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중국)

 



1. 개요
2. 揚州
3. 凉州
4. 梁州


1. 개요


고대 중국행정구역들. 우리 발음으로는 다 같은 양주이지만 한자가 다른 양주가 3개나 있다. 마지막 양주는 거의 언급되는 게 없다시피 하고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삼국시대에 공존 한 적이 있었기에 이 두 개의 구분이 중요하다. 구분을 위해 두 번째 양주를 서량이라고 표시하기도 한다.

2. 揚州


임금이 세웠다는 9주의 하나로 장강 하류 유역에 위치해 있다. 현재의 장쑤성 남부, 안후이성 남부, 저장성, 장시성 그리고 푸젠성 지역에 해당한다. 물론 실제로 우 임금이 양주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단 하나라 자체부터가 실존이 불확실할뿐더러 춘추시대까지 장강 유역은 중국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
춘추시대에는 오나라, 월나라가 있던 지역이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월나라가 초나라에 망한 뒤로는 초나라의 땅이었다. 전국시대에는 진(통일왕조)나라에게 계속 밀리던 초나라가 마지막 수도로 삼은 곳이 양주 지역의 수춘이었다.
진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는 형산군(衡山郡), 구강군(九江郡), 회계군(會稽郡), 민중군(閩中郡)이 설치되었다.
전한 시기에 양주가 설치되었다.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소속 군은 후한 기준 구강군, 단양군(丹楊郡), 여강군(廬江郡), 회계군(會稽郡), 오군(吳郡), 예장군(豫章郡) 6개 군이었다.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까지는 초기에는 호족들이 난립했으나 손책에 의해 장악된 이후 손씨의 오나라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장강 이남에 대한 개발이 시작되었고, 손책이 194년 여릉군(廬陵郡)을 예장군에서 분리한 것을 시작으로 손권 시기에 파양군(鄱陽郡), 팽택군(彭澤郡)이 예장군에서 분리되었다.
서진 시대에도 군이 여럿 신설되긴 했으나 양주 자체는 유지되었다. 그러다 동진 시대에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며 남부가 강주(江州)로 분리되고, 유송 시기에는 남은 양주에서 남부가 다시 동양주(東楊州)로 분리되어 나온다.
이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수나라는 한나라 때의 교주 지역까지 포함해 다시 양주를 만들었다. 이후 당나라 때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주 위에 (道)가 신설되었고, 양주 지역의 북부(회수와 장강 사이의 회남 지방)는 회남도(淮南道)에 속하게 되며 남부는 형주의 남부(이후의 상주(湘州))와 합쳐져 강남도(江南道)에 속하게 된다.
현재 도시는 양저우 참고.

3. 凉州


후한 13자사부 중의 하나. 현재의 간쑤성과 거의 일치한다. 옹주와 분리과 합체를 자주 반복했다. 전통적으로 진(秦)나라의 근거지. 동탁, 마등 세력의 본거지였으며 서역 지배의 중심지였으며, 오나라의 양주와 구별하기 위해[1] 에 흔히 '''서량'''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4. 梁州


우 임금이 세웠다는 9주의 하나로 현대의 쓰촨성 지역. 물론 우 임금의 추정 연대(서기전 23세기)에는 쓰촨 지역 역시 중국과는 따로 노는 독자적인 문명이 있었다. 춘추시대에는 촉나라 및 파나라가 있었다가 전국시대 진나라 혜문왕 말기에 진나라에 정복되었다. 진시황의 36군 중에서는 한중군(漢中郡), 촉군(蜀郡), 파군(巴郡) 3개 군이 해당된다.
초한쟁패기에는 한고제 유방의 근거지였으며, 이후에는 익주(益州)가 설치된다. 삼국시대에는 촉한의 근거지였다.
이렇게 양주라는 이름은 잠시 묻혀 있다가, 263년 가 촉한을 멸망시키고 나서 익주의 동북 절반을, 즉 익주를 구성하는 큰 줄기인 파(巴)와 촉(蜀) 중에서 파 지역을 분할하여 양주를 설치했다.[2] 치소는 처음에 면양현에 두었다가, 서진 시기에 들어서 남정현으로 옮겼다.

[1] 표준어에서의 두음법칙으로 인해 한글로 쓰면 구별할 수 없다.[2] 이엄한중을 지키게 되었을 때에, 제갈량에게 익주를 분할하여 파주(巴州)를 만들고 자신을 파주 자사로 삼아 달라는 요청을 한 일이 있었는데, 이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