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지

 

'''김병지의 수상 이력'''

'''1996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라데
FW
세르게이
MF
신태용
MF
바데아
MF
홍명보
MF
하석주
MF
김현석
DF
윤성효
DF
김주성
DF
허기태
GK
'''김병지'''
'''1998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김현석
FW
샤샤
MF
고종수
MF
유상철
MF
백승철
MF
안정환
MF
정정수
DF
안익수
DF
마시엘
DF
이임생
GK
'''김병지'''
'''2005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박주영
FW
마차도
MF
김두현
MF
이천수
MF
이호
MF
조원희
DF
임중용
DF
유경렬
DF
조용형
DF
김영철
GK
'''김병지'''
'''2007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이근호
FW
까보레
MF
따바레즈
MF
이관우
MF
김기동
MF
김두현
DF
아디
DF
마토
DF
황재원
DF

GK
'''김병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Korea Football Association'''
''' 이름 '''
'''김병지'''
'''金秉址 / Kim Byung-Ji'''
''' 출생 '''
1970년 5월 12일[1] (53세)
경상남도 밀양군 무안면[2]
''' 국적 '''
[image] 대한민국
''' 신체 '''
: 182cm | 체중: 82kg|혈액형: B형
''' 직업 '''
축구선수 (골키퍼 / 은퇴)
축구행정가
''' 소속 '''
''' 선수 '''
상무 축구단 (1990~1992)
'''울산 현대 호랑이 (1992~2000)
'''포항 스틸러스 (2001~2005)
FC 서울 (2006~2008)
경남 FC (2009~2012)
전남 드래곤즈 (2013~2015)
''' 행정가 '''
대한축구협회 (2021~/부회장)
''' 국가대표 '''
61경기 72실점 (대한민국)
''' 병역 '''
국군체육부대 병장 만기전역
''' 관련 링크'''
| [3] [4]
1. 소개
2. 경력
2.1. 클럽
2.3.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2.4. 은퇴 후
3. 출연작
3.1. 영화
4. 해설가
5. 축구 행정가
7. 꽁병지tv
8. 사건사고/논란
8.1. 아들의 또래 폭행 의혹
8.1.1. 시작
8.1.2. 상대 학부모측의 거짓주장과 언론의 마녀사냥
8.1.3. 진실
8.2. 장현수 징계 발언 논란
9. 여담
10. 같이 보기

[clearfix]

1. 소개


'''내 뒤에 공은 없다.'''

'''"우리는 더 많은 득점을 할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의 골키퍼(김병지)가 너무 뛰어나서 더 많은 골을 넣지 못했다."'''

1998년의 네덜란드전 당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은퇴 후에는 스포츠 해설가 및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다.
2021년 1월 27일, 대한축구협회 부회장[5]을 맡게 됐다. #

2. 경력



2.1. 클럽


[image]

2.1.1. 유소년 시절


밀양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고등학교와 성인 초기에 워낙 곤경이 많았어서 축구 자체를 늦게 시작했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잘못된 정보다.[6]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는 무난한 축구인생을 보냈지만 이후 골키퍼임에도 키가 자라지 않아 마산공고 1,2학년을 축구부로 못 간 채 보내야 했다. 당시 감독이 체격이 클 때까지 쉬다 오라며 돌려보냈다고 한다.[7] 이후 163cm였던 키가 180대로 자라서 다시 축구부를 찾아갔을 땐 김병지의 자리를 다른 선수가 이미 채운 뒤인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김병지는 고3에 부산 소년의집(현 알로이시오 전자고등학교)으로 전학을 택했고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대학 진학이 실패로 끝난 후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축구를 계속 하기 위해[8] 입시학원까지 다니며 준비했지만, 김병지가 일반 학생들처럼 계속 공부를 해온 게 아니다 보니 뜻을 이루지 못했다.

2.1.2. 아마추어 시절(금성산전 직장인 팀, 상무 축구단)


김병지의 첫 번째 성인 축구팀은 지금의 위상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직장인 팀이었다. 해군사관학교 시험 불합격 후 창원 금성산전(현 오티스 엘리베이터)에 입사해 검사실에서 일했고, 근무 시간이 끝나면 이 회사의 직장인 팀에서 경기감각을 유지했다. 당시 직장인 리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업이 많아서 선수출신 직원을 따로 스카웃할 정도로 리그 수준이 좋았던데다 김병지 본인의 말에 따르면 프로나 실업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안정적인 삶을 위해 직장에 ‘취업한 선수’가 많다 보니 자신의 커리어가 오히려 평범한 편이었다고.
1989년 말 영장이 나왔고, 고졸 출신이어서 병역을 연기할 수 없던 김병지는 1990년 당시 존재했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국군체육부대의 테스트를 통해 상무 축구단에 입대했다. 30개월 동안 복무하면서 80여 경기를 소화하다 보니 자신감이 붙었고, 실제로 프로에 진출하게 돼 김병지는 현재도 군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1991년 12월 진행됐던 신인 드래프트에 지원했다. 상무에서의 활약이 워낙 좋았어서인지 드래프트에 지명되지 않아도 92년 7월에 전역하면 유공 코끼리에서 그를 데려가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드래프트에서는 아쉽게 지명되지 않았고, 김병지는 드래프트 당일 오후 있었던 상무와 현대 호랑이가 맞붙은 연습경기를 뛰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현대 호랑이에서 김병지를 추가지명하며 프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됐다.

2.1.3. 현대 호랑이-울산 현대 호랑이 시절


1992년 7월 전역과 함께 울산 현대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이를 시작으로 2015 시즌까지 '''무려 24시즌을 현역으로 뛰었다.''' K리그는 2015년 기준으로 32시즌이다. 세계에서 몇 남지 않은 현역 1998 월드컵 출전자였으며[9] 그가 '''2016년 7월 20일 은퇴'''한 뒤 2002 월드컵 현역멤버는 17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현영민만 남아 있었을 정도.
1995년, 발레리 사리체프를 앞세운 천안 일화 천마의 3연속 우승 쇼크에 울산 현대를 제외한 K리그 전 구단이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는 붐이 일어났을 때도, 그만은 토종 골키퍼의 자존심을 지켰다. 덤으로 울산 현대는 골키퍼 명가의 명성을 이어 간다.[10]
울산 현대 호랑이의 1996년 K리그 '''우승'''과 1998년 K리그 '''준우승'''에 일조한다. 특히 1998년 포항과의 PO 2차전에서 보여준 헤딩 골은 많은 팬들에게 회자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당시 상황은 1:1, 후반전 추가 시간, 울산이 프리킥을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김병지가 포항의 페널티 에어리어를 향해 달려왔고 때마침 올라온 골을 그대로 헤딩, K리그 사상 최초로 골키퍼 필드 골을 넣었고 플레이오프 1, 2차전 합계 스코어 4:4를 만들면서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11] 결국, 팀은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여 결승에 진출했다.[12]

2.1.4. 포항 스틸러스 시절


2001년에는 국내 선수 최고 이적료를 받고 울산의 최대 라이벌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 2004년 K리그 '''준우승'''에 여러모로 일조했다. 수원과의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서는 말 그대로 야신 모드로 엄청난 슈퍼세이브를 경기 내내 보여주며 무승부를 이끌어 냈다. 2차전 승부차기에서는 포항의 5번째 키커로 등장했는데, 김병지가 실패하면 수원의 승리가 되는 상황이었다. 김병지가 찬 공은 결국 영원한 라이벌 이운재의 손에 막히며 팀도 패하고, 본인도 라이벌에게 패하는 아픔을 겪었다.

2.1.5. FC 서울 시절


2006년에는 FC 서울로 이적하여 2006년 팀의 하우젠 컵 우승에 공헌하고 2007 시즌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2005년에는 통산 무실점 기록[13]을 경신하였다. 2006년 K리그 사상 2번째로 4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고 그 해 최다출장기록을 경신했다. 2007년에는 통산 최다 무교체 출장기록을 153경기로 경신했다. 이 기록은 칠레와의 A매치 경기에서 입은 부상[14] 때문에 마감되었다. 이 때 부상으로 잠시 전열에서 이탈한 사이 후배 골키퍼 김호준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고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던 귀네슈 감독의 의향에 따라 2008 시즌에는 김호준의 백업으로 머물게 된다. 이것을 크게 불쾌하게 여겨 이적 후 축구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주전이었다면 우승했을거라며 2008시즌 준우승에 머무른 서울과 귀네슈 감독을 디스했다.[15]
[image]
''' K리그 통산 500번째 경기 날 등번호 500번 유니폼을 들고 '''
[image]
''' K리그 통산 600번째 경기 날 경남의 모든 선수가 기념 티셔츠를 입었다 '''
[image]
<color=#373a3c> ''' 세 아들과 함께 시축을 한 그의 K리그 통산[16] 700번째 경기날!'''

2.1.6. 경남 FC 시절


서울에서 주전 기회를 받지 못하는 걸 참을 수 없었던 김병지는 2009년 고향 팀인 경남 FC플레잉 코치 신분으로 이적한다. 비록 팀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그는 5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당시 등번호 500번 유니폼을 제작했는데, 처음에는 프로연맹에서 반대하였지만 이후 500번째 경기에서 500번 유니폼 착용을 허락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날 경기에서 4골이나 먹는 바람에 통산 500실점이라는 그다지 썩 좋지 못한 기록을 세웠다#.
2012년 6월 27일 통산 200번째 클린시트를 달성하였다. '''2012년 10월 7일, 서울을 상대로 대망의 6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
2012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는데, 경남 FC 주전 수비수 이재명과 함께 전남행이 유력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2.1.7. 전남 드래곤즈 시절


결국 전남 드래곤즈로의 이적을 합의했다.# 여담으로, 김병지 슬하의 아들 셋이 모두 축구를 하는데, 모두 전남 드래곤즈의 유스 팀으로 옮긴다고 한다.
특이한 것이 경남 시절에는 분명 플레잉 코치로 입단했는데, 전남에 와선 플레잉 코치가 아닌 선수로 입단했다. 이 때 그의 나이 '''43세'''. 참고로 김병지가 전남에 입단하기 전, 전남의 주전 키퍼는 다름 아닌 '''이운재'''다.[17]
게다가 하석주 감독과는 겨우 3살 차이. 그나마도 하석주가 2014시즌을 끝으로 물러나고 수석 코치인 노상래가 감독을 하면서 코치진이 리뉴얼되었는데, '''김병지보다 나이 많은 코치가 한 명도 없다.'''[18]
그리고 2015년 7월 26일, '''대망의 700경기 출전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700번째 경기에서 제주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3대 1로 승리를 했다. 777번째 경기가 자신의 은퇴 경기가 될 거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번 700경기 인터뷰에서 아버지 뒤를 이어 축구를 하고 있는 장남 김태백 군이 프로에 데뷔할 때까지 뛸 거라고 하니까 어쩌면 777경기보다 더 오래할지도 모른다. ##
2015 시즌 종료 후 계약 만료로 이적시장에 나왔다. 그러나 이미 40대 중반의 최고령인데다가 후술할 막내아들 폭행사건 수습의 영향으로 2016 시즌 전반기엔 소속팀을 구하지 못하고 무적으로 남았다.
2016년 7월 19일, 김병지는 본인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최고령의 나이에 6개월의 공백 기간이 있었고, 커리어가 워낙 긴 이상 결코 저렴하지 않을 몸값(대우), 또 앞서 말한 사생활 이슈가 결국 그를 은퇴의 길로 끌고 갔다. 기사 링크 K리그 최고의 선수라 부를 수 있는 선수가 이렇게 그라운드 밖으로 나아갔다. 통산 706경기 출장, 229경기 무실점, K리그 최고령 출장(45년 5개월 15일)의 대기록을 남긴 채.
은퇴식은 그의 프로 첫 팀 울산 현대의 주최 하에 2016년 9월 18일 일요일 전성기를 보낸 또다른 소속팀이었던 포항 스틸러스와의 울산문수축구경기장 경기에서 열렸다.

2.2. 국가대표


[image]
1995년 6월 5일 코리아컵 코스타리카전을 통해 A매치에 데뷔했다. 국가대표팀의 간판 골키퍼로 활약했으며,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맹활약한다. 특히 최고의 명장면은 조예선 2차전 네덜란드전이었다. 팀은 그야말로 떡실신 당했지만 김병지는 빛났다.
김병지의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활약

데니스 베르캄프와의 1대1 경합
[image]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네덜란드는 우승후보로 꼽히는 명실상부 최고의 팀[19]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선수진은 데니스 베르캄프, 에드가 다비즈,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에드빈 판데르사르, 야프 스탐, 프랑크 더부르 등 축구계에서 손꼽힐 만한 선수들이 모여있었다. 그런 팀을 상대로 한국은 5대0 패배를 당하고 결국 차범근 감독이 해임되었다.
한국은 3-6-1 포메이션에서 선수비 후역습으로 어느 정도 상대의 측면돌파를 윙백이 끊어주고 중앙에서 강하게 압박을 시도하는 전술을 가지고 나왔으나 1차 저지선이어야 할 허리라인은 상대의 현란한 개인기와 패스 조합에 우왕좌왕하다 헝클어지면서 윙백의 부담이 커진데다가, 레프트 윙어인 오베르마스를 위시한 네덜란드의 윙플레이어들의 미친 돌파력으로 윙백들이 최후방라인보다 더 내려가게 되어 쓸모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협력수비 한답시고 다들 공이 가는 곳마다 몰려다녀 정작 베르캄프 등의 공격수를 놓치면서 공간이 호남평야마냥 훤하게 드러나 침투도 용이해지는 바람에 골키퍼의 부담의 가중까지 미쳐 올라가는 지라 한마디로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그렇게 17개의 유효 슈팅을 허용했는데 5실점 밖에 하지 않은 건 김병지의 눈부신 선방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히딩크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우리는 더 많은 득점을 할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의 골키퍼가 너무 뛰어나서 더 많은 골을 넣지 못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후에 히딩크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맡게 되었을 때 인터뷰 내용중 프랑스 월드컵에서 김병지의 활약을 언급하자 월드컵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골키퍼가 있다는 것은 팀에게도 감독에게도 좋은 일이며 더구나 그 때 김병지가 가장 인상에 깊게 남았었는데 그와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20]
1998년 월드컵에서 한국은 3경기 다 합쳐서 슈팅 57개, 유효 슈팅 32개를 허용했고 김병지는 19세이브, 12스틸, 9실점을 기록했다.[21] 기록
월드컵이 끝나고 당시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선덜랜드 AFC에게 정식 영입 제의를 받기도 했다. 과거에는 언어 문제로 본인이 고사했다고 알려졌으나 2020년에 김병지가 본인 유튜브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본인은 월드컵 종료 후 구단에 복귀하지 않으며 항명했을 정도로 진출을 강하게 희망했으나 울산 구단에서 강제로 막았다고 한다. '''90년대 K리그 구단들은 입단 계약서에 계약종료 날짜가 없어서''' 강제 원클럽맨 신세였고 눈 밖에 나면 일부러 경기에 안 내보내고, 2군으로 보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고 한다. 입단 계약서가 노비 문서였던 셈인데 90년대 있으나 마나했던 한국의 노동법 실태가 축구계에 한층 열악하게 드러난 것이다. 2001년 MBC가 연제협의 노비 문서 실태를 고발하여 먼저 터진 뒤부터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나마 김병지는 이미 대중적인 인지도가 어마어마한 스타선수이자 자타공인 No.1 골키퍼였기에 구단이 불이익을 주거나 하지 않고 외국구단 제시액보다 연봉을 더 줘서 회유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한다.
사실 94년 브라질 플라멩구 오퍼를 시작으로 97년부터 98 월드컵 즈음해서 선더랜드와 노리치, 프랑스 리그 1~2팀의 오퍼가 있었다고 한다. 저때 당시는 EPL이 최강 시절은 아니고, 세리에 A가 넘사벽 최강이었고 그리고 리그앙은 한 3~4위 리그 정도 되던 상위리그 시절이었다. 유럽 상위팀은 주전이 어려워도 중하위권팀은 자기와 비슷한 기량의 유럽 골키퍼들이 많이 뛰고 있어서 도전해볼 생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이적에 대한 피파룰에 몰랐었고 당시 관행이었던 종신계약과 울산 현대의 완강한 반대로 잔류해버렸다. 해외로 이적을 위한 항명까지 했지만 해외에서 제시한 연봉을 환율로 계산해서 더 주는 것으로 해버렸다고 한다. 계약서에는 계약기간도 없어서 무조건 원클럽맨이였고 그게 90년대 말까지 지속돼서 이적이 어려웠다고 한다.

어이없어하는 거스 히딩크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는 핌 베어백의 모습이 압권이다.
이런 뛰어난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지만, 2001년 1월 칼스버그컵 파라과이 전에서 무리하게 공을 몰고 가다 상대 미드필더인 구스타보 모리니고에게 공을 빼앗기는 아찔한 실수를 벌였고, 결국 후반전에 교체되고 말았다. 비록 대한민국이 승부차기에서 승리했지만 이 경기 이후 거스 히딩크 감독의 눈 밖에 나게 되면서 한동안 대표팀에서 볼 수 없었다. 이후 이 드리블은 은퇴한 지금까지 김병지를 쫒아다니는 상징적인 플레이가 되어버렸는데 김병지 본인은 2018년 개인 유튜브 꽁병지tv와 언론 인터뷰나 가짜사나이 면접 등 당시 드리블에 대해 묻는 다양한 매체에서 드리블과 실패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만큼 후회하지 않지만 그 이후 자신의 태도는 후회스럽다고 소회를 밝혔다. 자신의 실수이니 바로 인정했어야 했는데 '내가 김병지인데'라는 혈기에 먼저 사과하고 히딩크 감독과의 응어리를 풀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2002년 월드컵까지 부침을 겪으며 선수와 감독과의 관계, 고참으로서의 자세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게 700경기 넘게 뛰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고 밝혔다.
이후 절치부심하여 리그에서 성실한 모습을 보이자 그 해 11월에 다시 대표팀에 합류하게 되었고, 2002년 월드컵 엔트리에도 포함되면서 자신의 두 번째 월드컵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월드컵 직전까지 이운재와 함께 교대로 선발 출전하면서 선발 경쟁을 벌였지만 월드컵에서는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벤치에서 4강 진출의 기쁨을 맛봐야 했다.''' 히딩크 감독 자서전에 의하면 이운재김병지 두 선수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으나, 이운재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지속적으로 출전시켰다고 한다. 골키퍼 문제는 히딩크가 월드컵 개막직전까지 고민했는데, 이운재를 낙점하고 김병지에게 개인적으로 찾아가 주전 키퍼로 이운재를 낙점했지만, 자신의 질책을 받아들이고 성실히 훈련에 임해온 김병지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김병지도 이에 대해서는 히딩크에게 원망을 표하지 않았고, 히딩크는 이후로도 별말없이 성실히 훈련에 임하는 김병지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다만 선수로써 최전성기 때 고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뛴다는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친 것은 역시 한이 되는지 후에 히딩크와 2002년에 대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는 식의 발언을 몇차례 했다. 4강에서 패배한 뒤라 3/4위전은 자신에게 기회를 줄 거라 생각했는데 끝까지 출전을 못해서 원망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성적과 관련이 거의 없는 마지막 경기고 축제 분위기였던 만큼 후보인 자신이 뛸 수 있지 않을까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3, 4위전은 후보 선수나 출전하지 못하는 선수들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이후에도 대표팀의 주전 수문장은 이운재로 고정되어 가게 되는데, 김영광이나 김용대 등 젊은 골키퍼들도 두각을 나타내었고 한일 월드컵 이후 외국인 감독들이 국제경험이 많으면서 최근 월드컵을 경험한 이운재를 중심으로 삼게되면서 자연적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되곤 하였다. 그러나 2004~2005 두 시즌 간 이운재의 리그와 대표팀에서의 기량정체 및 저하로 언론과 축구팬들 사이에서 독일 월드컵 대표팀의 부동의 1번에 의구심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대표팀 재입성이 재기되었다. 실제로 기록만으로 본다면 이운재는 1점대 이상의 실점률을, 김병지는 0점대의 실점률을 보이며 수치상으로는 이운재를 압도하는 중인데다가 이운재의 소속팀은 그 유명한 K리그 대표팀 중의 하나인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즐비한 수원 블루윙즈였지만 김병지는 과거의 전통명문 구단이면서도 중위권 팀으로 수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력이 열세인 포항 스틸러스 소속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비교가 되었다.[22]
이 현상에 대해 이운재는 "좋은 후배들이 많기 때문에 김병지가 대표팀에 돌아오면 후배들의 앞길을 틀어막는다."며 디스를 시전하였고 얼마 뒤 김병지가 "너나 똑바로 해라. 네가 얼마나 대표팀에서 빙다리 핫바지식으로 굴었으면 나를 찾는가?? 내가 돌아갈 정도면 네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입을 놀리는 것인가??"라는 식의 맞디스를 날리면서 으르렁거리는 상황이 펼져졌고 양 선수들의 팬들까지 서로 '파라과이전 무한돌파 실패한 벤치멤버', '운동도 안하고 살만찌는 돼랑이'라고 온라인에서 물어뜯으며 국가대표팀 엔트리 발표일까지 두 선수의 향방이 주목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는 뭐...[23] 이후 2007년 아시안컵 음주 파동에 휘말린 이운재를 대신해 오랜만에 대표팀에 복귀했으나, 2008년 1월 칠레와의 경기에서 허리 부상을 당하면서 다시 아웃된다. 이후 국가대표는 본인이 후배들을 위해서 길을 터줘야 한다며 사실상 국가대표 자리에서 은퇴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선언했다.

2.3.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뛰어난 동물적인 판단력으로 많은 선방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때로는 미리 예측하는 플레이로 역방향에 걸려 실점하는 경우도 있어 호불호가 갈리는 의견들이 있으나, 아시아 정상급의 순발력과, 탁월한 반사신경을 기반으로한 1대1 방어, 좋은 킥력 등 골키퍼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 준족을 살린(100m 11초 주파) 넓은 수비범위를 자랑하며, 골키퍼로서 큰 키가 아니지만 점프력이 좋아 공중볼 처리에도 능했다. 킥은 한국 골키퍼 중 최고 수준. 동시대에 김병지와 견줄만한 킥을 가진 골키퍼는 이용발뿐이며 후배 중에도 정성룡 정도로, '''60미터 거리의 선수에게 정확하게 패스를 보낼 수 있다.'''(7분 56초부터) 그리고 '''55미터 거리의 물통에도 10번만에 공을 차서 넣기도 한다!'''[24]
전진수비가 많고 골키퍼임에도 공을 차고 앞으로 나가는 돌출행동을 할 때가 있어, 이운재보다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이건 정말 억울한 평가이다. 히딩크 감독 시절의 기억이 깊게 남은 탓이지, 커리어 전체로 보면 돌출 행동이 많은 선수가 결코 아니며 전진 수비로 인한 실점도 적었던 선수다. K리그 통산 클린시트 횟수 1위에 올라 있다는 점이 이를 입증해 준다.
2010년대에 마누엘 노이어가 안정된 볼처리와 킥, 반응속도를 근간으로 전진수비에 가담하며 대표적인 스위퍼 키퍼로 주목받자 마찬가지로 과거 전진수비로 스위퍼 역할을 겸업한 김병지 또한 우리나라 내에서 재조명되고 있다.[25] 노이어 역시 전술한 김병지의 드리블 실패처럼,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조별리그 대한민국 vs 독일전에서 후반전 추가시간 무리하게 전진하다 볼을 뺏기고 손흥민의 쐐기골 허용의 빌미를 제공했지만 이는 경우가 전혀 다르다. 독일은 득점이 없으면 어차피 탈락이기 때문에 최후의 수단으로 골키퍼까지 공격에 투입된 것이다.
한편 실제 실력 및 평가와는 별개로, 축구 팬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김병지하면 쉽게 떠올리는 부분은 수비 실력과 함께 '드리블하는 골키퍼'란 이미지일 정도로 이 이미지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깊이 남아 있다. 김병지 본인도 이벤트 경기나 방송에 출연하면 이를 자학 개그 형태의 기믹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 관리를 굉장히 잘했던 선수로 유명하다. 술과 담배를 일절 하지 않았으며 선수 시절 항상 거의 같은 몸무게를 유지했다고 한다. 김병지가 스스로 정한 자기 관리 수칙만 해도 100가지가 된다고 한다. 덕분에 45살까지 프로 선수로 뛸 수 있었다. 거기다 김병지는 골키퍼치고 키가 상당히 작은데[26] 이런 키 작은 골키퍼들은 아무리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이 좋아도 노쇠화가 오면 신체적으로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27] 하지만 그가 40대가 돼서까지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철저한 자기관리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4. 은퇴 후


은퇴 직후 자신의 이름을 딴 '김병지축구재단'을 통한 활동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2016년 중부대학교 골프지도학과에 입학해 화제가 되었고 2016년 10월에는 수원 인계동에 재활전문치료센터를 오픈했다.
2017년 11월 19일에 교통사고를 당했다.기사 차가 크게 파괴되지 않아 별 일 없는 줄 알았지만 후유증으로 디스크 파열로 인해 신경이 마비되었고 수술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 이후 다리에 마비가 왔는데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본인의 SNS로 미루어보아 생각보다 큰 사고였던듯하다. 이후 상당히 호전 되었으며, SPOTV 해설에도 복귀했다. 2018년 하반기 쯤엔 운동은 물론이고 공도 잘 차는 걸 보면 거의 완쾌된 듯하다.
2018년 11월 29일 꽁병지tv 라이브에서 김민구 해설위원이 밝히길 그 다음날 치질수술(..)을 받는다고.. 이후 언급이 없는 걸 보면 무소식이 희소식인 듯.
2019년 FK컵에서 김형범과 같이 서울 은평 나인티플러스 소속으로 출전한 바 있으며 스타FS 서울과의 맞대결에서 11 : 4로 패하였다. 해당 경기 기록지
2020년 3월 15일에는 축구 예능 프로그램인 뭉쳐야 찬다 - 전설들의 조기축구에서 일일 코치로 출연해서 출연진들에게 축구 레슨을 하였다. 이 때 슛을 막는 시범을 보이고는 곧바로 '''드리블'''을 해서 웃음을 자아냈다. 또한 안정환을 비롯한 출연진들과 버럭거리는 디스전을 벌이면서 역시 웃음을 자아낸건 덤.
2020년 8월 21일 꽁병지tv에 가짜사나이 2기 지원을 위한 체력평가 영상을 업로드 하였다. 링크 역시 국가대표 클라스는 어디 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듯이 한국나이로 51세임에도 불구하고 푸쉬업 72개, 윗몸일으키기 56개 등 웬만한 20~30대 일반인들보다도 훨씬 월등한 체력을 보여주었다.\
2020년 9월 4일 가짜사나이 2기 면접 동영상이 업로드 되었다.링크 면접에 대해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대답을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며[28]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통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동안 보여준 장난스런 모습 이면에 그가 선수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던 진중하고 속깊은 그의 철학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스무살은 어린 친구들하고 같이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살아온 인생을 잠깐 얘기하겠다. 얼마전 제가 은퇴를 했다. 46살때. 20살 젊은 친구들이랑 다 경쟁을 하면서 살아왔고요. 또 얼마전 은퇴하기 전에는 저보다 나이 어린 감독과도 생활을 했었고 코치들도 전부 다 어린 친구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선수 생활을 같이 했었어요. 지금 염려하시는 그 모든 답은 여기 있다고 봐요. 조직안에 들어가면 그 조직에서 맡는 역할, 또 구성원으로 그런 책임감들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감독과 친구, 코치가 저보다 어리다고 하더라고 제가 견뎌냈던 이유가 그 중에 있고...

그리고 2020년 9월 24일 오후 8시 공개된 티저 영상에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출연이 확정되었다. 티저 영상 공개 후 꽁병지TV에 올린 영상에서 25년간 길러왔던 꽁지머리를 깎았음을 밝혔다. 무려 자식들조차 꽁지머리가 없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인데다 김계란마저 각오를 시험하기 위해서 한 얘기지 진짜로 깎으라고 한 건 아니라고 만류했지만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 밀었다고 한다.
가짜사나이에서 만난 머독 말로는 말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훈련소로 이동하는 도중에 카메라를 껐음에도 계속 말을 하면서 투머치토커의 기질을 보여줬다고.
영상이 공개 될 수록 인터뷰 만큼이나 인상 깊은 활약을 보이며 호평을 받고 있다. 대체로 최연장자로서의 배려와 리더십에 대한 칭찬이 많은 편.
2021년 1월 27일, 대한축구협회의 부회장을 맡게 됐다. 부회장은 분야를 나눠 총 6인으로, 김병지는 생활축구 및 저변확대 분야를 담당한다.#

3. 출연작



3.1. 영화



4. 해설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SPOTV의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너무 낮은 텐션과 어눌한 발음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데 이건 듣기 좀 불편할 수는 있어도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이다.[29]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는데 바로 종종 해설위원으로서의 자질이 의심되는 발언들을 많이 한다는 것.[30] 또 해설위원은 빨리 돌아가는 경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선 포인트를 잘 잡아 짧은 설명으로 이어줄 수 있어야 하는데 김병지는 말이 너무 장황하게 긴 편이다.
아무래도 선수 출신 해설가들과 비선출 해설가들의 차이점이 있다면, 비선출의 경우 팬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구단, 선수, 감독, 역사 등 정보적인 측면에서는 유리한 편이다. 반면 경기 내용에 관한 전문 지식이나 경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 같은 경우는 선수 출신 해설가들이 월등하다. 비선출 해설가의 최고봉에 있는 한준희조차 인정하는 부분으로, 선수 출신 해설가들의 관건은 본인 머리 속의 느낌이나 흐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정확하게, 기왕이면 보다 더 느낌을 살려서 전달할 수 있냐에 달려 있다. 김병지는 K리그에서 압도적인 출전수와 화려한 국가대표 경력을 자랑하는 만큼 잘 들어보면 머리 속에서 그리는 그림은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말이 지나치게 길어서 비경제적이고, 횡설수설하는 경향이 있고, 텐션이 낮고, 표준어 발음이 불명료하며, 어휘 선택도 해설가 기준으로 좋지 못하다. 게다가 골키퍼 관점에서 얘기하는 경향이 잦다 보니 독특하지만 공감하기 어렵다는 평이 많았다. 또한, 선수가 누구건 간에 김병지는 직설적으로 잘했다 못했다 평하는데 너무 요령도 없이 대놓고 말하다 보니 이 부분에 대한 평가도 갈린다.[31]
이렇기 때문에 최태욱과 함께 시청자들로 하여금 스포티비 축구 해설진에 대한 평가를 깎아먹는 데에 크게 일조하였다. [32] 마이크에 대고 대놓고 기침을 하기도 했다...
참고로 김병지는 2010 남아공 월드컵때도 해설을 맡은 경력이 있었고 이 때도 많은 시청자들의 질타를 받았었는데 수년이 지난 후에도 큰 발전이 없다는 점은 비판받아도 할 말이 없는 부분이다.
2016-2017 시즌에는 EPLUEFA 챔피언스 리그 등 해외축구도 해설했지만 2017년부터는 K리그 중계에만 등장했고 2018 시즌을 끝으로 하차했다.
훗날 꽁병지 tv를 통해 해설위원 시절을 되돌아봤다. # SBS와 스포티비에서 자진하차가 아니고 짤렸다고 인정했으며, 처음에 중계하고나서는 악플을 읽는 데에만 열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지금은 유튜브에서 중계하면서 많은 사람이 보는 건 아니지만 방송에서는 할 수 없는 얘기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 편하다고 한다.

5. 축구 행정가


2021년 1월 27일,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각자 담당 분야를 둔 6명의 부회장 중 생활축구 및 저변확대 분야를 맡게 된다.

6. 피파 온라인에서


현역 시절의 명성에 비해, 게임 속 김병지는 무척 약하게 나왔다. 이게 포병지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인다. 감스트가 이유 없이 키보드를 두드린 게 아니다. 이후 김병지는 게임 속 자신이 약하게 나온 점을 들어 현역 시절에 맞게 상향패치 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넥슨의 박정무 실장은 들어주지 않은 것 같다. 이에 김병지는 유튜브 영상을 통해, 게임 속 자신을 패치해야 함을 호소했다.
2017년 8월 23일, 코미디언 김대범은 금카 김병지를 정성룡과 함께 공격수로 기용했다.

7. 꽁병지tv


[image]
유튜브
아프리카tv
트위치
포병지 사건을 만든 감스트로 인해 인터넷 방송을 알게된 김병지는 감스트와 합방 이후 인터넷 방송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고 2018년 6월 4일 러시아 월드컵을 앞두고 꽁병지tv라는 이름의 유튜브 채널에 첫 영상을[33] 올리며 유튜버 활동을 시작했다. 영상을 찍는 장소는 채널 개설 초기에는 거의 송종국의 개인 축구 클럽이었다가 러시아 월드컵 이후로 별도의 사무실을 따로 얻어 그 곳에서 중계를 하고 있다.
주 컨텐츠는 '''축구계 주요 사건 해석, 축구 경기 해설 및 경기 분석.''' 송종국과 함께 그날의 큰 경기를 함께 관람하고 분석한 영상을 올린다. 그 외에는 유명 축구인 인터뷰 등이 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의 거의 모든 경기를 중계 스트리밍 하였다. 월드컵이 끝난 이후로는 EPL 등의 해외 축구 리그와 K리그도 방송할 예정이라고 한다. 특히 K리그의 경우에는 직접 경기장에 찾아가서 스트리밍을 할 가능성도 방송을 통해 언급하였다. 그리고 축구선수 출신이 아닌 야구선수 출신 박명환이 왜 있나 싶은데 꽁병지tv는 축구만을 전문으로 하는 방송이 아닌 '''야구 컨텐츠도 할거라고 한다.'''[34] 2018년 8월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소년, 사회인 야구단과 승부를 펼칠 것이라고 한다.
전문 영상 편집 담당자를 고용해서 그런지 영상 편집 퀄리티가 상당히 좋은 편이며 김병지의 거침없는 드립이 상당히 재밌다. 언어나 장난에 제약이 없으니 해설위원 때보다 즐겁고 톤이 살아있는 편이다. 항상 송종국을 뜬금없이 골로 보낸다. 설명하는 송종국 옆에서 이혼 드립까지 칠 정도.[35]
김병지의 이러한 활동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국 축구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2010년대 중반 부터 유튜브의 파급력은 매우 커졌고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과 어린 아이부터 스마트폰을 쓸 줄 아는 노인들까지 국적불문, 남녀노소 유튜브를 시청하는 상황이다. 그러기에 김병지의 방송을 통해 사람들이 축구의 전문적인 지식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껏 축구계 레전드들은 가끔씩 캠페인 참여로 나오는 등 인터넷 매체에 그렇게 자주 출연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김병지의 이러한 활약은 매우 신선한 느낌이다. 게다가 김병지의 유튜브는 '''그저 웃기기만한 방송이 전혀 아니다.''' 세계 각종 축구 사건들을 포함, 한국 축구에 대한 비판을 때론 직설적으로, 때론 풍자하듯이 돌려까는 맛이 있다.
유튜브에서는 저작권과 계약상의 문제로 화면 제공을 못해 시청자들이 화면을 알아서 찾아서 보고, 해당 방송을 동시에 봐야하는 불편함이 있어서, 2018년 7월 21일 인터내셔널 챔피언스 컵 맨시티 vs 도르트문트 경기부터는 아프리카 TV로 플랫폼을 옮겨 화면 중계도 동시에 하고 있다. 하지만 완전히 아프리카로 플랫폼을 옮긴 것은 아니고, 앞으로 다수의 컨텐츠는 유튜브와 아프리카에서 동시 송출한다고 한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즈음부터 아프리카와 유튜브에서 동시 송출을 하고 있는데, 아프리카에서는 영상을 송출하고 유튜브에서는 영상 제공없이 기존과 마찬가지로 화면 제공 없이 소통만 하는 형식으로 컨텐츠를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유튜브에서는 저작권 관련으로 영상 송출이 안된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음에도, 경기 중계를 할 때마다 채팅창에는 경기 영상은 어디서 보나? 영상을 제공하라 등의 글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중. 2019년 1월 31일부터는 트위치 송출도 시작했다. 트위치는 스포츠 관련 중계권이 없기 때문에 유튜브처럼 리액션 방송으로 중계를 할 것으로 보인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인맥축구논란이 있었던 황의조에 대해 거의 예언에 가까운 분석을 했다. 황의조는 김학범감독이 잘 아는 선수고 최근 J리그에서의 활약을 보면 와일드카드로 잘 뽑았다고 했는데 실제로 황의조는 대한민국이 금메달을 따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대회에서 무려 9골을 넣으며 인맥축구라는 비난을 실력으로 잠재워버린 것. 심지어 이 영상은 7월달에, 즉 대표팀 명단이 나온지 얼마 지나지않아서 올라온 것이라 더욱 놀랍다. 여러모로 김병지의 전문성이 돋보인 영상. 댓글에는 성지순례드립이 끊이질 않는다.
지상파에서 보기 힘들어진 축구인들을 게스트로 출연시켜주는 메신저 역할도 한다. 은퇴후 개인사업을 한다고만 알려졌던 김형범[36]과 은퇴 후 아예 소식이 없던 김정우, 음주운전으로 임의탈퇴 된 후 잊혀졌던 강수일은 꽁병지tv를 통해 팬들에게 근황을 전했다. 청춘 FC 선수들도 출연해 친선경기를 가졌고, 이강과 오성진은 꽤 자주 출연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야구 경기를 중계했는데 전문 야구인이 박명환뿐이라 축구 중계에 비해 나머지 멤버들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문제는 그 박명환도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어서 방송이 상당히 지루했다는 평이 나왔다. 특히 송종국은 야구 중계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축구 이야기를 하면서 중계 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하게 해 야구팬들이 보기에는 축구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는 평이다. 이런 영향에서인지, 야구는 아시안 게임 결승전임에도 중계를 하지 않고 당일은 축구 결승만 중계를 한다. 이후의 야구 중계는 류현진 선발 등판 경기나 포스트 시즌 경기 등 국내외 주요한 경기를 중계하며 김병지와 송종국은 빠진채 김민구와 박명환 두 명이서 중계를 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시청자들의 반응은 긍정적인 편이다. 특히나 축구에서는 꿀먹은 벙어리(...)인 박명환이 야구에서는 물만난 고기와 같이 전문성 있고 유연한 모습 등이 긍정적으로 비춰진다.
초기엔 사진처럼 5명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김민구, 김병지, 김형범 세 명만 고정으로 나오고 있으며, 2020년 기준 주요 컨텐츠는 입중계이며, 축구 선수 이적에 관한 뉴스 등 축구계 새로운 소식을 김민구가 읊어주는 컨텐츠도 있고 김병지가 아나운서가 되어 뉴스 진행하듯이 축구 관련 소식들을 읽어주는 꽁지늬우스도 있다.
손차박 대전에서 차범근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형범은 김병지와 대립하는 컨셉이라 어쩔수 없었다고

8. 사건사고/논란




8.1. 아들의 또래 폭행 의혹


이는 '''김병지 선수의 잘못이 아니라, 상대측 부모의 막장짓사실 확인도 안하고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그대로 퍼서 기사를 쓴 기자의 문제'''였다. 이에 대해 김병지 선수의 대처가 잘못되어 일이 커졌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래 글들을 보면 알겠지만 누가 보더라도 학교 내의 다툼이 일어났을 시 학부모들이 하는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대처 방법이었다. 오히려 김병지 측이 유명인인 것을 이용해 사건을 과대 포장하고 돈을 뜯어내려는 상대측 부모의 대처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8.1.1. 시작


2015년 11월 6일, 아들이 학교에서 다른 학생과 싸움을 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기사[37] 양측의 진술이 엇갈리고 그 내용도 전혀 다르지만 다른 아이들에 대한 폭행이 54건이나 있었다는 피해자 측의 진술과 피해자 측에서 공개한 아이의 사진을 봐도 자식 얼굴을 저렇게 만들어 놨으니 부모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사를 접한 사람들은 일단 아이의 얼굴을 저렇게 만들어 놓은 데다, 다른 아이들의 진술을 토대로 상습적인 폭력이 있었음이 의심되는 점에서 크게 비판을 했다. 또한 기사에 따르면 가해 학생이 ADHD 증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8.1.2. 상대 학부모측의 거짓주장과 언론의 마녀사냥


이번에 폭로한 학부모 말고 다른 학부모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실로폰으로 맞은 아이, 얼굴에 침을 맞은 아이 등 또 다른 피해 학생들의 진술이 계속 나왔다. 일부 학부모 증언으로는 학교에서 전학 다음으로 징계 수위가 강한 타반 이동을 명하자 가해자와 엄마, 외삼촌이 교장실에서 난동을 부렸으며 다른 반 담임선생님들은 아이(가해자)를 받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심지어 가해자의 담임선생님은 급성스트레스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상대 학부모는 사태가 이렇게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김병지 측이 유명인이라 깎아내리려 한다, 장난인데 왜 그러냐, 공개된 사진 속 상처는 넘어지면서 실수로 긁은 것이다. 등의 변명을 한다고 주장했다. 종편과 YTN에서도 지속적으로 다루며 사태가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38]

8.1.3. 진실


상대방 어머니의 폭로글[39] 네이트 판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현장학습을 간 볼풀장에서 김병지의 아들(A)과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아이(B) 측의 다툼이 시작이다. B측은 김병지의 아들이 공을 먼저 던졌고 다툼이 일어나 김병지의 아들이 피해자 측 아이를 깔고 앉으며 얼굴 등에 상해를 입혔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얘기들은 한 포털사이트 커뮤니티 게시판에 "학교폭력 피해자 엄마입니다. 가해자의 횡포, 어디까지 참아야 합니까?"라는 제목으로 B측이 폭로하며 쟁점화됐고 이 사건은 방송에도 소개될 정도로 크게 번졌다.
이후 논란이 커지자 김병지가 해명 인터뷰를 하였다. 링크 링크 링크
인터뷰에서 공개된 목격자 아이의 녹취 파일에 사건의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먼저 김병지의 아들이 장난으로 던진 공이 튀어서 상대방 측 아이에게 맞았고, 이에 상대방 측 아이가 김병지의 아들에게 공을 여섯 번 던졌다고 한다. 그러자 김병지의 아들이 상대방 아이의 얼굴을 할퀴었고, 여기에 상대방 아이가 김병지의 아들을 깔고 앉아 폭행한 것이 사건의 과정이라고 한다.
김병지 측에 따르면 진정 어린 사과가 없다는 상대의 주장과 달리 김병지 측은 집 앞까지 찾아가 사과를 하려 했다고 하며[40], 사과의 문자를 상대 어머니와 함께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신저 내용도 공개됐다.
과거부터 행실이 나빴으며, 여러 학부모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1학년 생활 기록부에 따르면 '심성이 착하고, 교우관계가 좋다'는 내용이 있다며 반박했다.[41] 이 내용대로라면 위의 54건의 폭행이 있었다는 주장과 정반대로 배치되는 내용이다.
학교측의 ADHD 보도에 관해서는 서울 유명 병원에 정신 감정을 받아봤지만 아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로 밝혀졌다고 한다.
한편 김병지의 인터뷰에 따르면 상대측 어머니는 커뮤니티 글을 통해 아들 일로 인해 혈압이 오르고 병원을 다녀오며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다고 하지만 같은 시기에 다른 온라인 카페를 통해 동남아 여행 계획을 세우고, 항공사 마일리지 적립에 관해 묻는 등 이중성 있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고 한다.
아이 어머니가 올린 얼굴의 상처는 사실이지만 기자가 찍었다는 다른 사진의 경우, 기자가 방문한 사실이 존재하지 않았고 김병지가 직접 민원, 고소, 고발을 했다는 커뮤니티의 글도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김병지는 "고발을 했다면 증거서류가 시청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 서류를 제출하고 얘기하고 싶다"며 전혀 사실무근임을 주장했다.
김병지에 따르면 사건 이후 아들은 다니던 학원에서도 더 이상 나오지 말아달라는 통보를 받고, 학교 역시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김병지는 일방적인 판단을 내린 학교 측 관계자를 고소하고, 학교에 대한 불신으로 이제 홈스쿨링으로 자녀 교육을 시킬 것이라고 했다.
김병지는 “아들이 상대방 얼굴을 할퀸 건 맞지만 본인도 주먹으로 가슴을 맞는 등 서로 싸웠는데도 일방적인 폭행인 것처럼 인터넷에 허위로 글을 수차례 게시해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으로 피해자 어머니에게 3000만원의 배상을 요구했다.
김병지는 아들의 담임 교사 최모씨에 대해서도 1000만원의 배상을 요구했다. 그 이유는 “아들의 가슴에 멍 자국이 있는지 확인하겠다면서 학생들 앞에서 윗옷 단추를 풀게 해 성적 수치심과 모욕감을 줬다” 라고 말했다.
오모 교장에 대해서도 ‘김군의 학습 능력이 떨어지고 과잉행동장애가 있다’는 발언을 했다며 1000만원의 배상을 요구했다.

김병지 측 변호를 맡은 전상희 변호사는 "상대측 어머니의 글과 주장은 허위이거나 심히 과장된 것이 많다. 허위사실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형사 소송, 민사 소송 역시 진행 중이다. 악성댓글에 대해서도 강력히 처벌할 것이다"고 언급했다.
2016년 6월28일 제2차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에서 학교측은 1차 학폭위에서 김군의 일방적 폭행에 대한 조치를 결의한 것과 달리, 이날 2차에선 김군과 B군, 쌍방 모두의 잘못을 확인하고 B군의 가해 사실을 적시했다.#
2018년 6월 22일 불펜에 학교폭력무효 결과를 받았다는 을 올렸다.

8.2. 장현수 징계 발언 논란


2018년 11월 1일 자신이 운영하는 꽁병지TV를 통해 체육요원 봉사실적 서류위조 사건을 일으켜 국가대표에서 영구제명이 된 장현수의 국가대표 영구제명 징계가 과하다는 발언을 해 제식구 감싸기[42]라며 비판을 받았다. 또 조작은 잘못했지만 그 이상의 시간은 (장현수가) 후배들과 함께 했을거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9. 여담


  • 팬서비스가 매우 좋다. 싸인을 거의 뿌리는 수준으로 해준다고 한다. PC방 컴퓨터 본체에 해줬다라는 일화도 인터넷에 올라왔는데 해당 네티즌에 의하면 온 동네에서 김병지 싸인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선수 시절 경기에 패배한 날에도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꼬맹이들이 김병지의 꽁지 머리를 잡아당기며 장난을 쳐도 허허허 웃기만 했다고...#1 #2
  • 12회 연속 올스타 출전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서 올스타전 참가는 15회, 2015년까지 합치면 16회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 2009년 11월 1일, 본인의 리그 500번째 경기는 F4를 앞세운 전북과의 경기였다. 499경기 때까지 김병지는 실점 496점을 기록하며 평균 실점 0.994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근데 하필이면 이때 또 전북이 폭발해 4골을 득점하면서 본인의 500번째 경기에서 500번째 실점을 하며 평균 실점 1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 23년 동안 현역으로 뛰고 있고, K리그의 기록 제조기의 비결은 역시 자기관리다. 정말 철저하다. 23년의 현역 선수생활 동안 데뷔했을 때의 몸무게가 지금까지 단 1킬로도 찌지 않았다고 한다.[43] 우스갯소리로 술과 담배는 끊었지만 드리블은 끊지 못했다는 소리가 있다. 이건 김병지 본인도 해설 도중 언급하기도 했다. 이 체중은 은퇴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으나 교통사고로 입원하면서 1~2kg 불었다고 한다. 은퇴 후에도 식단조절과 운동을 통해 2020년 6월 14일 기준으로 체중을 78.75kg까지 감량했다. # 후에 11월 25일에 방송된 대한외국인에 출연했을 때도 이것을 직접 언급했다.
  • 마산공고 재학 시절 부산 소년의 집[44]으로 전학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감독으로부터 키가 너무 작으니 축구를 접으라는 소리를 들어서, 둘째는 가정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모님이 멀쩡히 계심에도 불구하고 단지 축구가 하고 싶어서이다. 그의 축구 사랑은 위대하다.[45]
  • 마산공고 재학시절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의 강호동과 함께 마산 시내에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던 학생들 가운데 하나였다. 마산공고 축구부와 마산상고 씨름부에서 둘 다 엄청 유명했다고. 그래서 마산상고 씨름부와 마산공고 축구부의 1학년 패싸움에서도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 후일 강호동은 '공포의 쿵쿵따'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2002 월드컵 직전이었던 시기에 "당시 마산에서 유명한 운동부가 우리 마산상고 씨름부와 마산공고 축구부였는데 서로 마산 운동부를 대표하다보니 1학년끼리 신경전이 생겼고 결국 우리끼리 야산에서 패싸움을 했었다. 우리는 잡으면 던지고(?), 그쪽은 발로 차는 걸 잘했다(?). 당시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당시 상대 학교 선수들 중에서 뒷머리를 꽁지머리로 멋내서 길렀는데 굉장히 싸움을 잘해서 두려웠던 상대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나이먹고 생각해보니 그 친구가 '김뱅지' 선수였던 거 같다. 굉장히 빨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후일 이것이 작은 이슈가 되어 김병지 역시 스포츠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패싸움에 대한 질문을 받았는데 그 사람이 자신이 맞았고 싸울때 이미 강호동을 알고 있기도 했고 싸울때 본 것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년이 흘러 우리동네 예체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추억을 공유(?)하며 결론적으로 둘다 패싸움에 각 운동부 리더격으로 참여했다는 것을 인증했다. 예체능 출연보다 한참전에 강호동의 방송 발언 이후 두 사람이 사적으로 만나서 이미 그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1998년 K리그 플레이오프 준결승 2차전 포항과의 경기에서 팀이 1대1로 비기고 있을 때 게임 종료 직전에 공격에 가담하여 헤딩슛으로 골을 넣었다. 이로 인하여 K리그 최초의 골키퍼 득점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 2010 남아공 월드컵 개막전인 남아공 vs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해설을 맡았다. 언론에서는 성공적인 해설이라고 했지만, 팬들로부터는 경기 흐름을 전혀 읽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사투리를 쓰거나 말을 버벅거린 것도 감점 요인. 다음 경기인 프랑스 vs 우루과이 경기의 해설을 맡은 박문성의 해설과 비교되어 평가가 더 나빠졌다. 다만, 이후 안 좋은 점을 고쳤으며 나름대로 좋은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점점 해설에 적응해 가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회 중반 이후로는 상당히 훌륭하게 해설을 했고, 특히 세트피스 상황에서 골키퍼 출신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사항들을 해설해 줘서 평가가 굉장히 좋았다. 실제로 파라과이 vs 이탈리아 전에서 파라과이의 프리킥 상황에서 이탈리아 선수들의 포지셔닝에 대한 지적을 했는데, 그 뒤 이탈리아는 파라과이에 바로 선제골을 먹혔다.
  • 2010년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네이트에 칼럼을 연재했다. 운동선수라서 필력이 서툴거 같다는 편견과 달리 한달에 두세권은 꼭 읽는 독서가라서 필력도 괜찮은 편이고 오랜 선수생활 동안의 풍부한 경험, 선수들만이 알 수 있는 경기 내적인 내용이나 현장에서의 고충을 토대로 서술하여 인기가 좋았다. 다만 어디까지나 선수 신분이기에 전문 칼럼니스트들처럼 취재, 조사하고 다닐 처지는 아니라서 연재가 정기적이지 않고 분량이 약간 짧았다. 2011년 5월 27일 칼럼을 마지막으로 네이트에서 '연재 종료' 칼럼으로 분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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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도 챙겨 보는 모양이다. 2010년 준플레이오프 2차전 당시 이대호의 호수비를 보자 트윗에 글을 남겼다.
  • 2000년 8월 16일 심장 부정맥으로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임수혁에게, MVP 및 캐넌슈터왕으로 얻은 상금 중 300만 원을 임수혁의 치료비에 보탰다.
  • 2005년 FC 서울로 이적할 때, 당시 꼬꼬마였던 박주영이 김병지를 보고 어떻게 부를까 고민하다가 김병지가 '삼촌'이라 부르라고 한 뒤부터 1985년 이후 출생 선수들에게는 '삼촌'이라 부르도록 했다. 이후 경남 FC로 옮긴 뒤로도 막내들에게 삼촌이라고 불린다. 사실 나이로만 보면 삼촌뻘이 맞긴 하다. 그리고 2015 시즌 기준으로 최연소 선수가 빠른 1997년 생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라운드에서 아들뻘 되는 선수들과 뛰는 장면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말년씨리즈에도 나왔는데, 하나는 특유의 헤어스타일 때문에, 또 하나는 본인 발언[46]으로 인해 이와 관련해서 개그 소재로 사용되었다. 한창 헤어스타일 현란하게 하고 다닐 적에는 경기 시작 전에 손잡고 나온 꼬마애가 기겁해서 울음을 터트린 적도 있었다.
  •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이 축구계를 뒤흔들고 있던 2011년 5월 어느 날, 한 인터뷰를 통해 "나에게 승부조작 제의가 왔다면 (브로커를) 패버렸을 것."이라고 발언하였다. 그의 축구사랑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이 소식을 들은 일부 축구 팬들은 김병지라면 실제로 그럴지도...라고 평했다. 위 발언은 전술된 네이트에 연재된 칼럼 가운데 마지막 칼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승부조작 사건을 바라보는 백전노장의 안타까운 마음이 물씬 담겨있는 글이니 링크된 칼럼은 한 번씩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 김병지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단편적인 일화로 1999년 SBS 모 예능프로 몰래카메라에 김병지가 출연한 적이 있었다. 몰래카메라의 시나리오는 김병지가 지나가는 앞에서 괴한들이 여자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김병지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마산에서 싸움으로도 한 때 유명했던 사람이었던지라 괴한 중 한 명에게 바로 날라차기를 시전했고 다른 괴한역의 연기자들은 쫄아서 도망가버렸다. 하지만 김병지는 전성기에 100m를 11초대에 끊던 준족이다. 얼마 도망가지도 못하고 연기자들은 잡히고 나서 김병지에게 빌었다고... 덕분에 몰래카메라 촬영은 중단되었다. 신동엽(당시 프로그램 MC)이 인증해주었다.
  • 2012년 10월, 자신을 다룬 기사에 달린 댓글에 직접 댓글을 달아 화제가 되었다. 댓글의 내용은 하이킹을 하던 중 히치하이킹을 하게 되었는데 탑승한 차량이 김병지의 차였던 것이다. 목적지까지 태워준 것은 물론 용돈까지 줬다고 한다. 김병지 본인이 단 댓글에는 대략적인 위치까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
ryuh****
10년전 배낭여행하던 나는 경상도 어딘가에서 히치하이킹을 했고! 고급세단이 나를 태워줬다! 그리고 놀랐다 운전자가 김병지형님이었지! 어린친구가 멋지다라고 격려하면서 목적지 까지 태워다 주었고 용돈10만원도 받았다! 그이후 나는 김병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김병지 형님! 정말 인간적으로도 너무 멋진분!
leos****
김병지 입니다.. 생각나네요..포항에서 영덕가는 국도변에서 대구 지역 대학생이었던걸로 기억나네요..두분이셨던것두요...강원도 설악산까지 하이킹 하신다고, 열혈도전에 깊은 인상이 남네요..아마 그때 그 도전정신으로 지금의 모습을 그려본다면 .....좋은 기억과 추억으로 자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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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하에 아들이 셋 있다. 큰아들 태백, 작은아들 산, 막내아들 태산으로, 세 아들의 이름을 태백산에서 따왔다고 한다. 세 아들 모두 축구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모두 골키퍼를 하고 싶다고. 김병지가 평하길, 태백이는 패스타이밍이, 산이는 킥력이 좋고, 태산이는 두 형에 비해 피지컬이 좋다고. 특히 작은아들 산이는 KBS N 스포츠 '날아라 슛돌이'의 2기~4기에 이을용의 아들 태석이와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4기 때는 부주장을 맡기도. 그러나 감스트 방송에 출연했을때 축구는 관두고 음악을 하고 있다고 밝혔고 꽁병지tv에서 재차 모종의 사정으로 축구를 그만두고 예고로 진학했다고 언급했다.

김병지가 전남으로 이적할 때 세 아들들을 전남 유스팀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큰아들 태백이는 광양으로 가지 않고 2015년 서울의 언남고로 진학했다.[47] 태백이는 이후 울산 학성고로 전학하였고 2019년 봄 일본의 야마나시가쿠인대학에서 축구부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편, 막내아들 태산이는 최근 광양에 있는 한 리틀야구팀에 소속되었다.
  • 과거 '논키퍼'라는 농약 광고에 출연한 적이 있다. "축구에는 골키퍼 논에는 논키퍼"
  • 2014년 K리그 클래식 개막전에서 승리한 후 최용수 감독의 두 손 악수를 한 손으로 잡아주는 위엄을 보여주셨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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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작 전에는 서울 키퍼 김용대 더러 "너 아직 골키퍼 하냐?"라며 놀렸다.
  • 풋볼매니저 능력치가 상당히 좋다. 특히 성격 능력치가 좋아서 튜터 선생님으로 추천 받았었다.
  • FIFA 14에서 골키퍼로 득점하면 깰 수 있는 골드 도전 과제 '공수의 달인'의 설명에는 '김병지를 아시나요?'라고 적혀 있다.
  • 2014년 K리그 올스타전에서 히딩크 감독이 보는 앞에서 폭풍드리블 후 볼 뺏기기를 재현해서 큰웃음을 선사했다.# 그 앞장면에서 초근접거리에서 김신욱의 강슛을 세이브해내는 장면도 쩔긴 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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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년 7월 26일 열릴 전남 드래곤즈와 제주 유나이티드간의 경기가 김병지의 k리그 통산 700번째 출장경기다. 그래서 7월 17일 열린 k리그 올스타전에서 등번호 700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전후반 90분 동안[49] 맹활약 했다.
  • 2018년 기준 권순태에 이어 클린시트 경기 수 2위라고 한다.
  • 2015년 7월 아프리카 BJ 감스트피파온라인 3에서 2002년 전설 선수 카드팩을 개봉하는 방송을 했다. 그런데 여기서 가격대가 매우 낮은 김병지만 연속으로 4장 등장해버린다. 해당영상. 욕설 주의. 김병지 카드가 성능이 안좋은건 아니지만 2002년 전설 팩중에선 두번째로 싼 선수라 감스트는 매우 분노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 뒤로 어떻게든 복구라도 해보려고 카드 강화를 했는데 카드 강화마저도 전부 실패하고 만다. 이 영상은 전설로 남아 포병지 사건으로 불린다. 결국 이 영상이 김병지 선수 본인도 보게 되었는데 재미는 있었지만 욕설이 심한 부분을 지적하면서[50] 현실에서 김병지 지지자가 된다면 용서를 하겠다. 하지만 감스트는 미워하지 말라는 글을 남겼다. 감스트는 해당 글을 보고 김병지에게 사과를 했고, 그 뒤로는 어쩌다 김병지 카드가 뜨면 무조건 좋아하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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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피선데이 1박 2일에 출연한 유희열이 젊은 시절의 윤상이 김병지를 닮았다고 말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 피파3에서 김병지를 공격수로 세우면 이런일이 일어난다.# 그렇긴해도 구 엔진에서만 가능한 일이며, 파일럿의 기술이 좋아야한다. 이 플레이로 인해 피파3 유저들은 페르난도 병지라는 별명을 붙였다.

어어... '''김병지 선수가 문제인 거 같아요.''' 골대를 지켜야 하는데 안 지켜요. 그리고 골키퍼가 공격수도 아닌데 공격하러 저~기 가있고... 어.. 일단 그... 골키퍼도 약간 교체를 해야 된다고(생각합니다).

  • 2016년 슛 포 러브를 통해, 배구 선수 문성민과 공방 대결을 펼쳤다. 한준희 해설이 둘의 창-방패 대결을 해설했고, 둘의 대결은 5대5로 끝났다. 자생한방병원을 통해 메이크어위시(make-a-wish) 재단으로, 공동 명의로 300만원을 기부하게 되었다. 상대방 문성민은 축구선수가 접하기 힘든, 익숙하지 않은 구질로써 무려 다섯 번이나 골을 넣었다. 게다가 스파이크는 특성상 공중에서 내리꽂는 공격이기에, 축구 선수의 헤딩 공격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영상 끝 부분에서, 김병지는 떨어지는 공을 대비하는 연습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51]
  • 홍명보와 함께 키가 상당히 늦게 큰 케이스 중 하나다. 고1때까지만 해도 170은 고사하고 165도 못 넘었으며[52] 마산공고 축구부에서 사실상 방출당하시피 했지만 고2 때부터 갑자기 키카 커서 졸업할때 쯤에 182cm가 됐다고 한다.[53]

  • 첼시 로버스 FC가 우리나라에서 전지훈련 했을때 골키퍼들을 지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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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세계 복싱계에서도 경량급에서 주먹이 아주 강하기로 유명한 매니 파퀴아오를 펀치력에서 매우 큰 차이로 이기기도 했다. 심지어 파퀴아오는 맨주먹에 온 체중을 실어 주먹을 날렸고 김병지는 두꺼운 글러브에 체중을 싣지도 않고 쳤다.[54] 축구 선수들 사이에서도 완력과 싸움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은퇴하고 나이가 많이든 시점에도 손가락으로 팔굽혀펴기를 수십 개한다.
  • 현 기능사에 해당하는 자격증인 선반기능사 2급,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소년의 집에서 취득한 것으로, 학교가 공고인데다가 실전을 중시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자격증 취득을 장려한다. 김병지의 신장이 골키퍼로 뛰기에는 작다는 이유로 팀들이 입단을 거절했었고, 결국 LG산전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면서 축구에 대한 꿈을 접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상무에 입단 테스트를 요청하여 상무에서 뛰게 된다. 상무에 입단 테스트를 요청한 경우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 2011년 12월, 트윗을 통해 2011년 목표를 운전면허 정복의 해로 선정, 트레일러와 오토바이 운전면허를 취득하였고 대형 면허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2018년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대형 면허도 취득했고 트레일러 면허는 캐러밴 타고 여행을 다니려고 딴 것이라고 밝혔다.
  • 이렇듯 부지런하고 자격증 많기로 유명한데 지도자 자격증도 자격 요건 충족되는데로 바로바로 따고 있다. 2018년 꽁병지 TV에서 골키퍼 지도자, 필드 지도자 자격증 모두 A급을 취득했으며 곧 P급 취득 자격이 주어진다고 밝혔다. 자격증 취득할 시간이 빠듯하지 않냐는 말에는 시간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고 답했다.
  • 유튜브와 해설 말고도 하는 일이 많다. 자기 이름을 딴 김병지축구교실은 18년 7월에 문 연 홍대점까지 총 7군데 운영중이고 2002년 월드컵 대표팀 모임인 ‘팀2002’와, 축구 국가대표 모임인 사단법인 한국축구국가대표의 대표도 맡고 있다.
  • 가짜사나이 2기에 참가했다. 2020년 9월 24일 올라온 티저영상에서 모습을 볼 수 있다.[55] 그리고 그 날 본인의 영상에 입소 전 영상을 올렸는데... 무려 트레이드 마크인 꽁지 머리를 자르고 머리를 깎은 모습을 촬영해 올렸다.

10. 같이 보기




[1] 음력 4월 8일.[2] 現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3] 개인 계정[4] 꽁병지tv 공식 계정[5] 부회장은 분야를 나눠 총 6인으로, 김병지는 생활축구 및 저변확대 분야를 담당한다.[6] 밀양중학교 때 뒤늦게 축구를 했다는 건 잘못 알려진 정보 [7] 그때까지만 해도 체격조건의 성장이 더딘 운동부 학생을 당장 뛰기보다는 커서 오라고 하는 감독이 많았다고.[8] 당시 육해공 3군의 사관학교는 축구로 치열하게 다퉜고, 소속 선수들의 실력도 좋은 편이었다.[9] 이 사진 보면 알 수 있듯이 김병지뿐만 아니라 2014년 7월 20일에 은퇴한 최은성도 노장 골키퍼를 대표해서 나온다.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최고령 선수 기록을 세운 콜롬비아의 파리드 몬드라곤보다도 나이가 많다는 것도 포인트.[10] 1980년대 렌스베르겐으로 대표되는 외국인 선수의 활약으로 좋은 성적을 거뒀던거와는 반대로 1990년대 울산은 이상하리만치 외국인 선수 영입을 안하던 구단이었다. 이건 2000년대 들어서 파울링요의 영입으로 깨졌다.[11] 당시에는 원정 다득점 원칙이 없어 양팀의 합계 스코어만 같으면 무조건 연장으로 넘어가게 되어있었지만,다득점 원칙 규정이 있었다면 이 골이 그대로 다음 라운드 진출을 결정짓는 골이 되었을 것이다.[12] 공교롭게도 이 날은 김병지 아내의 25번째 생일이었다.[13] K리그+컵 대회[14] 허리 디스크로 당시 고양시의 명지병원에서 응급 수술을 받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다. 경기 도중 골킥이 하프라인조차 넘기지 못할 정도였으니...[15] 그러나 2008 시즌 서울은 수원과 부산에게 각 1번씩만 패했을 뿐 충분히 우수한 시즌을 보냈고 김호준은 리그 24경기 23실점으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했다. 이 해 서울이 우승 못한 건 슈퍼매치까지 이겨놓고 선수들 멘탈관리 제대로 못하고 부산전에 터져서 리그 1위를 차지할 기회를 날리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데얀이 결정적인 찬스를 죄다 날려버려 홈에서 벌어진 결승 1차전에서 무승부에 그친 탓이다. 2008 시즌 서울의 무관은 그냥 멘탈 문제 이거 하나로 정리된다. 물론 베스트일레븐에 많았던 젊은 선수들이 결정적일 때나 화가 날 때 우왕좌왕하는 사이 주장이었던 이을용과 베테랑 김한윤이 이를 컨트롤해주기는커녕 같이 감정적으로 대응했던데다 또다른 베테랑 이민성은 시즌 도중 좋지 못한 이유로 팀을 나갔다 보니 터진 게 당시 서울의 멘탈 문제인지라, 산전수전 다 겪은 김병지라도 그라운드 안에 들어가 선수들의 멘탈을 잡아주고 팀의 중심이 됐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16] K리그-K리그 클래식으로 넘어간다.[17] 이운재는 2012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18] 노상래, 김태영이 그나마 그와 동갑인데, 둘 다 생일은 김병지보다 늦다.[19] 역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3번째로 나온 세계구급 강팀이었다. 첫째는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1974 FIFA 월드컵 서독에서의 네덜란드, 두번째는 오렌지 삼총사를 필두로 UEFA 유로 1988에서 우승한 네덜란드, 그리고 바로 이 팀이다.[20]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이운재가...[21] 김병지의 월드컵 기록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날조된 정보가 한국 내에서 널리 퍼졌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대회에서 허용한 유효 슈팅 57개나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효 슈팅이 아니라 전체 슈팅이다. 또 다른 날조는 야신상 후보에 올라 2위에 랭크됐다는 것이다. 이 또한 조별리그 기준으로 세이브 2위를 기록했던 것이 야신상 득표 2위로 둔갑한 것이다.당시 기사 대회가 월드컵인 만큼 야신상 수상자 파비앵 바르테즈 뿐만 아니라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 안도니 수비사레타 등의 월드 클래스들을 포함해 뛰어난 기량을 선보인 다른 골키퍼들도 많았다.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IFFHS) 선정 20세기 최고의 아시아 골키퍼이자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모하메드 알데아예아도 이 대회에 출전해 김병지보다 더 많은 38개의 유효 슈팅 속에서 19개의 세이브와 7실점을 기록했다. 결정적으로 98년 월드컵은 올스타 팀에 골키퍼를 2명 뽑았는데 바르테즈와 함께 선정된 선수는 김병지가 아니라 칠라베르트였다.[22] 2003년부터 2005년까지의 3년간 수원과 포항의 슈팅 당 실점율을 비교하면 이운재가 가장 잘했던 시즌과 김병지가 가장 떨어지는 시즌의 실점율이 비슷한 수준이었다.[23] 그러나 유튜브 슛포러브에서 둘이 재회했는데 나름 훈훈했다. 시간도 많이 지났고, 어느정도 화해가 된 듯하다.[24] 게다가 이 날에는 바람이 꽤 불었다고 한다. 그냥 넣은 것도 아니고 아웃사이드로 차서 넣은 것이다.[25] 실제로 김병지가 스위퍼 역할을 겸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현역시절에도 기사화까지 되며 현대 골키퍼의 모습이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그리고 노이어는 가장 완벽에 가까운 스위퍼 키퍼이지, 최초의 스위퍼 키퍼는 아니다. 이미 70년 전부터 스위퍼 키퍼가 등장했으며 그 인물이 1950년대 헝가리 매직 마자르의 골키퍼 줄러 그로시치이다. 그 이후에도 리버풀의 레전드 브루스 그로벨라, 1990년대에 남미를 대표하는 골키퍼 중 한명인 호세 레네 이기타 등 스위퍼 키퍼는 계속 등장했다.[26] 골키퍼는 몸으로 공을 막아내는 역할이라 축구에서 가장 신체조건을 많이 타는 포지션이다. 그래서 골키퍼는 180cm대 후반은 돼야지 표준 정도로 보는 경향이 많다.[27] 스페인 역대 최고의 골키퍼인 이케르 카시야스도 키가 작은 걸 엄청난 반사신경으로 커버했으나, 30대가 되자 이 능력들이 떨어져서 퇴물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몰락했었다.[28] 면접을 보는 교관들조차도 감탄하는 제스처를 보였을 정도.[29] 사실 이것도 어쩔 수 없다기엔 너무나도 중대한 결함인데 비선수출신 중에 이정도로 발음이 부정확한 해설위원은 아무도 없다. 선수출신이 아니라면 방송사 문턱도 밟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 아나운서, 통역가와 마찬가지로 언어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해설가에게는 발음은 필수조건이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노련해도 발음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전달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음을 교정해내지 못한다면 해설가로서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없다. 김병지와는 비교하기가 실례일 정도인 이상윤 해설 역시 선수 이름을 뭉갠다는 이유로 잦은 비판의 대상이 되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30] 유럽대항전 중계를 하는데 원정 다득점 원칙을 모르고 있었던 것, 해설하는 경기의 라인업 미숙지, 선수의 등번호를 몰라 콜네임 두 번 연속 실수, 그라운드에 쓰러져 실제로 고통스러워하는 선수를 보고 시간을 끄는 행위라 하거나 경기 내내 상황 해설보다 잔디 얘기를 더 많이 하는 등 이것 말고도 많다.[31] 해설을 듣는 시청자들은 자기가 팬인 유럽 리그나 팀, 감독, 선수에 대해 직설적인 비판을 하면 불쾌한 반응을 보이면서 그 수준에 가보지도 못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냐며 비아냥 대기도 했다.[32] 이것 때문에 해축갤에선 김병지는 페널티박스 바깥, 중계진, 피파3 선수팩(...) 등 나오지 말라는 데엔 꼭 나온다는 내용의 글이 개념글에 갔다.[33] 해당 영상은 삭제된 상태. 시험 삼아 올렸던 영상들을 모두 내리고 정규 컨텐츠만 채널에 남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34] 실제로 김병지와 박명환은 2016년 슛포러브 축구선수 대 야구선수 편에서 같이 출연하기도 했다.##[35] 송종국을 무조건 감싸주는게 송종국을 위하는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 일부러 그런다고 밝혔다.[36] 인터뷰 이후 김형범은 꽁병지의 고정 패널로 나오고 있다.[37] 기사에서는 폭행이라 표현하였으나 밑의 내용을 보면 알겠듯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다툼이다. 기레기가 어그로를 끌기 위해서 일부러 표현을 짜맞춘 것일 뿐이다.[38] 사실 이런 양심없는 일부 언론의 마녀사냥은 한두번이 아니다.채선당 임산부 사건, 푸드코트 화상 사고, 선릉역 짬뽕 사건 등등 자극적인 제목으로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한쪽의 의견만을 초기에 보도해서 문제를 일으켰다.[39] 네이트 판의 게시글을 사실 확인도 없이 기사를 쓴 부분에서 이미 이상한 것을 눈치 챘어야 했다. 특히 네이트 판은 세 모자 성폭행 조작 사건이 처음 퍼진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40] 집 안에 들어가려 했지만 상대측 부모가 거절했다고 한다.[41] 김병지의 아들은 사건 당시 2학년이었다.[42]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43] 풋볼매거진골에 나온 내용이다. 이에 김민지 아나운서는 부럽지만 나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한숨을 쉬었다.[44] 2018년에 문을 닫은 옛 알로이시오 전자기계고등학교, 당시 이름은 소년의 집 기계공고다. 부산광역시에서 창설된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했던 고등학교다.[45] 실제로 운동부와 같은 예체능계는 돈이 상당히 많이 든다.[46] "나는 대표팀 뒤에서 묵묵히 헌신하는 소금 같은 선수다."[47] 이때 김병지는 큰아들 태백이와 함께 프로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고 밝혔었고 인터뷰에서 유럽처럼 만 16세 이상이면 프로데뷔가 가능할 수 있도록 규정을 완화했으면 하는 소원이 있다고 말했다.[48] 일단 나이도 최용수 감독보다 1년 위인데다(김병지-1970년생, 최용수-호적상 1973년생, 실제로는 1971년생), 둘은 1998년과 2002년 월드컵 당시의 대표선수들이다.[49] 원래 팀 최강희의 골키퍼는 2명이었다. 바로 김승규와 김병지였는데 김승규가 편도선염으로 인해 결장해서 김병지가 풀타임을 뛰었다.[50] 사실 상대적으로 안 좋은 카드가 나와서 한탄하는 것으로 끝났으면 본인도 주목하지 않았을텐데 강화 도중에 "김병지 씨X럼"이라고 하는 바람에...[51] 배구의 서브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고,(거기에 문성민은 120km 이상의 초고속서브를 구사한다.) 그런 서브를 네트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근거리에서 직선으로 막아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반사신경을 필요로 한다.[52] 고1 시절 쭉 163cm였다고 점프해도 골포스트에 닿지도 못했다고 직접 언급했다.[53] 홍명보도 고등학교 입학시에 150 초반대의 단신였지만 졸업했을 때는 181cm였다고 한다.[54] 다만 파퀴아오는 166cm의 키로 열 체급 이상을 증량해 겨우 웰터급 체중을 맞춘 66kg의 선수고, 김병지는 180이 넘는 키에 80kg에 달하는 체중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프로 선수들의 경우 단 한 체급만 달라져도 펀치 파워의 강도가 크게 달라짐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55] 자신의 페이스북에 '기대하셔도 됩니다.'라며 가짜사나이 티저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