2,3루 찬스를 잡아 내야안타와 희생플라이로 2점을 더해 낼 점수는 다 냈다. 반대로 빙그레는 6안타를 쳐서 해태보다 2개는 더 많이 쳤지만, 문희수에게 산발로 묶이면서 경기 내내 끌려다녔다. 빙그레는 7회말 1사 만루의 경기 중 유일한 찬스를 잡았지만 이 찬스를 놓치면서 결국 무득점으로 끝났다.
선발 문희수는 9이닝을 6안타 7탈삼진으로 호투하면서 최동원에 이어 한국시리즈 통산 2번째 완봉승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이 승리로 해태는 한국시리즈 10연승의 위업도 아울러 달성하게 되었다.
3.4. 4차전
중계방송사는 KBS 1TV.
우승을 위해 해태는 신동수를, 벼랑 끝에 몰린 빙그레는 한희민을 내세웠다. 1회초 해태가 한희민 상대로 4안타를 작렬하며 2점을 뽑을 때만 해도 또 4:0으로 시리즈가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빙그레는 2회말 공격에서 1점을 만회한 후, 3회 유승안의 2루타를 포함해 신동수와 방수원을 두들기며 3점을 추가하며 경기를 뒤집었다. 해태가 5회초 공격에서 김준환의 적시타로 추격하자, 곧바로 5회말에 장종훈의 2점 홈런을 포함해 3점을 더 내면서 승부를 3:7까지 벌렸다.
빙그레는 더 이상의 해태의 추격을 막기 위해 이상군을 투입했고, 이상군은 기대대로 해태의 추격을 막아줬다. 이상군이 마운드에서 안정을 가져다 준 사이 7회말 공격에서 차동철을 공략하며 이강돈, 유승안의 홈런을 포함해 대거 7점을 작렬하면서 결국 3:14의 대승을 거두며 팀 창단 후 첫 한국시리즈 승리의 기쁨을 맛 봤다. 빙그레는 이 날 20안타를 치면서 해태의 마운드를 그야말로 초토화시켰다.
3.5. 5차전
중계방송사는 MBC TV.
4차전 종료 후, 김응용 감독은 5차전 빙그레 선발로 이동석을 생각했지만, 빙그레는 4차전 구원으로 나온 이상군을 하루 쉬고 다시 투입시켰다. 그리고 이상군은 기대에 부응하며 7이닝을 4안타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해태 역시 가을의 남자 김정수를 올렸지만, 김정수는 1회초 김한근에게 적시타를 내주더니, 5회초에 강정길에게 솔로 홈런을 맞고, 장종훈에게 안타를 맞은 후, 강판 당했다. 이어 올라온 이상윤도 이강돈에게 적시타, 이정훈에게 2타점 2루타를 맞으며 점수차는 5점이나 벌어지게 되었다. 이상군의 구위로 봐서는 사실상 뒤집을 수 없는 수치였고, 그나마 8회말 공격에서 한희민 상대로 3안타를 집중시켜 1점을 만회한 것이 다행이었다.
3.6. 6차전
중계방송사는 KBS 1TV.
비록 3연승 후에 2연패를 당하기는 했지만, 해태는 그 사이 3차전의 영웅인 문희수는 푹 쉰 상태였고, 사흘을 쉰 문희수는 해태의 선발로 6차전에 나섰다. 반대로 3연패 후에 짜내기를 통해 2승을 만회한 빙그레는 투수진이 바닥이 난 상황이었고, 결국 1차전 선발 이동석에게 다시 기대를 걸 수 밖에 없었다.
이동석은 1회초와 3회초에 위기를 맞았지만, 그 때마다 해태 주자들을 홈에서 아웃시키면서 4회 1사까지는 간신히 무실점으로 해태 타선을 봉쇄했다. 4회초 이동석이 서정환에게 안타를 맞자 빙그레는 김대중을 등판시켰고, 김대중은 일단 4회는 무실점으로 넘겼다. 그러나 결국 5회초 공격에서 해태는 김대중 상대로 2사 만루의 찬스를 잡았고, 여기서 김준환의 2타점 적시타와 한대화의 안타로 3점을 내면서 사실상 승부를 결정지었다. 그리고 8회초에 김봉연의 2루타로 1점을 더 달아나면서 승부의 쐐기를 박았다. 8회말 공격에서 빙그레가 조양근의 솔로 홈런으로 추격은 했지만, 이미 기세가 지울어진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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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말, 빙그레의 마지막 타자 황병일을 삼진으로 아웃시키고 환호하는 문희수의 모습.
그렇게 해태는 3년 연속으로 프로야구의 왕좌를 차지했으며, 한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쓰리핏을 달성했다.
선발 문희수는 3안타 1실점으로 완투하면서 빙그레 타선을 봉쇄, 시리즈 2승 1세이브, 그 2승 모두 완투로 장식하면서 팀 우승의 일등공신이 되며 한국시리즈 MVP가 되었다.
숨겨진 뒷이야기로는 2:0으로 앞선 상황에서 선동열[3] 을 불펜에서 몸을 풀게 하는 허장성세를 했고, 이에 빙그레 타자들의 맨탈이 흔들렸다고 한다. 그러자 다음날 선동열을 죽은 공명에 비유하는 기사가 나왔다.
4. 기타
- 3차전 종료 시점에 또 한국시리즈가 4:0이 될 것으로 우려한 야구계의 높으신 관계자가 해태 김응용 감독에게 4차전은 좀 적당히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물론 김응용 감독은 거절하기는 했는데, 시리즈가 4,5차전을 빙그레가 잡으면서 묘하게 흘러가고 결국 6차전에서 간신히 해태가 이긴 후, 김응용 감독이 그 관계자에게 "야구의 흐름도 모르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식으로 일갈했다.
- 1988시즌이 전후기 시스템이 마지막 시즌이기 때문에 해태는 이 시스템으로 펼쳐진 시즌의 최후의 우승자가 된다.
- 이순철이 평생 잊지 못할 경기가 1988년 한국시리즈 6차전이라고 한다. 그 해 절친했던 후배 투수 김대현을 교통사고로 잃고, 자신은 옆자리 동승했지만 가벼운 상처만 입고 살아났기 때문이라고. 해태 선수단은 김대현의 영전에 우승 트로피를 바치며 넋을 위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5차전 이내에서 끝났다면 그가 MVP를 타지 않았을까.
- 1982년 한국시리즈 이후 6년 만에 대전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였는데 4차전에서 거둔 승리는 역대 대전/충청 연고팀이 홈에서 거둔 역대 최초의 한국시리즈 승리다. 1982년 한국시리즈 때는 1차전 경기가 대전에서 열렸으나 15이닝 무승부로 경기가 끝났다.
5. 관련 문서
6. 둘러보기
[1] 무승부를 포함한다면 69승 39패처럼 된다. 차이라면 그 1986년도 최하위의 빙그레가 2위에 올랐다는 것. 당연히 상위팀들의 승률이 줄었다.[2] 장종훈은 연습생 출신이지만 1986년에 입단한 빙그레 창단 멤버이고, 이정훈은 1년 전인 1987년 신인왕 출신이다. 때문에 1988년 기준으로는 신인이 아니었다.[3] 당시 손가락 부상이 심해 등판할 수 없었다. 해태 주치의가 몸풀기를 하면서 겁주는 작전을 생각해냈다.[4] 그동안 리그 확장 과정에서 창단된 신생팀으로는 제8구단 쌍방울 레이더스, 제9구단 NC 다이노스, 제10구단 kt wiz가 있다. NC는 2013년 1군리그 데뷔 이후 4번째 시즌인 2016년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고 쌍방울과 kt는 한국시리즈 진출 경험이 없다. 해체 후 재창단 형태로 창단된 SK 와이번스는 4번째 시즌인 2003년에 한국시리즈에 나갔고 키움 히어로즈는 7번째 시즌인 2014년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