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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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전국시대 진(秦)의 법가 정치가. 관중, 왕안석, 장거정 등과 더불어 중국사에 이름을 남긴 개혁가이기도 했다.
2. 인생 전반기
본명은 공손앙(公孫鞅)인데, 성이 공손씨인 이유는 위나라의 공족이었기 때문이다. 또 위나라 군주의 서자 출신이라 희앙(姬鞅) 또는 위앙(衛鞅)으로 불리기도 한다. 상앙이라는 이름은 진에서 임용된 후 큰 공을 세워 받은 영지가 옛 상나라 땅이기에 붙은 이름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위(衛)나라는 삼진(三晉)에서 분열되어 나온 위(魏)나라가 아니고, 주나라 무왕의 아우 강숙 봉(희봉)을 시조로 하는, 원래는 강대국이었지만 공족들 간의 다툼으로 약소국이 된 국가다.[1]
사기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형명학에 관심을 가졌고, 성인이 되어서는 고국을 떠나 위(魏)나라의 재상인 공숙좌를 섬겨 그의 가신이 되었다. 공숙좌는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위 혜왕[2] 에게 추천했지만 혜왕이 공손앙을 시원치 않게 보자 공숙좌는 병으로 죽기 전에 문병온 혜왕에게 '왕께서 공손앙을 쓰지 않으시려거든 반드시 죽여서 후환이 없게 하소서'라고 조언하고 공손앙에게는 '왕에게 그렇게 말했으니 빨리 떠나도록 해라'라고 말했다.
공숙좌의 말을 들은 공손앙은 "왕이 저를 쓰라는 말도 안 들었는데, 죽이라는 말은 듣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위나라를 떠나지 않았다. 과연 그의 말대로 혜왕은 "재상양반이 병이 심해지더니 별 듣보잡을 인재라고 추천하네? 아무래도 죽을 때가 다 돼서 노망난 듯"이라 말하고 공손앙을 내버려뒀다.
3. 진에서의 변법
3.1. 인정을 받기까지
결국 공숙좌는 병석에서 세상을 떴고, 공손앙은 진 효공(孝公)이 내건 구인령을 듣고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향했다.
각처에서 몰려온 제자백가의 인재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상황에서 효공과 대면할 수 있는 지름길을 찾으려 연구한 끝에 효공이 총애하는 신하인 경감(景監)이란 자에게 줄을 대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효공을 알현할 수 있었다. 이 당시의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물론 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지만, 만약 위 일화의 첫 번째, 두 번째 만남에서 효공이 좋아하고 중히 쓰려 했다면, 상앙의 사상을 고려했을 때 오히려 상앙 쪽에서 사양하고 떠났을지도 모른다.[4]처음 효공을 만났을 때 삼황오제의 도인 '성인의 도'를 설파했으나, 단기간에 강대국 반열에 올라가기를 원한 효공은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이런 방법 따윈 아웃 오브 안중이어서[3]
내내 코를 골며 졸았다.상앙은 재차 경감에게 부탁해서 효공을 두 번째로 만났는데, 이번에는 하나라-은나라-주나라 3대의 성군들의 정치철학인 '천자의 도'를 설파했다. 그러자 효공은 약간 관심을 기울이는 듯 했으나 그다지 솔깃한 기색은 아니었다.
사정사정해서 세 번째로 효공을 만난 상앙이 '패자의 도'를 설하니 비로소 효공은 상앙의 말에 흥미를 가졌다.
이후 상앙이 네 번째로 효공을 만난 자리에서 패자의 도를 상세히 설명하자 효공은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넋이 나간 채 상앙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효공의 열렬한 지원을 받아 상앙은 법치 철학에 근거한 여러 가지 개혁을 실행하였다. 상앙은 군제, 세제, 법제를 정비하고 토지제도와 군현제를 시행하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이로 인하여 진나라는 일개 주변국에서 중앙집권화된 군사강국로 성장하였다. 행정적으로는 농업에 중점을 두어 진행되었고 귀족의 권력은 줄어들었다.
3.2. 개혁의 내용
상앙이 추진했던 개혁, 즉 변법은 당시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강력한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였다. 천대받는 서생이었던 그는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자신의 정치사상과 법가를 실현할 나라로 진을 선택했다. 또한 강력한 부국강병을 원했던 효공과 뜻을 맞추어 2류에 불과했던 진나라를 전국칠웅 최강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 상앙 변법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십오제(什伍制)[5] : 5/10가구를 한 단위로 묶어 상호감시 체제를 만들었다. 이는 납세와 징병의 단위가 되었고, 한 집에서 죄를 지으면 한 단위로 묶인 나머지 네 집도 연좌제를 적용해 처벌함으로써 상호 감시용으로도 활용했다. 그리고 이 제도는 유교 정책을 폈던 조선의 오가작통제와 같이 후세의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 심지어 근현대 조선총독부와 북한(소위 5호담당제)도 활용할 만큼 효과가 좋았다.
- 억상정책: 상앙은 강력한 중농주의자로 상업을 농업보다 낮게 보고 농업에 전념하기 위해 상업을 강력히 탄압했다. 당장 농업의 생산량을 늘린 사람은 요역을 면제해 준 반면, 상업을 하다가 실패한 사람은 그 처자를 노비로 삼았다. 그러나 상업을 매우 하찮게 여기지는 않았기 때문에 후에 진나라가 어느 정도 국력이 상승하자 농업과 상업의 균형있는 성장을 꾀하였다.
- 노예제 폐지: 노예제를 폐지하고 지주들의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이들의 힘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징세대상인 양민의 수를 늘려 재정을 확충하였다.
- 군공수작제: 누구라도 전쟁터에서나 국가를 위해 공을 세웠다면 그에 마땅한 작위를 내렸고, 반대로 군공이 없으면 귀족이라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이는 국가에 대한 백성의 전쟁참여도 증진 및 민심을 모으기 위함이었으며, 반대로 국가나 군주에 반하는 행위를 했다면 삼족을 멸하는 등 각종 엄벌을 내렸다.
- 악습 및 구습 타파: 진나라에 내려오는 악습이나 오랜 전통을 타파함으로써 백성들의 의식 향상을 도모하였다. 이 덕분에 진나라는 오나라, 월나라, 초나라같이 변방 오랑캐가 세운 야만국이란 중원 사람들의 기존 인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다만 이는 쉽게 해결되는 게 아니었기에 진효공은 악습 퇴치령을 몇 번이고 내리곤 했다.
- 신고제 확립: 타인의 잘못을 신고한 자는 상을 주고 타인의 잘못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는 적에게 투항한 것과 같은 죄로 처벌하여 신고제를 확립했다.
- 함양 천도: 원래 대대로 수도였던 옹 땅은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했기에, 지금의 서안(장안) 부근에 있던 함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중원으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한다. 함양은 나중에 효공의 5대손인 시황제 때는 천하 통일 이후로 천하 굴지의 도시로 발전했으며, 시황제의 손자인 진왕 자영이 항우에게 피살되고 함양이 파괴될 때까지 수도로 번성했다. 함양이 훗날 장안이 되어[6] 전한과 당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린거야 유명한 이야기. 현재엔 과거보다야 위상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현재도 시안시라는 이름으로 산시성의 성도로 군림하고 있다.
상앙은 일명 '신상필벌'로 요약할 수 있는 법제 개혁을 단행했으며, 이때 제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행한 일화가 있다.
어떤 제도나 정책을 시행할 때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로 현대에도 종종 인용되곤 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이목지신(移木之信)으로, 약속을 지켜서 신뢰를 얻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상앙이 이렇게 법 제도를 확실히 하자 시민들은 그 제도를 칭찬했는데, 상앙은 병사들을 시켜 그들을 잡아오게 했다. 이유인 즉 "법을 싫어하는 자 못지 않게 찬양하는 자도 잡아야 한다"라고. 즉 '이런저런 감정을 넣지 말고 그냥 지켜라'는 의미다.令旣具 未布 恐民之不信
법령은 이미 갖추어졌으나 백성이 새 법령을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아직 널리 알리지 않았다.
已乃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
그래서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도성 저잣거리의 남쪽 문에 세우고
募民有能徙置北門者予十金
백성을 불러 모아 말하길, 이 나무를 북쪽 문으로 옮겨 놓는 자에게는 십금을 주겠다.
民怪之 莫敢徙 複曰
그러나 백성은 이것을 이상히 여겨 아무도 옮기지 않았다. 다시 말하길
能徙者予五十金
이것을 옮기는 자에게는 오십 금을 주겠다.
有一人徙之 輒予五十金
어떤 사람이 이것을 옮겨 놓자 즉시 그에게 오십 금을 주어
以明不欺 卒下令
나라에서 백성을 속이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고 나서 새 법령을 널리 알렸다.
효공과 상앙의 강력한 추진에도 불구하고 이 변법을 좌초시키기 위한 시도는 여러 번 일어났다. 변법 자체가 기득권층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진 최고의 유력부족인 맹, 서, 백씨 부족의 반발과 당시 태사였던 감룡과 두지의 반대로 변법은 여러 번 중단 위기를 맞았다. 효공에게 이르는 반대 상소만 하루 수천 개였다 하니 실로 나라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래도 상앙은 변법에 대한 반대는 용서치 않았고 변법을 어길 시 강력한 엄벌주의로 대처하였다. 이 변법 앞에서는 당시 태자였던 영사[7] 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자가 변법이 불편하다며 일부러 어기자, 태자는 건드리지 않았지만 스승이었던 공자 건(효공의 형이자 태자의 백부)에게 죄를 물어 처벌했고 다른 스승에게는 먹으로 죄명을 얼굴에 새기는 형벌을 내렸다. 이후 공자 건이 또 죄를 저지르자 코를 베이는 형벌에 처했고, 결국 공자 건은 영원히 은둔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공자 건과 태자는 상앙에 대해 증오를 품게 된다.
이렇게 밀어붙여진 개혁은 진나라를 크게 안정시킨다. 사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렇게 착실히 쌓은 국력을 바탕으로 상앙의 진나라는 하서(河西) 지역을 수복했고[8] 당시 마릉 전투 이후 흔들리는 위나라를 치자는 주장을 해 군사령관에 임명된 후 당시 패권 국가였던 위(魏)나라를 제압하고 패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반대로 위나라는 이때부터 약해졌고, 하서 지역을 잃어 도읍인 안읍이 위급해지자 대량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 과정에는 다소 졸렬한 꼼수가 있었는데, 상앙과 친분이 있었던 공자 앙(卬)이 위나라의 사령관이 되자 상앙이 평화회담을 구실로 그를 유인해 사로잡은 후 복병을 보내 위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른 것이다.[9]行之十年 법령이 시행된 지 십 년이 되자
秦民大說 진나라 백성은 매우 만족스러워하고
道不拾遺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 가지 않으며
山無盜賊 산에는 도적이 없고
家給人足 집집마다 풍족하며 사람마다 마음이 넉넉했다.
民勇於公戰 백성은 나라를 위한 싸움에는 용감하고
怯於私鬦 사사로운 싸움에는 겁을 먹었다.
郷邑大治 도시나 시골이 모두 잘 다스려졌다.
결과적으로 진나라의 군사력은 매우 강대해졌는데, 양인이 많아지면서 군사수가 증대했고 재정이 확충되었기 때문이다. 상앙은 이 공으로 대량조에 올라 효공과 함께 명실상부한 사실상의 공동군주가 된다.[10]
4. 몰락과 최후
진효공 치세가 끝나갈 무렵, 상앙은 다른 이의 소개로 조량이라는 숨은 현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상앙이 조량에게 직언해줄 것을 부탁하자, 조량은 진목공 때의 명재상 백리해와 상앙을 비교해 말했다.
그러나 상앙은 이 말에 따르지 않았다.오고대부 백리해가 나라를 다스릴 때 어진 정치를 펼쳐 모든 이들이 그를 존경했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세운 제도는 도리를 등지고 당신이 고친 국법은 이치에 어긋나니 이를 교화라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극형으로 사람을 다스리니 원한을 사고 재앙을 쌓아 놓았습니다. 백리해가 나라를 순시할 때 무장한 호위병을 동행할 필요가 없었으나, 당신은 무장한 병사들이 탄 수십 대의 수레가 없으면 외출조차 하려 하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는 흥하고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처지가 이토록 위태로운 데도 더 오래 영화를 누기기를 바라십니까? 관직과 영지를 돌려주고, 물러나 꽃과 풀에 물을 주며 사는 것이 어떻습니까? 숨어 사는 현인을 세상에 나오게 하고, 노인을 봉양하고 고아를 보살피며 부모와 형을 공경하고, 공을 세운 자를 추천하며 덕 있는 이를 존중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렇게 한다면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까지 더 많은 영지를 탐내며 진의 정치를 농단하니 백성들의 원한을 사고 있습니다. 진왕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어찌 진나라가 당신을 제거하는 명분이 적다고 하겠습니까? 당신의 파멸은 한 발을 들고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조량이 말한대로 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점차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상앙에게 증오를 품고 있던 태자(혜문왕)는 즉위함과 동시에 상앙의 반대파를 규합했다. 이들은 이제껏 상앙의 변법에 반대를 해 온 진나라의 주요 원로세력이었다[11] . 여기에는 혜문왕 대신 벌을 받은 공자 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연히 상앙에게 원한이 만땅인 상태인지라 상앙을 탄핵했다.
이렇게 하루 아침에 반역자가 되자 일단 위(魏)나라로 망명을 하기로 하고 국경이었던 함곡관을 밤에 몰래 넘으려고 했다.[12] 그러나 '''"새벽 첫닭이 울 때까지"''', 즉 어두워질 때부터 날이 샐 때까지 관문을 여는 게 금지되어 있는 게 진나라의 법이었기에[13] 할 수 없이 그 날은 여관에 머물고자 했다. 그러나 '''여행증이 없는 사람은 받아줄 수 없으며 어기면 주인이 엄벌을 당한다'''는 것도 진나라의 법이었기에 그는 거절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런 법들을 만든 것이 '''상앙 본인이었다'''. 자승자박의 극치. 결국 자기가 만든 법을 자기가 어기려고 했으며 자기가 만든 법 때문에 자기의 목숨이 위험해지게 된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작법자폐(作法自斃)다.
어찌어찌하여 위나라로 갔지만 위나라 사람들은 그가 공자 앙을 속이고 위나라 군사를 패배시켰던 일을 잊지 않았기에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상앙이 다른 나라로 떠나려고 하자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면 진나라의 공격이 있을까봐 그를 다시 진나라로 보냈다.
상앙은 할 수 없이 살기 위해서 일단 자신의 영지였던 상 땅으로 가서 군대를 모았는데, 강대한 진나라 군대와 맞설 자신이 없어 일단 약소국이었던 정나라를 공격해 영토와 인력물자를 확보하려고 했다. 하지만 민지라는 땅에서 혜문왕의 군대가 그의 배후를 쳐 대패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결국 살해당하고 만다. 그의 시신은 함양으로 보내져 거열형에 처해진 다음 분해된 조각들이 각 지방에 보내졌고, 연좌제로 삼족이 몰살당했다.
상앙에 원한이 있었던 진 혜문왕은 상앙의 후원자였던 아버지 진 효공이 죽자 절호의 기회를 포착했고, 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상앙의 변법으로 권력을 잃은 원로 세력들을 포섭할 필요성이 있었다. 즉위 초에 상앙을 제거함으로써 본인과 상앙의 정적인 원로 세력들의 원한을 함께 풀면서 국정을 안정화했다.
그러나 혜문왕은 정작 상앙의 법은 쓸모가 많다면서 폐지하지 않았다. 변법은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예전의 체제로 되돌리려던 원로 세력들의 통수를 치고 반발하는 이들은 제거해버렸다. 혜문왕은 비록 자신이 어렸을 때 변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당했지만, 상앙의 변법에 힘입어 진나라가 발전하는 것을 보고 존경을 표했던 변법 신봉자였고, 혜문왕이 이같은 뛰어난 재치로 국정을 안정시키면서 상앙의 변법은 유지될 수 있었다. 진나라는 혜문왕 때부터 전국칠웅 최강국으로 등극하면서 혜문왕의 현손인 진 시황제의 천하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그는 생전에 상군서라는 책을 집필하여 남겨놓았다. 이는 전국시대 역사연구에 아주 중요한 사료가 되며 상앙 자신의 생각을 아주 잘 알 수 있어 귀중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선진문헌이 다들 그러듯 상앙 본인이 쓴 것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다.
5. 평가
"상군[14]
은 천성이 각박한 사람이다. 효공에게 등용되기 위해 제왕의 도를 말한 것은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를 지껄인 것일 뿐 본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군왕의 총애를 받던 경감을 이용했고, 자리에 오른 뒤에는 공자 건을 처형하고 위나라 공자 앙을 속였으며 조량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이 또한 그가 각박한 자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나는 일찍이 저 상자(商子)[15] 의 개색과 경전 등 여러 편을 읽었는데, 그 내용은 그의 행적과 비슷했다. 진나라에서 그의 악명이 높았던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 사마천[16]
상앙의 변법은 변방 강국에 불과했던 진나라를 단숨에 강대국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이는 훗날 진나라 천하통일의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강력한 법만이 모든 걸 이룰 수 있다고 믿었으며 교육과 교화에는 관심이 없었고, 사람의 마음이나 인정 등은 불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법가 성향이 짙은 제갈량조차 상앙은 덕으로 교화함이 부족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가혹한 법률과 억압적인 정치는 반대파를 양산했고 결국 상앙은 자신이 만든 법에 목숨을 잃었다."상앙은 진국을 강하게 만든 천재였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은인을 배반하였으며 진나라 백성들에게 지나치게 긴장의 끈을 강요하다가 그 긴장의 끈이 끊어지자 자신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사마광[17]
한편, 상앙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강력한 법치가 주로 대토지 소유자 출신인 식자층의 기득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요컨대 상앙에 대한 선비들의 부정적인 서술은 호족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는 출신배경을 감안하여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법이 명확하지 않고 관례에 따르는 일이 많아지면 행정/사법에 인적/물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개입할 수 있는 지주 호족/귀족들에게 유리하다. 일례로 초기 법가이자 상앙에게 큰 영향을 미친 위나라의 명재상 이회는 유가의 예법(관습법 혹은 관례)이 귀족의 특권을 옹호하는 기능을 한다고 여겨 예법의 실천에 반대한 바 있다. 다른 예로 한고조 유방은 함양에 입성한 후 약법삼장[18] 을 발표하고 법치를 대폭 완화하였는데, 이는 호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포석이 깔려있는 것이었다.
지방 유력자들에게 토지를 빼앗기는 등의 횡포에 시달리던 전근대 중국의 가난한 평민 입장에서는 가혹하지만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당장 사마천 사기의 서술만 보더라도 변법 시행 후 10년이 지나자 백성들이 만족해하고 사람마다 마음이 넉넉해졌다고 전하고 있다. 특히 사사로운 싸움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상앙의 가혹하지만 공평한 법은 역설적으로 말단 백성에게는 힘 센 이의 횡포를 막는 보호막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수급을 베어오면 관작을 올려주는 제도는 신분상승의 기회가 크게 제약돼 있던 전근대 사회에서 능력주의에 따른 출세를 국가에서 보장해주는 획기적인 혁신이었다. 상앙변법이 상앙이 죽은 뒤에도 진나라에서 쭉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패도를 꿈꾸던 왕의 의도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어느 정도 지지받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는데, 상앙 변볍과 관련하여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강자와 약자 사이에 억압하는 것은 자유이고, 해방시키는 것은 법이다.[19]
6. 기타
상앙을 다룬 드라마로 <대진제국>이 있다.
7. 관련 항목
- 역사 관련 정보
- 상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