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수

 

'''안익수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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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수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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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윤상철
FW
라데
FW
김경래
MF
신태용
MF
고정운
MF
황보관
DF
'''안익수'''
DF
유상철
DF
홍명보
DF
허기태
GK
사리체프

'''1997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마니치
FW
스카첸코
MF
김현석
MF
신진원
MF
김인완
MF
이진행
MF
정재권
DF
김주성
DF
마시엘
DF
'''안익수'''
GK
신범철

'''1998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김현석
FW
샤샤
MF
고종수
MF
유상철
MF
백승철
MF
안정환
MF
정정수
DF
'''안익수'''
DF
마시엘
DF
이임생
GK
김병지



''' 대한민국의 축구감독 '''
''' 이름 '''
'''안익수'''
'''安益秀 | An Ik-Soo'''
''' 출생 '''
1965년 5월 6일 (59세) /
대한민국 경기도 안산시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축구선수(수비수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일화 천마 (1989~1995)
포항 스틸러스 (1996~1998)
''' 감독 '''
성남 일화(1999~2005 / 코치)
대교 캥거루스 (2006 / 코치)
대교 캥거루스 (2007)
대한민국 여자 대표팀 (2007~2009)
FC 서울 (2009~2010 / 수석 코치)
부산 아이파크 (2011~2012)
성남 일화 천마 (2013)
대한민국 U-20 대표팀 (2014~2016)
선문대학교 (2018~)
1. 개요
2. 생애
3. 선수 경력
3.1. 일화 천마 시절
3.2. 포항 스틸러스 시절
4. 지도자 경력
4.1. 성남 일화 코치 (1999~2005)
4.2. 고양 대교 감독 (2006~2007)
4.4. FC 서울 수석코치 (2010)
4.5. 부산 아이파크 감독 (2011~2012)
4.6. 성남 일화 감독 (2013)
4.7. 대한민국 U-20 감독 (2014~2016)
4.8. 선문대학교 감독 (2018~)
5. 지도 스타일
5.1. 비판
6.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8년부터 선문대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2. 생애


특이하게도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축구에 관심이 있었지만, 학업 때문에 축구를 하고 있지 못하던 와중이던 고등학교 3학년 때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생각한 그는 축구를 시작했다. 축구부에 가입해 남들보다 몇 배 노력을 더 했지만, 당시 고교 축구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문일고에서 주전 자리를 잡지 못해 선수층이 얇은 숭실고로 전학을 갔다.
숭실고등학교 졸업 후 축구로는 대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고, 축구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공부를 시작해 중앙대학교 체육학과에 진학한다. 하지만 일반학생으로서 축구부에 들어가기는 또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결국 인천전문대에 입학하여 축구생활을 이어나간다. 이후 전국대회 4강에 진출하면서 당시 울산 현대 감독이었던 김호 감독의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 군문제부터 우선 해결하기 위해 상무에 입대했다.
상무를 거쳐 국민은행에서 뛰던 안익수는 1989년, 당시 새롭게 창단한 일화 천마에 입단하게 된다.

3. 선수 경력



3.1. 일화 천마 시절


하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고, 안익수도 입단 초반에는 계속해서 후보를 전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축구를 처음 시작할 때처럼 하루에 4번씩 연습을 하면서 박종환 감독의 눈에 들었고, 주전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1990년 시즌에 29경기를 뛰며 주전 수비수로 자리잡았으나, 1991년 울산 현대와 경기 중 송주석과 충돌해서 부상을 입게 된다. 꾸준한 재활에 임한 결과 1992년부터 다시 주전 수비수로 자리잡으며 일화의 리그 3연패(1993년~1995년)의 영광의 시절을 함께한다. 그 당시 안익수, 발레리 샤리체프(신의손), 겐나디 등이 버티던 일화의 수비는 리그 최강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상에 힘입어 1994년 김호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에 뽑혀 미국 월드컵에 나가기도 했다.
'''지금도, 안익수는 일화 천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레전드로 인정을 받고 있다.'''

3.2. 포항 스틸러스 시절


1996년 포항 스틸러스에 1억원에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안익수의 플레이를 눈여겨본 박성화 당시 포항 스틸러스 감독이 영입해온 것. 여담이지만 이 트레이드는 구단 수뇌부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라 이에 분노한 박종환 감독은 결국 감독직을 사퇴했다고 한다.
포항에 이적해서도 초창기에는 여러차례 고전했었다. 강력한 맨마킹을 기반으로 하던 일화의 3백에 익숙해져 있던 그에게 지역방어를 기본으로 삼는 포항의 4백수비는 그에게 낯선 것이었다. 그래서 시즌 초반에는 4백에 적응하지 못해 2군으로 내려가기도 했으나, 4백 시스템에 적응하면서 후반기에는 다시 1부리그로 올라올 수 있었다.
이후 FA컵 우승,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 등을 일궈내며 '''터미네이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후 1998년에 은퇴, 은퇴 이후 포항의 코치직 및 해외연수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이전에 제안이 왔던 친정 팀과의 약속을 거절하지 못해 일화의 코치로 부임하게 된다.

4. 지도자 경력



4.1. 성남 일화 코치 (1999~2005)


천안 일화 천마-성남 일화 천마의 코치를 맡으며 쓸 만한 2군 선수들을 여럿 발굴했는데, 대표적인 선수들이 바로 김철호, 장학영, 박우현. 2군을 전전하며 축구에 대한 의지를 잃어가던 김철호와 장학영을 발굴하여 리그의 주전으로 자리잡게 한 것이 안익수 감독의 공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때부터 자료를 통한 분석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K리그 감독 시절에도 리그에서 유일하게 직접 분석 자료를 활용하는 감독이었다.

4.2. 고양 대교 감독 (2006~2007)


2005년 성남과의 코치 계약 만료 후 영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으나 당시 WK리그 고양 대교의 감독을 맡고 있던 최추경 감독의 제안을 받고 고양 대교 감독에 취임했다. 원래 딱 1년만 맡으려 했으나 1년 뒤 최추경 감독의 죽음 이후 스승의 뜻을 잇고자 여자축구계에 잔류했다. 이후 고양 대교의 토대를 다지는데 주력하였으며, 여러가지 인프라 구축에도 많은 영향을 발휘하였다.

4.3.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7~2009)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2007년 12월 여자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여자대표팀 감독을 맡는 동안 본격적인 대표팀 세대교체를 시작했으며, 선수들에게 그동안 부족했던 대표 선수로서의 자세와 동기부여를 강조하고 조직력을 키웠다. 2009 베오그라드 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는 여자축구 역사상 첫 금메달을 따냈다.[1] 1년 뒤 2010 FIFA U-20 여자 월드컵 4강 진출부터 2015 FIFA 여자 월드컵 16강 진출, 평양의 기적까지 이어지는 여자축구 황금세대의 밑그림은 안익수의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4.4. FC 서울 수석코치 (2010)


이후 2010년에는 FC 서울의 수석코치를 맡아 넬루 빙가다 감독을 도와 리그를 제패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젊은 선수들로 이뤄진 탓에 07~09시즌 내내 부실한 멘탈로 결정적인 순간 떨어졌던 서울은 이 시즌에 베테랑들의 대거 영입과 단결력을 중시한 감독, 코치의 지도 아래 강력한 조직력을 자랑하는 팀으로 재탄생했다.[2]

4.5. 부산 아이파크 감독 (2011~2012)


2010년 FC 서울의 우승을 맛본 후, 정몽규 부산 아이파크 구단주의 제안을 받고 황선홍 감독이 포항으로 옮기면서 공석이 된 부산 아이파크의 감독을 맡게 된다. 감독 초반에는 아스날과 같은 유려한 패스축구를 구사하겠다고 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한 역습축구를 구사하는 팀 컬러를 구축했다.
이는 팀에 맞춰 전술을 짜는 안 감독의 성향 때문이다. 안익수 감독의 이상은 4-4-2를 바탕으로 한 전진패스로 이어가는 공격축구이다. 여자축구 대표팀에서도 비슷한 축구를 구사했다. 하지만 부산에선 팀 사정에 맞춰 쓰리백과 4-1-4-1을 사용하였다. 특히 리그 수위급 미드필더였으나 소속팀과 재계약이 실패로 끝나면서 선수 생활을 접으려던 김한윤을 데려오면서 안익수식 4-1-4-1은 빠르게 자리를 잡는다. 시즌 초반에는 수비축구라는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이후 강력한 수비력을 기반으로 상대팀을 옥죄면서 '''질식축구'''라는 질시 섞인 찬사를 들었다. 결국 2011년 리그 6위 및 리그컵 준우승을 달성한다.
2012년에는 리그 7위의 순위를 달성하며 부산 축구의 부활을 예고하였으나...'''여기까지가 그의 지도자 경력의 커리어 하이였다.'''

4.6. 성남 일화 감독 (2013)


2012년 말에 갑자기 성남행 루머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안익수 감독은 헛소리하지 마라는 식으로 대응하였으나 결국 2012년 말 뜬금없이 성남행이 확정되었다. 문선명 총재 사후 팀 해체 위기를 맞은 성남 프런트는 최악의 시즌을 보낸 신태용 감독을 선수 때와 마찬가지로[3] 헌신짝처럼 내쳐버리고 확실한 성과를 내줄 감독을 찾던 중 예전에 내팽개친 안익수 감독이 성과를 내는 것을 보고 정몽규 구단주에게 '''리그 발전을 위한 대승적 차원'''에서 허용해 줄 것을 여러차례 부탁했다. 하다 못해 같은 모기업 계열사 자매구단도 아니고 리그 경쟁팀에 유망한 감독을 내주는, 죽 쒀서 개 주는 꼴을 승낙할 사람이 어디있나 싶겠지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정몽규 구단주가 흔쾌히 동의했다! 부산을 안정적으로 이끄는 상황이었으나, 2년차에 접어들었을 때 안익수 감독과 정몽규 구단주의 사이는 틀어질 대로 틀어졌으며, 때마침 성남에서 제의가 들어왔기 때문에 얼씨구나 하고 제의에 응했다는[4] 소문이 있다.
비상하는 천마를 도화지에 그려내겠다는 포부로 시작한 안익수 감독은 이후 성남 일화에 피바람을 몰고 온다. 내보낸 선수만 해도 [5], 홍철, 김성환, 남궁웅, 임종은, 전현철 등 지난 시즌의 주전 혹은 준 주전급 선수만 해도 7명을 내쫓고 대신 다른 선수들로 리그를 대체한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될 때까지 영입을 다 끝마치지 못해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결국 3월 말이 되어서야 리그 영입을 마무리 하였다. 시즌 초반에는 병신공의 재림을 보여주는것과 같은 경기 내용을 보여 한때 리그 꼴찌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으나 이후 전북을 시작으로 서울, 울산 등 강호와의 경기를 쓸어담는 위엄을 보이며 스플릿 전 시즌 전반기를 5승 3무 5패로 마감하였다.
후반기에도 약간의 호성적을 거두며 드디어 상위 스플릿에 드나 했더니 전남과 대구 같은 약체에 밀리더니 마지막 경남전에서 한 골밖에 못 넣는 동안 선두 포항이 부산에 패하며 득점 1 차이로 8위, 다시 하위 스플릿으로 들어갔다. 하위 스플릿에서 제주와 수위를 놓고 다투며 강등권과 격차를 벌리고는 최종 8위를 기록했다.
2013 시즌 후 일화가 지원을 포기함에 따라 성남 일화 축구단이 시민구단으로 전환되어 성남 FC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옛 스승인 박종환 감독의 선임 발표와 함께 감독직에서 물러났다.[6]
그리고…

4.7. 대한민국 U-20 감독 (2014~2016)


'''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김상호호 '''

''' 안익수호 '''

''' 신태용호(U-20) '''
김상호 감독의 후임으로 U-20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국내 개최가 확정된 2017년 FIFA U-20 월드컵에 참가할 연령대의 선수들을 지도하게 된다.#
2015 발렌틴 그라나트킨 국제 유소년 축구대회에 출전[7]하여 1라운드에서 핀란드와 모스크바 선발팀을 상대로 1승 1무, 2라운드에서 아제르바이잔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선발팀에 2승을 거두어 결승에 올랐다. 결승 상대는 러시아로, 선제골을 넣었지만, 후반에 역전을 허용하면서 아쉽게 준우승으로 마무리 지었다.
2015년 수원 JS컵에 개최국 한국을 비롯하여 우루과이, 벨기에, 프랑스와 참가하게되었다. 22인의 최종멤버에서 이승우와 백승호가 발탁이 된 것에 대해서 화제가 되었다.
4월 29일 JS컵 첫 경기 우루과이전에는 후반 임민혁의 스루패스를 받은 이동준이 1골을 넣어 1:0으로 짜릿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전반전에 거센 우루과이의 압박에 고전하는 듯 하였으나 교체멤버들의 맹활약으로 후반전에는 흐름을 바꾸어 좋은 경기를 펼쳤다는 것이 포인트. 이 날 특히 빛났던 것은 수비전술이였는데 뛰어난 공격수를 가지고 있는 우루과이를 상대로 박스 안에서의 위협적인 슈팅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는것이 고무적이다. 특히 이 날 주목을 받았던 선수는 임민혁인데 넓은 시야와 준수한 킥력을 통한 스루패스로 공격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5월 1일 벨기에전에서는 우리가 상대방을 압도하는 경기력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마무리 부족으로 0:0으로 끝마치게 되었다. 미드필더로 출전했던 박한빈과 한찬희가 중원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 두드러진 점이었다. 또한 철벽수비로 이번 경기에도 무실점을 이어나갔던 것은 덤이다.
그리고 5월 3일 프랑스전에서는 0:1로 패했다. 이 날 다른 경기와 크게 다른 점은 이승우와 백승호의 투톱을 가동했다는 점인데, 프랑스의 강한 압박전술에 백승호-이승우의 투톱이 제대로 볼 배급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컸다. 상대가 라인을 올리고 촘촘한 간격을 유지하여 강한 압박전술을 사용하는 것을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빈 공간을 노리기 위해 강지훈과 임민혁 그리고 김대원을 투입하여 반격을 해보려고 하지만 오히려 1골을 실점하여 그대로 0:1 패배를 하였다. 이 날 패인 중에 하나는 한찬희와 박한빈 두 미드필더의 방전이었는데, 강한 압박을 풀어내고 백승호와 이승우에게 볼 배급을 해주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는 점이 컸다. 이 날 투톱 자리에 하나를 맡은 백승호는 전반 45분동안 뛰었는데 투톱 자리에서의 전술적인 이해도 부재와 부족한 경기감각 때문인지 활동폭이 줄어들었고 한찬희와 박한빈의 고립이 심화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날 안익수는 백승호와 이승우의 투톱을 이용하여 바르샤 듀오의 공격에서의 창의성과 파괴력이 돋보이는 움직임을 기대해보려고 하였으나 전술적으로 실패했다는 평이다.[8]
종합적으로 마지막 프랑스전에서의 전술적 실패로 숙제를 남기긴 했지만, 강팀을 상대로 1승 1무 1패를 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라 볼 수 있다.
2016년 JS컵에서는 이승우와 백승호를 소집하지 않았는데 이제 경기력도 충분히 올라온 선수들을 왜 뽑지않았냐고 해축팬들의 분노를 샀다. 허나 사실은 바르셀로나에서 입지를 더 다지라고 일부러 제외한 것이다. 물론, 뽑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한 명분일수도 있긴 하나, 그저 이 두명을 뺐다고 컵을 안본다느니 기대도 안한다느니 하는건 해축팬들의 막되먹은 팬심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브라질과 비기고 프랑스를 꺾는 등 2승 1무로 우승하면서 성적도 우수했고, 2살을 월반한 고교생 공격수 조영욱을 발굴하는 등[9] 실리도 챙겼다.
2016년 10월에 열릴 AFC U-19 선수권을 한 달 남기고 준비차 참가한 카타르 4개국 친선대회에선 1승 2무 1패로 3위를 기록했다. 다만, 안익수 감독은 친선대회가 선수들의 경기력을 확인하기 위한 대회로 어디까지나 거쳐가는 과정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AFC U-19 대회에서 우승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2016년 AFC U-19 챔피언십 조별예선에서는 2승을 거두었으나 결국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에 1:2로 패하면서 2승을 거두었음에도 똑같이 2승1패를 기록한 바레인, 태국에 밀려 조별 광탈했다. 2승1패로 탈락했으니 다소 억울하다는 평도 있으나 2승을 거둔 상대가 바레인, 태국인지라... 참고로 바레인은 8강에서 홈어드밴티지를 등에 업고도 베트남한테 털렸다. 차라리 바레인전에 먹힌 오프사이드 오심 실점을 핑계로 대는 게 더 설득력있다. 그 오심이 없었으면 같은 2승1패라도 골득실로 조1위로 진출하는 거였기 때문.[10] 그리고 만약 2017년 FIFA U-20 월드컵이 대한민국에서 개최되지 않았으면 '''그대로 출전도 못하고 광탈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국축팬들에게는 나노 단위로 까이고 있다.
결국 10월 24일,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처음에는 경질 기사가 나왔다가 나중에는 부랴부랴 하루 전에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다고 기사가 떴지만, 정황상 '''짤린 게 맞다'''[11] 그럼에도 안익수는 마지막까지 '''"나에게 계속 맡겼으면 내년 U-20 대회에서 4강에 올랐을 거임"'''이라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노답에 빠진 팀을 신태용 감독이 잘 추스려 비록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짧은시간 내에 16강에 진출시켰다.
이전까지 본문에서는 안익수 감독이 신태용의 처참한 성적 덕에 재평가 될 수 있었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부산 감독으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성남 감독직에서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고, U20 대표팀에서는 아시아 예선조차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안익수와 클럽 감독으로서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FA 컵 우승을 달성한 아시아 최고 수준의 감독인 신태용을 비교하며 후자의 감독의 평가가 뒤떨어진다고 평가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신태용 감독의 러시아 월드컵, 리우 올림픽, 한국 U20월드컵을 들먹이며 전임자의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고 평가한 부분이 존재했는데, 아시아 최강이자 아시아 월드컵 최다 연속 출전 기록 보유자이며, 월드컵 진출은 기본적인 기대치에 불과한 대한민국 대표팀이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라는 위기에 내몰렸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음에도 신태용 감독은 팀을 잘 추스려 월드컵 진출을 성공시켰고,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는 비록 탈락했지만 독일을 잡아내는 전무후무한 성과를 올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안익수 감독의 청소년 대표팀은 밥상은 커녕 아시아 조별 예선조차 통과해내지 못했는데 이것을 잘 차려진 밥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설령 이광종 감독이 잘 만들어둔 올림픽 대표팀이라 할지라도 숟가락을 얹은 것에 불과하다고 하기에는, 신태용 감독은 두달 남짓한 기간 동안 골짜기 세대라 평가 받는 세대를 아시아 대회 준우승, 올림픽 토너먼트 진출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이룩하는데 성공했다.
목표를 완벽하게 이루는데 실패했을지 언정 신태용 감독이 거둔 여러 성과가 감독 우승 커리어조차 없는, 경기력조차 좋지 못했던 안익수 감독에 미치지 못할 정도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단순히 신태용 감독을 평가 절하하려는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4.8. 선문대학교 감독 (2018~)


청소년 대표팀에서 물러난 후 2018년 선문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며, 3월 23일 U-리그 5권역 개막전에서 신경대에 2대0으로 승리하며 선문대 감독 부임 후 첫 승을 거두었다. 2018 시즌 최종 성적은 권역 4위.
2019년 5월 사임한 김현수 감독의 후임으로 서울 이랜드 FC 감독 부임 가능성이 점쳐졌지만 정정용 감독이 부임하였다.# 2019년 8월 KBSN배 전국추계대학축구연맹전 준우승을 차지했다. U리그에서도 권역 2위와 왕중왕전 4강 진출에 성공했다.
2020년 U리그 왕중왕전 우승을 차지하면서 선문대 부임 이후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선문대의 첫 번째 U리그 왕중왕전 우승이기도 하다.

5. 지도 스타일


이론으로는 국내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감독이다. 2000년부터 과 비디오 자료를 활용하여 선수들의 전술훈련 계획을 짜기도 했으며, 국내 감독 라이선스 중 최고인 P급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명지대학교 체육학과에서 "K리그와 EPL을 통한 실제 경기 시간과 경기 외 시간에 나타나는 축구 경기력 특성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철저히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선수 위주로 전술을 짜내는 편이다.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다 돌아온 박종우기성용 같은 플레이 스타일로 변신을 시도하려다 안익수 감독이 노발대발한 일화도 유명하다.
그만큼 선수들의 멘탈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2013년 성남 부임 직후에도 야심차게 영입한 유지노가 팀 훈련에서 태만한 모습을 보이자 바로 계약해지하고 이요한과 트레이드 시킨 모습이나, 성남 팬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던 김성환을 전지훈련 집결지에 늦었다는 이유로 바로 전지훈련 명단에서 제외시키고 끝내 강진욱과 트레이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문대에서 추계대학축구연맹전 준우승을 차지한 뒤 인터뷰에서 "나는 이제 더 이상 호랑이 선생님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지도 철학이 변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5.1. 비판


팀 사정에 맞춰 전술을 짜는 감독이지만, 선수진 구성을 할 때 지나치게 엄격한 면이 있다. 자신의 스타일에 맞지 않거나, 자신의 눈 밖에 한번 난 선수는 '''그 선수가 뛰는 포지션에 가용자원이 부족할지라도''' 쓰지도 않고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부산 아이파크 시절에 정성훈이승현을 판 탓에 정말 공격수가 없었지만, 에이스였던 박희도의 플레이 스타일이 개인적이란 이유로[12] 쓰지도 않고 2군에 박았던 적도 있는데, 부산은 시즌 끝까지 공격자원 부족으로 고전했다. 성남에서도 부임 직후에 김성환, 홍철 등 에이스급 선수들을 이적시키고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선수들을 영입했는데, 2013 시즌 중반기가 넘어가면서 김성환의 대체자로 낙점했던 김철호의 부진이 겹쳐져 중원에서의 김성환의 존재감이 그리워지고 있다.
멘탈을 중요하게 여겨서 코치 시절엔 여러 선수들의 멘탈을 고쳤지만, 감독이 되고 나선 '''걍 내팽겨쳐 버린다.''' 이미지와 다르게 멘탈을 고쳐주기 보단 걍 본인 말 잘 듣는 선수들만 쓰는 것으로까지 비춰질 수도 있다.[13]
팀에 전술을 맞춘다는 장점도 성남에 온 이후 퇴색되었는데, 그놈의 4-4-2를 못 버린다. 그리고 괜히 잠구다가 못 잠궈서 내줄 뻔하거나 내준 경기가 한두 경기가 아니다. 양학을 못 한다는 비판도 있는데 근본적인 이유는 팀 자체가 김태환김동섭을 중심으로 한 역습에 최적화되어 있고 미들진에서 전진패스해 줄 능력이 딱히 없어서 걸어잠구고 나면 답이 없다.
따라서 중위권 팀에는 적합한 지도자일지 몰라도, 상위권 팀을 이끌기에는 부족한 지도자라는 평가가 있기도 하다.
다만 최근 답 없는 냄비 해축빠들을 중심으로 단순히 이승우를 중심으로 팀을 짜지 않는다거나, 이승우 장결희를 투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분명히 잘못이다. 팀을 어떻게 짜고 누구를 쓰는가는 감독의 고유 권한이며 특히 이승우는 어디까지나 아직 성인무대를 제대로 밟아보지 못한 유소년 유망주일 뿐이다.
이승우가 앞으로 메시만큼 성장할지는 모르지만 당장은 나이가 더 많은 선수들보다 딱히 비교우위에 있지도 않다. 단순히 무턱대고 유명한 선수를 쓰지 않는다고 까는건 축구에서 연령대 팀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근시안적인 비난에 불과할 뿐이다. 비슷한 이유로 심지어 더 상급레벨의 올림픽대표팀 신태용 감독도 비난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양해야 할 일이다.
안익수가 U-20 대표팀에서 백승호나 이승우를 쓰는 모습이 좋았다 라고 말할 수는 절대로 없으나, 백승호와 이승우가 프로에서 겪는 어려움을 보면 결국 답없는 냄비 해축빠들이 간판에만 눈 돌아가서 경력 있는 감독을 꾸준히 믿어주지 못하고, 유소년 선수가 잘하면 10배로 부풀리고 못하면 눈감는 그런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한국 학원축구의 병폐와 한국 특유의 꼰대라고 해축빠들은 눈돌아가서 안익수를 비난했지만 그런 냄비 해축빠들이야말로 학벌이나 간판에 눈돌아가는 고유종특을 잘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로도 전혀 발전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경질당해 국가대표팀을 떠나게 되었다. 결과를 내지 못하는 우직함이 이제는 통하지 않고, 믿어줄만한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6. 기타



[1] 당시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는 지소연을 비롯해 조소현, 전가을, 권하늘, 김도연(축구선수), 심서연, 임선주, 유영아, 이은미, 김수연 등 여자축구 황금세대의 주역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2] 때문에 일부 축구팬들은 2013년 대표팀 내분 사태가 불거지자 안익수 감독이 대표팀 맡아서 뜯어고쳐야 한다고 탄식했다.[3] 현역 시절 K리그와 성남의 레전드이자 프렌차이즈 스타인데도 은퇴식도 치뤄 주지 않고 유니폼을 벗겼다.[4] 이 시기 대한축구협회 회장 선거를 앞두고 한창 허승표 후보와 접전을 벌인만큼 축구팬들 사이에선 모종의 딜이 있었으리란 설이 지배적이다.[5] 이들은 마음도 없는 구단에 남아 있는 게 독이었다.[6] 그때 마침 프로축구연맹에서 후원하는 지도자 연수차 영국에 가 있던 상태에서 해임되었다.[7] 한국과 개최국 러시아를 비롯,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그리스, 일본, 카자흐스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18팀이 참가했다.[8] 안익수는 U-18 대표팀을 맡으면서 미드필더를 원톱이나 투톱 자리에 자주 기용을 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러시아에서 열린 유소년 축구 대회에서 한찬희를 주로 원톱으로 기용했다는 점이 대표적.[9] 포텐으로 비교하면 황희찬에 비견되는 스트라이커로 2016년 들어 안익수가 소집훈련에 꾸준히 소집하며 관심을 보인 선수다. JS컵에서 공식무대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고 일본전에서 결승골을 넣었다.[10] 최종수비보다 거의 5미터를 앞서 있는 선수가 골을 넣었는데 승부조작급 오심으로 득점이 인정되었다. 35초경부터[11] 국내 축구계의 고질적인 병폐이기도 한데, 감독이 자진사퇴를 하면 잔여연봉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구단이나 협회에서 경질하더라도 표면상으로는 자진 사퇴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12] 전임 황선홍 감독이 에이스 박희도 중심으로 팀 전술을 맞춰놓았다.[13] 비판할 거리도 못된다. 그 유럽지도자들서도 흔히 볼수있는 형태다. 거기서는 아예 유소년 지도자부터가 자기가 말한 방식에 못따라오면 아예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