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원
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을 맡았다. 한국의 대표적인 사키이즘 전술가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2.1.1. LG 치타스/안양 LG 치타스 시절
1992년 LG 치타스 소속으로 프로팀에 데뷔하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축구 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FC 바르셀로나, 바이어 04 레버쿠젠 등의 팀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으나, 당시 군대 문제 및 LG 치타스의 소극적인 이적 태도 때문에 해외리그 이적에 실패했다. 이때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던 데트마어 크라머[2] 도 재능을 알아보고 독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놈의 군대 문제.[3] 그리고 그걸 해결하고 왔더니 서정원 측의 주장에 따르면 LG가 징징거리면서 선수를 놔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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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는 SL 벤피카에서 영입 제의가 있었고 실제로 벤피카 소속으로 훈련을 같이 하기도 했다. 하지만 벤피카는 서정원이 월드컵 아시아예선에 출장하지 않기를 희망했으나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이던 차범근은 국가대표로 호출하고 싶어서 벤피카 이적은 서정원이 속고 있는 것이라고 언론사에 주장했다. 그래서 당시 한국 방송국과 신문사는 차범근의 말을 믿고 서정원이 벤피카에 입단을 구걸하러 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서 최종적으로 대한축구협회에서는 국가대표 콜업을 거부한 이 건으로 인해 서정원에게 미운 감정을 가져서 국제이적동의서를 발급해 주지 않아서 이적이 무산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벤피카의 레전드 에우제비우가 홍명보를 만나면 서정원의 안부를 매일 묻는 것으로 봐도 알 수 있듯이 벤피카의 9번 배번을 받고 정식으로 이적이 될 뻔한게 맞던 것이었다. 전지 훈련도 같이 한 것도 그런 맥락. 벤피카에서도 서정원을 공식 선수로서 박물관에 이름을 올렸고, 2019년 겨울에 서정원 본인이 이 소식을 듣고 직접 벤피카에 갔더니, 관계자가 먼저 찾아와서 환영을 하고 서정원의 이름이 새겨진 9번 유니폼을 선물했다고 한다. 중간 즈음에 서정원 본인이 직접 공개한 사진이 있다.
그래서 서정원의 팬들은 차범근을 싫어할 수도 있겠으나 차범근과 서정원은 고려대 선후배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그리고 수원 삼성에서 감독과 선수로도 잘 지냈다. 2016년 K리그 FA컵 우승을 서정원이 일궈냈을때는 시상대에서 차범근이 그를 안아줬다.
2.1.2. 르 샹피오나 진출
대신 시간이 지나고 이적료 110만 달러에 프랑스 르 샹피오나의 RC 스트라스부르로 이적하여[4] 당시 이 금액이 파격적인 금액이라서 안양 LG도 승락, 더군다나 당시에는 르 샹피오나 리그가 UEFA 랭킹 2위였다. 12경기에서 4골을 넣는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며 당시 강등권이 돼서 서정원을 급하게 영입한 스트라스부르의 강등권 탈출에 일조했다. 그런데 서정원이 스트라스부르로 영입됐던 때 리그 경기가 12경기 남았을 때였는데, 그 적절한 시기에 12경기를 모두 출전했고 팀의 상승세를 주도해 일약 스타로 떠오르며 다음 시즌 배번 11을 받았다. 여담으로 서정원은 프랑스 리그 데뷔전이었던 올림피크 리옹 전에서 데뷔골을 넣었고, 지롱댕 보르도 전에서는 당시 보르도의 신예 윙어 키키 무삼파와 서로 1골씩 주고 받으며 4-4 경기를 연출하기도 했다.[5]
당시 스트라스부르의 감독은 뒤게페로(Jacky Duguépéroux)를 거쳐 르네 지라르[6] 였다. 그러나 지라르가 다음 해에 프랑스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로 가면서 감독이 바뀐 후 아시아 선수라는 이유[7] 로 기용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서정원을 기용하지 않자 구단 수뇌부도 서정원에게 스위스 리그에 강팀으로 임대가는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당시에 본인 폼이 좋았던 서정원은 거부. 실제로 그럴만도한게 당시에 잘 나가는 스트라스부르의 핵심 선수들이 서정원, 올리비에 다쿠르, 이스마엘 정도였다.[8] 서정원이 한국으로 왔을 때도 스트라스부르 서포터들이 편지를 보내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후로 팀은 부진에 빠져 결국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그 시즌을 벤치에서 보냈으며, 계약기간이 끝난 후에도 발렌시아 C.F., 바이에른 뮌헨의 오퍼가 있었지만 에이전트의 업무 미숙(...) 때문에 K리그로 복귀하게 된다. 이때 수원 삼성이 해외에서 다시 불러주면 돌아가는 조건으로 서정원의 마음을 열게 된다. 하지만 십자인대 부상으로 그 꿈은...
2.1.3. K리그 복귀, 그리고 K리그판 유다 신드롬과 법적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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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해외 진출 때 잡음이 있긴 했지만, 많은 축구팬들은 서정원이 친정팀인 안양 LG 치타스로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정원 측 주장에 따르면 데뷔 때부터 해외 진출에 관해 LG 프런트와 충돌이 잦아서 좋지 않은 감정이 많았고, 수원에서 다시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밀어준다는 조건으로 당시 최전성기를 달리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소속을 바꾸게 된다. '''이때부터 안양 LG와 수원 삼성간의 감정섞인 K리그 최고의 더비가 시작된 계기가 됐다.'''
KBS 스포츠 다큐 '승부' - 슈퍼매치의 한가운데에 서다 당시 서정원은 안양 LG 치타스로 복귀하는 조건으로 안양 LG에서 서정원에게 준 50만 달러(당시 약 7억 원) 반환청구소송에 피소됐다. 결국 서정원이 패소하면서 일부 금액인 3억 원을 안양 LG에게 돌려줬다. 그 정도로 서정원과 안양 LG와의 관계는 험악했다. 또한 서정원은 프랑스에서 뛰면서 보스만 룰 사례나 에이전트(당시는 매니저로 표현) 제도를 접하면서 그동안 기존에 K리그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관행을 시도하기도 했다.
1999년에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복귀한 이후 전 소속팀 안양을 상대로 오버헤드킥으로 골을 넣는 등 맹활약하여 K리그 2연패, AFC 챔피언스 리그 2연패[9] , FA컵 등 많은 우승컵을 수원 삼성에 선사했다. 아시안 슈퍼컵의 마지막 대회에서는 알 샤바브에서 우승컵을 뺏길 뻔 했으나 그 어려운 중동에서 서정원이 2골을 몰아붙이면서 수원에게 우승컵을 가져다 주는 등 소위 폭발할 때 미친 활약을 했다. 특히 2003년 안양과의 라이벌전에서 넣은 골은 김○○ 기자의 K리그 베스트 골 5에도 선정될 정도로 멋진 골이었는데 이 골로 인해 안양은 0:2 패배하여 결국 수원과 서정원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됐다.
2001, 2002, 2003 수원 팬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
서정원 단독 인터뷰 “기성용 사태, 21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위와 같이 복귀 당시의 안양 LG와의 분쟁 사건은 2020년 기성용의 K리그 복귀 무산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회자되고 있다. 더구나 해당팀이 동일팀이라 20여년이 지난 현재도 달라진게 없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2.1.4.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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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은퇴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10] 오스트리아 SV 잘츠부르크로 연수를 겸해서 자유계약으로 이적하는데 이게 의외로 대박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서 12경기 2골이라는 괜찮은 성적을 올렸고, 다음 해에는 SV 리트로 이적하여 리그에서 7골을 기록하면서 막 2부에서 올라온 팀을 인터토토컵 종합우승을 거두게 하면서 UEFA 컵에까지 출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 덕분에 오스트리아 유명 일간지 <쿠리어>나 <슈포르트보헤>지에서 2년 연속 최우수 외국인 선수로 선정[11] 됐다. 그 활약으로 독일 분데스리가 1·2부리그 팀에서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나이와 지도자 공부 문제로 은퇴했다. 은퇴 직전 대전 시티즌의 감독으로 있던 은사 김호 감독이 선수로 뛰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
서정원의 말년 활약 때문에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가 K리그보다도 훨씬 수준이 낮은 것 아니냐고 비하하는 의견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서정원의 K리그 마지막 시즌은 원래 포지션이 아닌 윙백으로 차범근이 출전시켜서 골 기록이 없었던 것이고 오스트리아에서도 SV 리트로 이적한 뒤에야 원래 포지션인 윙어로 뛸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진출 첫해인 SV 잘츠부르크에서는 중앙 미드필더로 뛰었다. 잘츠부르크에서 계약 기간이 끝나고 라피드 비엔나등의 우승 후보 팀들이 관심을 가졌지만 승격팀인 SV 리트의 감독이 서정원을 계속 찾아와서 공격적인 윙어로 확실히 쓰겠다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그 해 SV 리트는 강등 예상팀이었는데 무려 4위로 시즌 마감. 그리고 이 감독은 레드 불 잘츠부르크에 기술고문으로 가면서 파스칭의 새 감독이 부임했고 이때는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또한 서정원 외에 강철, 최성용, 노병준 등 K리그 주전급 선수들이 오스트리아에 진출한 적이 있지만, 이들 중 서정원처럼 센세이션을 일으킨 선수는 없다. 그리고 요즘은 황희찬의 활약이 좋을 때마다 다시 서정원과 오스트리아 리그의 수준을 논하는 글들이 축구 커뮤니티에 올라오지만 UEFA 순위와 상관없이 서정원이 활약하던 시절은 그래도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오스트리아 리그로 이적해서 1~2년 뛰다 은퇴하거나 더 좋은 리그로 이적하는 이름값있는 선수들이 많아서 지금보다는 질적으로 스쿼트가 좋았다. 당시에는 동유럽에 명문 구단 선수들도 은퇴전에 오스트리아에서 활약했다. 예를 들어 서정원이 활약하던 시절에는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선수로 알렉산더 치클러(Alexander Zickler)나 토마스 린케(Thomas Linke)처럼 바이에른 뮌헨 팬이라면 모를리 없는 선수들과 니코 코바치(Niko Kovač) 그리고 얀 콜러와 장대 축구의 스트라이커로 유명했던 브라티슬라프 로크벤츠(Vratislav Lokvenc)등이 있다. 송종국과 페예노르트에서 활동하던 토마스 종사(Tomasz Rząsa)도 말년에 오스트리아로 진출해서 서정원과 같은 소속팀에서 뛰었다.
이렇듯 서정원이 활동하던 2000년대 초반에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는 유럽 클럽 랭킹 10위권 중순을 하기도 했었다. 이 정도는 스위스 리그라든지 유럽에서 상위리그 급이었다.(서정원이 이적한 SV 잘츠부르크는 93~94시즌에 유로파 리그 전신인 UEFA 컵 준우승(인테르가 2-0으로 이겨 우승)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후에 좀 추락하여 2010년대 초반만 해도 리그 랭킹 20위권 초반을 오르락내리락 하기도 했다. 그리고 과거와는 다르게 현재 오스트리아 리그는 독일인 출신 노장 선수들도 2부(2.Bundesliga) 출신이다. 당장 현재 오스트리아에서 유명한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스쿼트를 봐도 웬만한 축덕들에게도 생소한 스쿼트다. 과거에는 오스트리아 리그에 갔던 한국인도 K리그에서 프로 경력을 쌓았던 선수들이 진출했지만 지금은 프로 경험이 없었던 황희찬과 이진현같은 젊은 선수들이 진출해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당시와 지금의 리그 수준 차이가 커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리그 수준을 논하기 전에 전혀 다른 언어, 문화권인 곳에 가자마자 실력을 발휘한 것은 서정원의 적응력 자체가 뛰어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리그 잔여 경기가 12경기 남은 상태에서 SV 잘츠부르크로 선수 겸 코치로 이적해서 12경기를 모두 출장하고 2득점했다. 자신의 포지션이 아닌 중미로 활약하며 잔류를 확정지었고 SV 잘츠부르크는 다음 해의 레드불 잘츠부르크로 탄생했다. SV 잘츠부르크의 처음이자 마지막 멤버가 되었다.
SV 리트에서 2년 활약하면서 리그에서 총 9골을 득점했다. 리그 마지막 헤딩 골은 링크에 없다. 또한 컵대회와 FA컵에서의 골 장면들도 포함되지 않았다. 영상2, 영상3, 영상4, 영상5, 영상6, 영상7, 영상8
2.2. 국가대표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으며, 그 때 잠시 함께한 데트마어 크라머 감독의 영향을 받았다. 국가대표팀으로 1994년, 1998년 월드컵에 출전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스웨덴전에서 득점해 이름을 알렸으며 특히 1994년 미국 월드컵 조별라운드 1차전인 스페인전에서 1-2로 뒤지고 있던 후반 45분에 홍명보-황선홍의 1:1 패스 후 상대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은 뒤 홍명보의 패스를 받아 동점골을 넣기도 했다.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골 1위로 꼽히는 명 장면'''이기도 하다.
1997년 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헤딩 동점골을 넣으며 도쿄 대첩의 시작을 알렸다.
그런데 정작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는 팀의 추락과 함께 서정원 역시 눈에 띄는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당시 서정원 본인의 사정도 있었는데, 프랑스로 출국하기 전 '''수두에 걸린 아들을 안아주다가 그만 아들의 수두가 옮아버려''' 비행기도 선수단과 따로 타는 등 전혀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 것.
또한 2002년 월드컵의 멤버를 선정할 때는 십자인대 부상 후유증이 있었고 소속팀인 수원 삼성의 김호 감독도 히딩크 감독에게 국가대표로 선발해서 출장시키지 않을거면 선발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히딩크의 자서전인 마이웨이에는 최종 엔트리에 선발하지 않아서 아쉬웠던 멤버를 몆명 적었는데 그 중에서 서정원의 이름도 언급했다.
2006년때는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서 노장 투혼을 하자 한때 대표팀에 선발하자는 여론도 형성되었다. 국가대표 통산 기록은 87경기에 출장하여 16골을 기록했다.
여담이지만 당시 1994년 월드컵 당시 득점한 골로 인해 이근호보다 먼저 '''"월드컵에서 골을 기록한 선수 중 가장 연봉이 적은 선수"'''라는 씁쓸한 칭호가 붙었다. 1990년 병장 월급이 9,400원이니 진짜 작은 셈. 그 당시 서정원은 방위병으로 복무하던 도중 대표팀에 소집되었다.[12]
2.3. 플레이 스타일
100m를 11초에 끊는 엄청난 스피드를 활용, 좌우측 측면을 휘젓는 플레이를 선호하며 체력이 좋아서 가끔은 윙백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90분 내내 미친듯이 움직였다. 한국의 윙 스페설리스트 계보를 이을 만한 선수.[13] 특히 1994년 월드컵 당시 스페인전과 독일전에서 보여준 플레이가 백미.
또한 가끔 오버헤드킥으로 골을 넣기도 하는 등 발을 활용한 능력은 나이를 먹어도 최고 수준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스피드가 죽자 맨유의 라이언 긱스처럼 중앙과 측면으로 움직이며 상대 수비수를 속임수로 벗겨먹는 플레이를 선호했으며 K리그 말년에는 차범근 감독 부임 이후에 윙백으로 기용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진출 이후에는 SV 잘츠부르크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하다가 SV 리트로 이적, 자신의 원래 포지션인 윙으로 돌아가서 2년 더 활약하다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축구수도를 이끄는 감독'''
수원삼성 감독시절 빅버드 소개멘트
- 서정원/지도자 경력 문서로.
4. 이야깃거리
- 자기소개서 형식으로 작성된 인터뷰에서 TWICE 팬이라는게 드러났다. 딴 감독들이야 아이돌 아닌 이승철, 임창정을 써내거나 요즘 아이돌을 써놓되 "애들이 좋아한다"고 했지만 서정원은 그런거없이 딱 트와이스라고 써놓았다. 물론 자식 세 명이 전부 아들이라 애들이 좋아해서 썼을 수도 있다.
- 그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으로는 정원을 가꾼다고 한다. 감독이 된 지금도 술, 담배는 물론 탄산음료까지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한다.
- 아들인 서동한 역시 축구 선수인데, 매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20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아버지의 후배가 됐다. 등번호도 아버지의 번호인 14번을 달았다. 다만 아버지와 다르게 폭발적인 스피드의 윙어가 아니라 공격형 또는 중앙 미드필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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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종료 후 스페인 명문팀 FC 바르셀로나로부터 이적 제의를 받았으나 군문제 사유로 결렬되었다고 한다.
- 뭉쳐야 찬다 13화 마지막 부분에 전제향과 함께 특별출연했다. 이형택이 안정환으로부터 어쩌다 FC의 최우수 선수로 선택받은 특전으로 한우 세트를 받았는데, 가족들이 미국에 있는 관계로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 함께 구워먹었고, 그 지인 중 한명으로 나온 것. 이때 이형택에게 "골 좀 더 넣어라"고 말했다.
5. 관련 문서
[1] 광주면이 읍으로 승격된 것은 1979년이며, 광주군의 시 승격은 2001년.[2] 참고로 크라머는 레버쿠젠에서 차범근을 지도했고 바이에른 뮌헨을 분데스리가 우승에 올려놨던 인물이다.[3] 1994 FIFA 월드컵 미국 당시 국군체육부대 이등병이었다.[4] 원래는 릴 OSC 스카우터가 애정을 표현했지만 릴은 당시 2부 리그에 있어서 선수가 거부. 그러자 아깝다며 자기 친구가 일하는 스트라스부르에 연락을 해서 "저 선수 아까우니 니가 관찰해봐라"해서 이적이 성사되었다.[5] 참고로 무삼파는 말년에 노쇠해서 K리그 왔다가 망했다. 그 후 이근호를 영입하려던 빌렘이 무삼파를 영입했다가 역시 망했다. 결국 빌렘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했다.[6] 몽펠리에를 2011-12시즌 리그앙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그 뒤 2015년까지 릴 OSC 감독이었다.[7] 감독이 외국 선수는 아프리카 선수만 고집하면서 서포터들에게도 욕을 먹었다. 이 때 바뀐 감독이 바로 피에르 만코프스키(Pierre Mankowski) 카메룬 국대 감독이었던 양반인데 결국 최후의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만코프스키가 한국에 왔을때는 아시아 선수들이 좋다며 뻔뻔하게 립서비스를 했다. [8] 올리비에 다쿠르는 AS 로마로 이스마엘은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니 납득이 간다.[9] AFC 챔스의 전신 중 하나(FA컵과 리그컵 우승팀이 나가던 아시안 컵 위너스 컵이 합쳐졌기 때문)인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2000~2001)으로 이 대회 마지막 우승도 수원이 거뒀다. 참고로 이전 글에선 아시안컵 위너스 컵 우승이라고 잘못 적혔는데 이 컵에서 한국 클럽팀은 준우승만 3번 했을뿐, 우승한 적은 없었다.[10] 지금보다 선수 생명이 짧았던 당시 1998 월드컵 직후부터 노장 소리를 들어왔고 2002년에는 플레잉 코치를 권하는 등 국내에서 가장 오랫동안 노장 소리를 들어온 선수로 불러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11] 놀랍게도 이 시절 몸 상태가 20대 중후반 정도였다고. 마침 대표팀의 주전 윙어였던 설기현이 역주행 사건으로 한창 욕을 먹던 시기였던지라 일부 축구 사이트에선 독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설기현 대신 서정원을 넣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아니다. 정확히 독일 월드컵 프랑스전 박지성 골은 설기현이 올려준 크로스를 헤더로 연결해준 조재진의 어시스트다.[12] 공식적으로는 상무 소속이었다. 방위병이었는데 어째서 상무 소속이었냐하면 다른 선수들은 전부 입대시 상무 지원이었지만 서정원만은 방위병-상무 파견 형식이었기 때문. 그래서 방위병의 주말 경기 출전이 가능했던 94년, 95년에 각각 4경기씩 안양 소속으로 리그 경기를 뛸 수 있었다.[13]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은 윙어들이 강한 편이었는데 그 이유로는 빠른 스피드와 체력(을 빙자한 정신력)이었다. 차범근-원래 윙포워드로 시작했다-, 고정운, 하석주 등등... 애당초 한국은 전통적으로 키와 파워를 지닌 대형 포워드를 선호했고(황선홍, 최용수, 김도훈 등) 양사이드 무한 크로스-헤딩골이 주요 공식이었다. 그런 영향으로 한국 국대는 박지성, 이영표, 송종국, 설기현, 이천수 등 뛰어난 윙어가 꾸준히 나왔으나 브라질 월드컵 이후 2010년대 중반 전방의 대형 스트라이커 실종과 맞물려 윙어도 이청용, 이근호 등으로 근근히 이어가는 수준이었다. 사실 체력이 좋았다기보다는 정신력으로 많이 뛰던 시절이었다. 즉 강한 정신력으로 많이 뛴다 - 얘네들 체력이 좋네? - 실상은 체력 저하 때문에 경기 내에서 기복 발생. 그렇지만 2010년대 후반, 특히 러시아 월드컵 이후 손흥민의 전성기가 오고 이외 황희찬, 황의조 등이 활약해 다시 강한 윙어와 대형 포워드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