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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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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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아디다스 코리아컵 우승 기념
K리그 울산 현대의 전직 축구선수이자 '''레전드'''. 현 울산대학교 감독. 포지션은 포워드. 선수 생활 말기에 스위퍼로 보직을 변경했다.K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병장 축구(?)'''[1]
를 구사한 선수
별명은 '''가물치'''. K리그 팬들에게는 흔히 '''기록의 사나이'''로 통한다. 신태용, 황선홍, 고정운과 더불어 1990년대를 풍미했던 '''K리그의 레전드 중 한 명.''' K리그 통산 371경기 '''110골'''[2] '''54도움'''. J리그 통산 29경기 17골.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드래프트 시장에 나올 무렵 이미 대어로 평가받았다. 같은 시기 주목을 받은 선수가 하석주.
1991년 K리그 베스트 11
1992년 K리그 베스트 11
1995년 K리그 베스트 11
1996년 K리그 베스트 11 '''MVP'''
1997년 K리그 베스트 11 '''득점왕'''
이런 K리그에서의 엄청난 활약상에 비해, 국가대표에서는 그다지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역시 K리그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레전드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로서는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한 신태용, 윤상철, 김은중, 우성용과 비슷하다. 1994년, 1998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 참가했으나,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리진 못했다. 때문에 번번히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그러자 '''국내용'''이란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붙었다. 국가대표로서 통산 기록은 23경기 5골.
2000년 J리그 베르디 가와사키(현 도쿄 베르디)에 진출, 팀 공격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리그에서 16골을 기록한다. 위에 적은 17골은 나비스코컵 대회에서 기록한 1골을 포함한 것. 특히 당시 베르디에는 재일교포인 이국수 총감독이 팀을 이끌고 감독에 장외룡,[3] 선수로 김도근이 함께 활약하여 팀 적응에 도움을 받았다.
김현석의 활약상에 만족한 베르디는 김현석과 2년 재계약을 추진했는데..... 울산이 창단 이래 최초로 리그 '''꼴찌'''를 기록한다. 그러자 높으신 분이 나서서 복귀를 요청했고, 김현석은 흔쾌히 울산으로 복귀한다. 라고 멋지게 말하지만 사실은 베르디에 임대되었던 것으로, 임대기간 다 채우고 복귀했다.
지금도 울산 팬은 단연코 김현석을 울산의 레전드이자 프렌차이즈 스타로 꼽는 데는 바로 이런 사연이 있다.
2001년 7월 21일, 전남 드래곤즈를 상대로 K리그 최초 '''50골 50도움''' 달성. 이른바 50-50 클럽이 탄생했다. 덤으로 이날까지 쌓은 기록이 300경기 99골 50도움. 2002년 스위퍼로 보직을 변경했으나, 여전히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 이해 신태용과 함께 전인미답의 60-60 클럽 창설을 걸고 경쟁했다.
2003년 올스타전에서 은퇴했다. 여담으로 이해 올스타전은 K리그 20주년 기념이었고, 1980년대 올스타팀과 90년대 올스타팀이 맞붙는 이벤트가 있었다. 또한 프로축구연맹이 은퇴식을 열어준 세번째 선수[4] 였다. 김현석은 올스타전에 출장해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그밖에 각팀 서포터들이 올스타전 응원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올스타전을 매년 지방에서 돌아가며 열기로 한 원칙을 깨고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연 것에 대한 항의였다. 과연 기록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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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부터 2012년까지 울산의 코치로 재직하였고, 2013년 울산WFC 여자축구단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1년 일본 외유를 빼면, 프로 생활을 울산에서 시작해서 울산에서 끝낸, 진정한 이 시대의 프랜차이즈 스타.
아무리 돈이 좋고 빅 클럽이 좋다지만, 최소한의 도의마저 저버린 채 이적 문제로 팬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이런, 저런, 그런 선수들에게 실로 귀감이 된다 하겠다.
K리그에 남긴 굵직한 발자취에 비해 대표팀에서 성과는 미미한데, 어찌 보면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한 선수였다. 하필 90년대에 황선홍(1968년 183cm), 김도훈(1970년 183cm), 최용수(1973년 184cm) 걸출한 공격수가 바통 터치라도 하듯 나타났을 뿐더러..... 워낙 황선홍이 끝판대장이라 좀처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당시 아시아권 어느 팀에 갖다놓아도 꿀릴 게 없던 김도훈, 최용수가 만년 2인자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정도니.
더구나 대한민국 축구가 독일 축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장신에 준족 공격수를 요구하던 팀 전술에도 맞지 않았다. 말하자면 피지컬을 무기로 삼는 공격수가 득세하던 시기에, 순수한 '''테크닉'''으로 불멸의 기록을 쌓아나간 이단아였다.
김현석의 특징은 '''21세기 대표팀 선수보다 한수 위'''인 퍼스트 터치와 슈팅. 때문에 문전에서 김현석에게 볼이 가면, 수비가 슈팅 타이밍을 예측하기가 힘들어서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데드볼 처리 능력도 정교해서 소속팀에서 프리킥을 전담하기도 했다. 흔히 말하는 '볼을 참 얄밉게 찬다'는 스타일.
'''흔히, 김현석의 전성기 때 연소했던 팬들은 김현석의 플레이스타일이 상당히 투박했다고 잘못 기억하고 있기도 한데, 이는 그의 불같은 성격 때문이다'''. 웬만큼 짬밥(?)을 먹은 후에는 상대 팀의 어린 선수가 자신에게 태클을 걸면 폭풍갈굼을 시전 하는 일은 예사였었고, 경기 뒤지고 있을 때, 볼보이가 공 늦게 갖다준다고 폭언을 퍼부은 적도 있다, 2001년 울산-안양 경기에서는 경기 시작 10분만에 퇴장당했는데, 안양의 김성재와 자리다툼을 하다 주먹다툼으로 이어졌기 때문. 이에 심판 판정에 불복하면서 5분 넘게 경기가 중단되기도 했다.
상당히 부정적으로 써놓았는데, 역으로 보자면 그만큼 '''승부욕 이 강했던 선수'''.
여담으로, 그 당시 언론에 대응해선 교과서 같은 맨트가 보편화 되어있던 축구계에서 이따금 톡톡튀는 말을 내밷곤 했던 이단아. 일례로 1995년 디에고 마라도나가 CA 보카 주니어스를 이끌고 방한했을때 마라도나와의 대전소감을 묻는 언론 인터뷰에서 "마라도나는 지는 별이고 난 떠오르는 태양이다"라는 호기 있는 멘트를 날렸다.
2. 관련 문서
[1] 자세한 내용은 아랫글에서 참고[2] 기록 수립 당시 K리그 최다골 기록이었다. 이후 김도훈(114)과 우성용(116), 김은중(121), 데얀(141), 이동국(현재진행형)이 뛰어넘었다.[3] 이국수 총감독은 베르디 부임 전에는 고교급 감독만 15년을 한 젊은 지도자로 일본에서 프로 수행에 필요한 일본축구협회 S급 자격증(AFC P급에 해당)이 없었다. 그 때문에 총감독으로 2년만 재임했고 S급 자격증 보유자를 명목상 감독으로 두어야 했다. 당시 요미우리가 손을 떼어 경영에 난맥상을 겪던 베르디라서 나왔던 특수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4] 앞선 두명은 김주성(1999)과 고정운(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