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철(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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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포항의 전설이 될 수 있었던 비운의 스트라이커
백승철은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이다. 그는 1998~1999년 포항 스틸러스의 촉망받는 스트라이커였다. 또한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발목 힘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슈팅으로 K리그 최고의 캐넌슈터 중 하나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대착오적인 부상 관리 및 의료사고마저 겪는 바람에 정상적인 프로 생활을 2시즌만 보내고 은퇴를 선택하고 말았다. 현재는 수성대학교의 축구 감독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초창기
백승철은 서울의 성복초등학교 때부터 축구 선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2학년 때 축구부 감독이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던 그에게 "축구 한 번 해볼래?"라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축구를 시작하는 걸 반대했지만 그 감독의 간절한 설득에 결국 허락했다고 한다. 이후 백승철은 초등학교에서 기량을 갈고 닦은 후 동북중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축구 활동을 하였고 이후 동북고 축구부에 입단하려 했지만 160대 초반의 작은 키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영등포공고에 진학해 축구 활동을 하다가 영남대 박수덕 감독이 그를 받아들여 영남대 축구단에 입단시켰다.
백승철은 영남대에서 축구선수로서 기량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그의 소속팀인 영남대는 전국 체육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고 대통령배 축구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었는데 백승철의 활약은 팀 동료들 중 으뜸이었다. 또한 경북 지역 득점상, 춘계 대학 시합에서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영남대 축구부를 후원하던 포항 스틸러스가 영남대와 연습경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때 포항 관계자들은 백승철을 눈여겨보고 그를 지명하기로 결정했다.
2.2. 포항의 스타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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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백승철은 영남대를 졸업한 후 1998 드래프트에 참가했다. 이때 그는 4순위로 포항 스틸러스의 지명을 받았다. 당시 포항에는 한국 축구계의 레전드 공격수 황선홍과 떠오르는 스타 공격수 이동국이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백승철이 백업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당시 이동국은 허구헌날 청소년 대표팀 및 성인 대표팀과 포항을 왔다갔다하고 있어서 포항에서의 출전 횟수가 많지 않았다. 반면 백승철은 포항에서 훈련을 철저히 수행하며 기량을 쌓았고 그의 강력한 슈팅 능력을 눈여겨 본 박성화 감독은 그를 주전 스트라이커 자리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백승철은 1998년 초에 열린 아디다스컵과 필립모리스 컵에서 눈부신 활약을 선보였다. 이후 백승철은 정규리그에서 엄청난 활약을 선보였다. 7월 18일 안양 LG와의 개막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한 백승철은 2차전인 울산 현대전에서 또 골을 터트리며 연속 골을 터트렸고 이후 전북 현대와의 5차전에서 1골을 터트리며 5경기 3골이라는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다. 이후 그는 정규리그에서 17경기 9골 3도움을 기록하며 포항의 핵심 공격수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활약으로 신인왕 후보에 들었지만 이동국의 압도적인 인기 때문에(당시 이동국은 15경기 7골 2도움을 기록해 백승철보다 기록상에선 밀렸다) 결국 이동국에게 신인왕 타이틀을 허용했다. 그래도 그 해 K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려 자신의 이름 석자를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그후 백승철은 1999년에도 정규시즌에서 8골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부상의 여파로 도중에 시즌을 마감했다. 그는 포항에서 2시즌 동안 56경기에 출전해 20골 4도움을 기록했다.
2.2.1. 전설로 남은 동해안 더비
그의 활약 중 백미는 1998년 K리그 플레이오프 울산 현대와 포항 스틸러스와의 1차전이었다. K리그 출범 이래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대결은 당시 리그 3위를 기록했던 포항이 준플레이오프에서 전남을 승부차기 끝에 5:3으로 격파한 후 2위 울산과 만나면서 성사되었다. 1차전은 포항에서 열렸는데 경기 종료를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승부는 2:2 동점이었다.
그러던 중 마지막 프리킥 찬스를 맞이한 포항은 바로 공을 올리지 않고 백승철에게 공을 흘렸다. 백승철은 이를 잡고 몰고 가다가 강력한 중거리슛을 날려 극적인 3:2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울산에는 1998 월드컵에서 엄청난 선방을 선보이며 명성이 자자했던 김병지가 있었지만 그 조차도 백승철의 슈팅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2차전에서 김병지의 극적인 헤딩골로 승부가 원점으로 돌아갔고 승부차기에서 울산이 승리하면서 백승철은 패배의 쓴맛을 다시며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울산과 포항은 '''동해안 더비'''라는 라이벌 관계를 맺고 현재까지 치열한 대결을 펼치고 있다.
2.3. 갑작스런 몰락
몰락의 시작은 1999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승철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동계훈련을 받다가 점프하다가 잘못 떨어져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상당기간 고생했고 리그 초반 몇 경기에 나오지 못했다. 이후 6월 1999 코리아컵에 참가하는 대표팀에 선발되었는데, 그는 아직 몸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합류를 결심했다. 이는 부상을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대표팀에서 돌아온 백승철은 부상을 참고 진통제를 맞아가며 뛰었다.
그러던 중 백승철은 부천 SK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했지만 다음날 아침 왼쪽 발목이 부어오른 것을 발견하고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진찰 결과는 반월판이 약간 찢어졌고, 무릎에 물이 찼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몇주간 경기에 뛰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지만 당시 포항은 플레이오프 진출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어서 백승철을 쉬게 해줄 여력이 없었고 그 또한 팀을 위해 자잘한 부상 정도는 감수하기로 결심하고 가능한 많은 경기에 출장하려 했다. 급기야 그는 이 심각한 부상을 안고 8경기 연속 출장을 감행하는 무리수를 두고 만다.
1999 시즌이 끝난 뒤, 백승철은 담당 의사가 반월판이 완전히 찢어졌고 십자인대와 무릎 전체가 모두 심각하다는 진단을 받자 자신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을 깨닫고 수술을 결심했다. 그런데 포항 스틸러스는 이 시기에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런 수술에 일가견이 있는 서울의 큰 병원으로 보내지 않고 큰 수술은 별로 한 적이 없는 포항의 구단 지정 병원으로 보낸 것이다. 결국 수술은 실패했고 수술 과정에서 외부 병균에 감염되어 무릎이 못 쓸 지경이 되고 말았다.(...) 뒤늦게야 서울의 대형병원에서 재수술을 받았지만 별다른 호전이 없어 독일로 가서 다시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포항에서 수술을 받았을 당시 병원에서는 월요일에 수술하고 금요일에 하반신 마취하고 다시 수술했다고 한다. 이후 독일에 가서 담당 의사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의사가 놀라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의료 행위다. 수술 부위가 곪아도 한 달 뒤에 하는 게 상식적인 치료법인데 하반신 마취를 일주일에 두 번이나, 그것도 운동선수의 생명을 담보로 그런 대응을 하다니 믿을 수 없다"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 의사의 진단에 따르면 당시 백승철의 무릎 상대는 60, 70대 노인의 그것과 거의 같았다고...
이후 백승철은 독일과 일본에서 연이어 수술을 받았지만 전성기 때의 몸상태로 돌아가지 못했고 결국 은퇴하고 말았다. 그는 수술을 잘못 시행하고 세균에 감염시키는 말도 안되는 짓을 저지른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지만 도중에 가족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그의 이러한 비극적인 결말은 당시 한국 축구계의 후진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백승철 같이 탁월한 기량을 선보이며 팀에 큰 공헌을 한 선수가 팀을 위해 부상을 참고 뛰었다가 부상이 악화되었다는 것은 물론 선수 본인이 몸관리를 잘못한 탓도 있지만 선수를 보호하고 가능한 오랫동안 활약하게 배려해줘야 할 구단 측이 얼마나 허술하게 선수 관리를 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당시 한국 축구계는 선수들에게 작은 부상 따위에 연연하지 말고 투혼이라는 미명하에 팀을 위해 희생하라는 전체주의적 사고관에 물들어 있었다. 일례로 백승철의 팀 동료이자 당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던 이동국 역시 대표팀과 클럽을 오가며 엄청난 혹사를 겪는 과정에서 백승철과 마찬가지로 부상을 당했지만 무릎에 붕대를 감고 진통제를 맞아가면서 출전해야 했다. 그 결과 이동국의 몸상태는 끔찍할 정도로 망가져버리면서 그 이후 한동안 혹사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90년대 초 대한민국 축구 기술 디렉터로 부임한 데트마어 크라머는 이러한 한국의 축구 풍토를 강하게 비판했고, 당시 한국 축구 에이스였던 서정원을 무리하게 출전시키려는 대한축구협회에 대해 "차라리 경기에 질 지언정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축구계는 크라머를 "한국 축구와 맞지 않는다"며 내쫓았고 계속해서 선수들을 혹사시키고 관리를 소홀히 했다.
만약 축구계가 크라머 등의 지적을 귀담아듣고 부상 방지 및 선수 관리에 신경을 썼었다면, 백승철은 허무하게 선수 생활을 마감하지 않았을 것이고, 한국 축구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1]
3. 스태프 경력
백승철은 선수 생활을 은퇴한 뒤 축구와 거리를 두고 한동안 방황했다. 그러다가 지인의 추천으로 운봉고등학교 코치로 부임해 수년간 활동하다가 2014년부터 수성대학교 감독으로 부임해 현재까지 학생들을 이끌고 있다.
4. 수상
- K리그 베스트 11: 1998
[1] 이러한 무신경한 선수 관리는 2002년 월드컵 전후로 한국 축구계가 현대축구의 흐름을 받아들이면서 이에 따라 선수 관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자 서서히 사라져갔다. 하지만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팀 닥터가 말라리아 예방 백신 시기를 잘못 맞추는 바람에 대회 직전 선수단의 컨디션이 망가져 버린 일이 있었다. 가뜩이나 대회 전부터 전력도 안 좋다고 비판을 받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컨디션 유지조차 시켜주지 못했으니 경기력이 좋게 나올 리가 만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