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수

 


'''고종수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고종수의 수상 이력'''





[image] '''MVP'''
'''1997년'''

'''1998년'''

'''1999년'''
김주성
(부산 대우 로얄즈)

'''고종수'''
'''(수원 삼성 블루윙즈)'''

안정환
(부산 대우 로얄즈)

'''1998 K리그 베스트 XI '''
FW
김현석
FW
샤샤
MF
'''고종수'''
MF
유상철
MF
백승철
MF
안정환
MF
정정수
DF
안익수
DF
마시엘
DF
이임생
GK
김병지
'''1999 K리그 베스트 XI '''
FW
안정환
FW
샤샤
MF
서정원
MF
'''고종수'''
MF
데니스
MF
고정운
DF
강철
DF
김주성
DF
마시엘
DF
신홍기
GK
이운재

'''수원 삼성 블루윙즈 10주년 베스트 XI '''
FW
샤샤
FW
나드손
MF
데니스
MF
김두현
MF
'''고종수'''
MF
김진우
MF
서정원
DF
최성용
DF
박건하#s-1
DF
이병근
GK
이운재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주년 레전드 '''
18
박건하#s-1
13
산드로
14
서정원
22
'''고종수'''
29
곽희주
7
김진우
3
이병근
1
이운재
11
데니스
12
나드손



''' 대한민국의 축구감독 '''
''' 이름 '''
'''고종수'''
'''高宗秀 | Ko Jong-Soo, Go Jong-Su'''
''' 출생 '''
1978년 10월 30일[1] (45세)
대한민국 전라남도 여수시
''' 국적 '''
[image] 대한민국
''' 신체 '''
키 175cm
''' 직업 '''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 소속 '''
''' 선수 '''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6~2004)'''
교토 퍼플 상가 (2003 / 임대)
전남 드래곤즈 (2005)
대전 시티즌 (2007~2008)
''' 감독 '''
매탄고등학교 (2011 / 코치)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1~2012 / 트레이너)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3~2017 / 코치)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7 / 스카우트)
대전 시티즌 (2018~2019)[2]
''' 국가대표 '''
38경기 6골 (대한민국 / 1997~2001)
1. 개요
2. 선수 시절
2.1. 프로에 데뷔하기까지
2.2. 수원 삼성 블루윙즈
2.3. J리그
2.4. 수원 삼성 2기, 전남 드래곤즈
2.5. 대전 시티즌
2.6. 기록
2.7. 국가대표 경력
3. 우승
5.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6. 좆레머니(?)
7. 악성 루머
9. 여담
10. 수상 경력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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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이자 현재 '''업무방해 혐의를 받고있는 피고인이다.'''[3]
선수 시절 축구 천재로 불릴만큼 대한민국 축구를 이끌어 갈 인재로 평가받았었으나 부상과 언론, 각종 악성 루머 등으로 고생한 비운의 축구천재로도 유명하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 시절 김호의 아이들의 일원으로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선수 생활의 말년을 보냈던 대전 시티즌에서는 후술할 선수단 무단 이탈 등의 사건 사고들로 대전 구단과 불협화음을 내다가 결국 무책임하게 조용히 은퇴를 하면서 선수로서의 마무리를 안 좋게 끝냈다.
이후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코치를 거쳐 2018년 대전 시티즌 감독으로 부임하였는데, 과거 선수 시절 안 좋은 사건과 그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로 팬들의 반발을 샀지만 이후 감독으로서 승강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준수한 성과를 거두면서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을 어느 정도 잠재웠다.[4]
그러나 2019년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됨과 동시에 성적까지 계속 부진하여 결국 경질을 피할수 없게 되면서 과거 선수 시절과 마찬가지로 지도자로서도 결국 대전 시티즌에서 불명예 퇴진하게 되고, 축구인으로서는 물론 자칫 범죄자라는 오명까지 쓸 위기에 놓였다.

2. 선수 시절


"고종수는 어린 나이에 안정환이동국과 K리그에서 트리오를 이루면서 K리그를 이끌어 나간 선수였다. 안정환과 이동국은 K리그에서 자리를 잘 잡았는데 고종수는 그렇지 못했다. 고종수를 보면 안타까운 심정이다.

김병지

"지금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코치로 있지만, 이 분은 지금 시대에 태어났어야 한다. 너무 일찍 태어났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선입관과 색안경 속에서 생활했다. 만약 종수 형이 지금 시대에 축구선수로 활약했다면 스페인의 이승우는 명함도 못 내민다. 왼발 하나로 모든 걸 끝낼 수 있는 선수였다. 이런 선수를 ‘축구천재’라고 불러야 한다.”

이동국

"고종수는 정말 천재 선수였다. 축구 아이큐가 200은 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축구를 위해 타고난 것처럼 열정적이었고, 축구를 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가끔 엉뚱한 짓을 해서 문제가 됐는데, 그래도 축구 훈련과 경기에는 지장을 주지 않았다. 다만 축구장 밖에서 친구를 잘못 사귄 것 때문에 더 큰 선수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종수는 천부적 재질을 가졌어. 그런데 절제하는 면이 부족했지. 사춘기 때는 무조건 튀려고 했다고. 물론 스타플레이어의 기질이 있었기에 조금만 변화했다면 더 큰 선수로 성장했을 거야.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돈과 인기가 많아져 힘든 삶을 산 게 아닌가 싶어. 선수 때의 그 같은 경험이 지도자 생활하는 데 큰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

김호

"나는 고종수를 무척 좋아했다. 그의 프리킥은 한국 선수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하다. 하지만 축구는 발 재간 하나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공격도 해야 하고 수비도 해야 한다. 체력도 있어야 한다. 스타 플레이어는 운동장 밖이 아닌 그라운드 안에서 그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는 고종수에게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하려면 자신에게 투자하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 하지만 고종수는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내 기대에 못 미쳤고, 그러다 부상이라는 불운을 겪었다."

거스 히딩크


2.1. 프로에 데뷔하기까지


여수서초등학교, 구봉중학교, 금호고등학교 시절 그라운드를 휘젓고 돌아다니며 나이에 걸맞지 않게 대담하고 탁월한 축구 실력을 선보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93년 시도대항 축구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팀의 결승진출을 이끌었고,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94년 금호고를 제2회 백록기고교축구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활약에 언론은 고종수에게 '앙팡테리블 (Enfant Terrible)'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때부터 고종수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김호 감독은 당시 새롭게 창단하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초대 감독을 맡으면서 고종수를 바로 수원으로 데려오게 되는데, 원래는 전남 드래곤즈가 고종수에게 눈독을 들여 그가 다니던 금호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고종수는 물론이거니와 이후에 또 제 2의 고종수로 알려졌던 고창현까지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빼앗기자, 금호고에 대한 지원을 확 줄였다고 한다.

2.2. 수원 삼성 블루윙즈


[image]



그렇게 수원에 입단한 고종수는 96년 7월 4일 전북과의 경기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루며 이 뒤에도 프로 데뷔 시즌 신인치고 꽤나 많은 기회를 부여받게 되었다. 11월 2일에는 데뷔전 상대였던 전북을 상대로 프로 데뷔 골을 터뜨렸는데, '''이 득점은 현재까지도 수원 역사상 최연소 득점 기록(만 18세 3일)으로 남아있다.''' 고종수는 1996시즌 14경기 1골 4도움을 기록하였고, 다음 시즌에도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1997시즌에는 15경기 3골 5도움을 기록하였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자로 잰 듯한 패스와 크로스, 중거리 슛, 센스 있는 플레이로 단숨에 수원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팀을 이끌었다. 항상 골을 넣고 하는 덤블링 세리머니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특히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조별리그 탈락 후 K리그 보기 운동[5]이 펼쳐졌을때, 당시 이동국, 안정환과 함께 젊고 수려한 이미지를 보이며 K리그에서 소녀팬들을 몰고 다녔다. 그 중에 고종수는 소속팀인 수원의 '''적극적인 스타 마케팅''' 덕분에 언론에 훨씬 더 많이 노출될 수 있었고, "축구선수=그냥 잘뛰는 애들"이라는 공식이 만연해 있던 그 시절 개구장이 같은 외모의 국가대표 선수가 팬 사인회를 열고 인터뷰도 잘했기 때매 이를 절때 안 띄워줄 수가 없었다. 축구 선수를 넘어 스타급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인기 덕에[6] '''현역 축구선수가 연예활동을 병행하는 당시로서는 가히 파격적인 행보'''를 계속 보였는데, 이는 고종수 본인 스스로가 운동선수로서 딱딱한 이미지를 탈피하고 팬들에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1998년 가수 홍경민의 2집 타이틀곡 '내게 남은 사랑을 위해'의 '''뮤직비디오에 주연으로 전격 캐스팅''' 된다. 가수 조성모를 필두로 엄청난 붐이 일기 시작한 드라마 타이즈 뮤직비디오에 이례적으로 인기 축구스타가 주연으로 캐스팅 된 것이 엄청난 화제가 되며, 무명이었던 가수 홍경민의 인지도도 함께 올라가게 된다.[7] 이에 질세라 그 다음해인 1999년에 안정환이 록그룹 야다의 데뷔곡 '이미 슬픈 사랑'의 뮤직비디오에 주연으로 출연한다. 하지만 고종수의 뮤직비디오 캐스팅은 축구선수로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게, 안정환의 경우 수려한 외모 덕분에 주연이긴 해도 뮤직비디오에서 가공된 캐릭터로 일반적인 배우의 조건 하에 캐스팅 된 것이지만, 고종수의 경우 단순히 주연 캐스팅을 넘어서 '''당대 최고의 축구스타인 고종수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뮤직비디오 각본까지도 만들어 지는 등 사실상 '''축구선수 고종수를 위한 뮤직비디오'''였다고 봐도 된다. 그만큼 고종수가 당시에 축구선수로서는 전국구급으로 정말 잘 나갔다.
고종수의 1998시즌 총 스탯은 20경기 3골 4도움. 시즌이 끝난 뒤 팀을 사상 첫 리그 우승으로 이끈 공로를 인정 받아 시즌 베스트 일레븐과 98시즌 K리그 MVP에 선정되었다.[8]

뮤직비디오 외에도 당시 인기 시트콤이었던 MBC 남자셋 여자셋"떳다! 고종수" 에피소드에서는 실제 고종수 선수 본인역으로 출연해서, 우희진에게 홀딱 반해 신동엽을 똥줄타게 만드는 스토리로도 출연한 적이 있다. 친구인 소지섭이 이를 알고 "쟤(우희진) 남자친구 있다"며 포기하라고 만류하자 고종수가 하는 대사는 "야, 괜찮아.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9]
1999시즌 수원은 두 시즌 연속 리그 우승과 아디다스컵을 포함한 두 개의 리그컵을 모두 우승하였고, 고종수는 이러한 팀의 트로피 수집에 큰 공헌을 하였다. 99시즌 총 스탯은 21경기 4골 7도움.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며 두 시즌 연속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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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성기는 21세기로 바뀌고서도 계속됐다.2000시즌에는 산드로가 합류하면서 기존에 팀에 있던 데니스와 함께 지금까지도 수원 올드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전설의 고데로 트리오를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크고 작은 부상과 시즌 중간에 시드니 올림픽 남자 축구 대표팀에 차출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2000시즌에는 8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하며 4골 3도움을 기록한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일본에서 열린 한일 올스타 vs 세계 올스타 친선 경기에서 세계 올스타 골키퍼로 나온 칠라베르트를 꼼짝못하게한 프리킥 골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이런 활약속에 세계적인 게임회사 일렉트로닉 아츠의 축구 게임 피파 2001 국내 정발판의 표지모델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당시에 피파 99부터 국내 정발판이 배급되며 국내 축구선수를 표지모델로 기용하기 시작한 초창기 단계였고, 고종수 이전에 표지모델로 오른 선수들로 피파 99의 안정환과 피파 2000의 김병지가 있는데, 그야말로 이들 역시 당대 최고의 축구스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피파 2001의 경우, 고종수 효과도 있었지만 유저들이 고대하던 K리그가 탑재되기 시작하면서 FIFA 시리즈 사상 최초로 한국어화된 게임으로 국내에서는 상당히 의미가 깊은 명작으로 불린다. 당시 국내 게임 소프트웨어 판매 순위에서 2위에 등극하는 등 상당히 인기도 좋았다.
2001 시즌에도 기량이 만개하며 소속팀의 데니스, 산드로와 같이 고데로 라인의 일원으로 대단한 활약을 보이며 3월에는 AFC 이달의 선수에 선정되었고, 5월 2일 안양 LG 치타스와의 리그컵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 '''K리그 최연소 20-20 클럽에 가입'''[10]하는 등 최고의 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2002 한일 월드컵을 불과 9개월여 앞두고 월드컵 대표팀 승선은 당연하게 비춰졌던 시기에 K리그 전남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축구 선수 생명을 위협하는 큰 부상을 당해 재활에만 상당시간이 소요됐고 결국 2002 한일 월드컵 대표팀 탈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시즌 기록은 20경기 10골 6도움.
이후 긴 재활 끝에 한일 월드컵이 끝난 뒤인 2002시즌 중반에야 그라운드에 복귀할 수 있었다.
9월 4일 전북과의 경기 종료 직전에 나온 57m 장거리 골을 성공시켜 '''K리그 사상 최단 경기(114경기) 30-30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록을 세운 것과는 별개로 고종수의 폼은 부상 전에 비해 확실히 떨어져 있었다.
시즌 기록은 20경기 4골 3도움.

2.3. J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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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시즌 후 FA로 풀리게 되었는데, 이 때 고종수는 FA 상태로 J리그 진출을 계획하였다. 때마침 교토 퍼플 상가에서 오퍼가 오자 교토로의 이적을 추진하였고, 연봉 약 9억 5천만원, 계약금 1억원 등 우리 돈으로 총 10억 5천만원에 1년간 계약했다. 하지만 이미 치명적인 부상의 이력 때문에 구단과의 협상에 있어서 불리해 진 상태인데다, FA 영입에 대한 이적료가 발생한다는 국내 규정에 의하여 수원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이에 반발한 고종수는 수원과 이적 문제로 분쟁을 겪게된다. 결국 교토 퍼플 상가로의 무상 임대 형식으로 해외 진출을 하는 것에 합의, J리그로 진출하게 되는데 당시 교토의 감독이던 핌 베어벡 감독은 고종수를 중앙 공격수로 쓰려고 하였고 고종수는 이에 반발, 결국 6개월 만에 팀에서 방출당했고 6개월 동안은 소속문제로 분쟁을 겪으며 무적선수로 지내다가 임대기간이 만료된 후 2004 시즌을 앞두고 수원으로 돌아오게 된다.

2.4. 수원 삼성 2기, 전남 드래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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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수원으로 복귀한 이후 본인의 은사였던 김호 감독의 사임으로 인해 후임 감독으로 차범근 감독이 선임된 상황에서 지난 1998년 월드컵에서의 인연으로 좋은 시너지를 낼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초반부터 이런저런 일로 갈등을 겪게 되는데, 팀내 부적응 등의 문제로 훈련에 불참하고 불성실한 태도를 보여 결국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되고 말고 당시 수비수를 필요로 하던 전남과 수비형 미드필더를 필요로 하던 수원이 벌인 조병국김남일 트레이드 때 덤으로 끼어서 이적하게 되는 굴욕을 겪게된다.
전남에서는 그래도 고향팀으로 돌아온 만큼 재활에 성공하여 다시 좋은 기량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전남에서도 재활에 실패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여 결국 한 시즌만에 전남을 떠나게 되고, 무려 1년간 계속 무적 선수로 지내게 된다.[11]
한번은 전남 드래곤즈의 팀 훈련 시간에 늦어서 당시 황선홍 코치[12]에게 딱밤과 야단을 맞고, 훈련 중에도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제대로 성과가 나오지 않자 답답해진 황선홍 코치가 '''"국가대표가 그것도 못해?"'''라고 야단을 치자 그의 대답이 압권인데 '''"예전의(...) 국가대표인데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2.5. 대전 시티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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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 열렸던 2006년 한 시즌에는 계속 무적 신분으로 지내다 2007년이 되어서야 대전 시티즌에 입단하며 2년만에 프로 무대에 복귀하였다.
이미 한차례 전과를 남겼기 때문인지라 이때 계약 조건 중에 시즌 중 절대 팀 분위기를 해치거나 품위를 손상시키면 자동으로 계약을 중지하는 항목이 있었다고 한다.[13]
전성기 때의 호리호리한 몸을 기억하던 팬들 앞에서 보여준 90kg까지 불어난 것으로 언급되던 그의 몸매는 충격과 공포였다.
반년 동안은 몸 만들기에 주력하였으며 특히 2007년 7월 최윤겸 감독이 물러나고 아버지처럼 따르던 은사 김호 감독과 재회하게 된 이후 2007년 후반기부터 K리그에 출장하기 시작, 이 해 후반기에 보여준 대전의 역전극에 큰 역할을 맡아서 6강 플레이오프 기적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2007시즌 종료 후 대전 구단와의 갈등으로 재계약에 난항을 겪는듯 했지만 가까스로 대전 시티즌과 재계약하고 주장 완장을 받으며 큰 기대를 받았으나 대전 시티즌과는 또다시 갈등을 겪게 되고, 그 와중에 '''선수단을 무단 이탈'''하는 등 각종 논란과 구설수에 오르면서 구단과 불협화음을 내다가 결국 2008 시즌 종료 후 김호 감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른 나이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씁쓸하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며, 이로 인해 고종수는 다른 축구팬들에게는 예전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레전드로 칭송받을 지라도 대전 팬들에게 만큼은 감독 커리어에 후술되어 있는 것처럼 현재까지도 매우 안 좋게 보여지고 있다.

2.6. 기록


'''프로 통산 186경기 39골 34도움'''

'''수원 삼성 블루윙즈 130경기 33골 32도움'''
교토 상가 FC 16경기 2골
전남 드래곤즈 16경기 2골
대전 하나 시티즌 24경기 2골 2도움

2.7.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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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노르웨이전을 통해 국가대표로 데뷔하였으며,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멕시코 전의 참패 속에서도 고종수의 플레이는 빛났다. 당시 프랑스 언론에서는 "한국의 14번 선수(고종수)는 마치 브라질 선수처럼 플레이한다."고 평했을 정도로 시망 수준의 국가대표팀에서 이동국과 더불어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열정적인 플레이를 보여줘서 절망 속에서 팬들은 대한민국 축구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 이후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으로 선발되어 대회에 참가했고 같은 해에 열린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에는 부상때문에 선발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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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수원에서 큰 활약을 펼치며 당시 히딩크가 고종수의 재능을 극찬하기도 했다.뉴스 거기에 2002 한일 월드컵 국가대표 감독으로 새로 부임한 거스 히딩크로 부터 전폭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히딩크의 황태자"'''라는 별명을 받기도 하는 등, 축구 선수로서 그의 미래는 탄탄대로를 달리면서 쭉쭉 뻗어나갈 것으로 예상되었다.관련뉴스 그러나 이후 자서전에서는 고종수는 파괴력은 있으나 체력과 수비가담이 부족하다고 평가하면서 포지션을 변경하는 것이 좋을 거같다는 언급을 하였다. 덧붙여 공미로는 부적합하다는 미묘한 평가를 하였다.
하지만 2002 한일 월드컵을 약 1년 정도 앞둔 2001년 8월 25일 전남과 K리그 경기에 후반 교체 투입됐다가 7분 만에 '''십자 인대 파열 부상'''을 입는다. 주치의로부터 '''"더 이상 축구를 하면 안 된다"'''는 통보까지 받을 정도로 '''선수 생명을 위협받는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그래도 부상을 극복하기 위해 9개월 이상을 재활에 매달렸으나, 결국 2002년 월드컵 국가대표 최종 엔트리에 오르지 못하고 월드컵 4강을 달성하는 모습을 TV로 봐야만 했다[14]. 게다가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징병신체검사에서도 최종 5급 판정[15]을 받아 병역의 부담은 덜게 되었지만, 그만큼 '''축구 선수로서 신체적 결점이 있다는 것을 공식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축구 선수들의 경우 월드컵,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에서 매우 우수한 성과를 달성해서 병역특례를 받는 케이스가 아니면, 현역으로 복무하여 상무나 경찰 축구단에서 선수로 활동하는게 좋다. 장기적으로 경력 관리 및 연봉 협상에도 도움이 되는 길이니까.
히딩크 감독은 2002 한일 월드컵 국가대표팀 명단 발표하는 자리에서 고종수를 언급했고 애정어린 충고를 하면서 고종수의 탈락을 아쉬워했다.
본인도 착잡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며 피크를 찍으려던 찰나에 발생한 치명적인 부상은 그에게 '''내적으로 엄청난 상실감과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선수 생활에 있어서도 상당히 무기력 해지는 등 앞으로의 몰락에 큰 영향을 미친다.

3. 우승


  •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6 ~ 2004)
    • K리그 1 : 1998, 1999, 2004
    • FA컵 : 2002
    • K리그 리그컵 : 1999, 2000, 2001
    • K리그 슈퍼컵 : 1999, 2000
    • 아시안 슈퍼컵 : 2001, 2002
    • AFC 챔피언스리그 : 2000, 2001

4. 지도자 경력




5.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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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K리그에서 '아크 정면'의 '고종수 존'이 있을 정도로 '''고종수의 왼발 프리킥은 국내 최고 수준'''이었으며링크, 경기를 읽는 시야가 좋아서 중앙에서 투톱 공격수들에게 공을 배달해 주는 능력이 좋았다.# 지금도 K리그 팬들은 '아크 정면' 위치를 '고종수 존'이라고 부를 정도다. 한 때 고-- 트리오는 국내를 넘어서 전 아시아 최강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을 정도로 무서운 팀이었으니...

특히 2000년에 열린 2002 한일 월드컵 성공기원 한일 올스타와 세계 올스타의 친선경기에서 칠라베르트를 상대로 프리킥 골을 넣은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은퇴한 지 2년이 지난 2011년에도, 고종수와 같이 왼발을 매우 잘 쓰는 염기훈과 코치 대 현역 선수로 프리킥 대결을 했는데 고종수가 10번을 차서 5번을 넣고 5:2로 이겼을 정도다.
다른 테크니션들과 비교해보면 선배 테크니션 최문식윤정환, 후배 이관우보다는, 어디까지나 그들 보다는 신체적으로 강인했고 몸싸움을 피하지 않는 성향이었다. 또한 패스와 조율이 제1옵션이었던 윤정환, 이관우와 달리 적극적으로 슈팅을 가져가며 득점에 주력하고, 패스와 조율은 그 다음이었다. 거칠게 요약하면 최문식에 비하면 기술, 윤정환에 비하면 패스를 좀 뺀 다음에 경합 능력과 슈팅을 더한 선수였다. 이런 면에서 일반적인 플레이 메이커는 아니었다. 하지만 히딩크가 자서전에서 지적했듯이 활동량이나 수비가담이 많은 선수는 아니었고, 공미로 쓰자니 스태미너와 경합 능력이 어디까지나 최문식, 윤정환, 이관우들보다 나을 뿐[16] 유상철처럼 유럽 선수들과 대등하게 맞대결이 가능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점은 설사 부상을 안당했더라도 홍명보를 데려와 빌드업 맡기고, 중원은 유상철과 김남일로 완성한 히딩크호(월드컵 1경기도 못뛴 윤정환이 따지고보면 고종수 대타였다.)에서 과연 계속 중용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점을 던져준다.
그에겐 늘 '''그라운드의 악동''', '''풍운아'''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고, 자유분방한 발언과 행동으로 구설에 오르기 일쑤였다. 선수 시절 그는 외부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인터뷰할 때도 솔직하게 다 말하던 성향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행동이 후회된다며 조금만 성질을 죽였으면 선수 생활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자조섞인 심경도 털어놓을 정도다.
그리고 스무살이 되기도 전인 어린 나이부터 너무 빠르게 스타가 되었고, 축구 선수임에도 이례적으로 방송 출연을 많이 하며 연예인들과 노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최근 인터뷰에서도 그때 방송 출연을 많이 했던 이유로 프로선수로서 자신의 상품성을 높이고 싶어서였다는데, 2001년 부상으로 인해 갑작스레 몰락하는 모습에서 축구 선수로서 기본기와 내실을 다지는데 소홀히하고 '''인기에 물들여져 겉멋과 외적인 부분에만 치중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가 몰락할 때에는 잘 나갈 때 친한척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그를 잡아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방황의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후문도 있다. 관련뉴스
2001년 십자인대 파열 부상이 있기 전 고종수는 리그에서 가장 많은 경기수를 소화하던 선수였다. 특히 히딩크 호의 황태자로 불리며 컨페더레이션스컵 전경기 출장 중이었고, 고종수의 소속팀이던 수원 선수들은(고종수 포함) 아시아 클럽 대항전 출전으로 타 팀 대비 7경기 이상 더 출전 하던 상황이었다. 대략 그당시 고종수 선수의 국대 및 소속팀 경기수를 취합해본 결과 타 국가대표 선수들에 비해 10경기 이상은 더 뛴 시즌이었다. 이정도 경기수를 과연 게으른 훈련량으로 가능 했을까? 그에 대한 상당한 오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프리킥 능력이 향상 된 것도 후배 골키퍼의 훈련을 도와주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은사 김호 감독이나 방송인 안정환이 대놓고 언급했을 정도니 자기 관리에 문제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고 20대 중반에 당한 무릎 연골 부상 이후의 행보는 분명히 자기 관리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고종수의 자기 관리가 문제없었다는 주장은 지나친 팬심이다. 다만 한창 잘나가던 그의 부상 자체는 훈련량과 상관 없었다. 그의 주 부상 부위는 왼쪽 무릎 연골 부상으로 고종수 선수 커리어 끝까지 고질적으로 괴롭혔던 부위인데 무릎 연골 부상은 훈련량이 많고 적고와는 큰 상관이 없으며, 2001년의 게임 수는 체력 훈련을 게을리 한 선수가 뛸 수 있는 경기 수가 아니었다.
본래 잘 놀긴 했으나 할건 하고 노는 선수였는데 가장 실력이 물 올랐을 때 불시에 들이닥친 무릎 십자인대 부상, 그 무릎 십자인대 파열 이후 몸이 완전히 올라오기 전 일본 진출, 일본 진출 이후 핌 베어벡과의 불화라는 악재가 겹치는 가운데 사생활과 선수생활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나락에 떨어졌다는게 정확한 분석이다.
사실 그의 잦은 TV 출연이나 자유분방한 인터뷰 자체가 커리어를 망쳤다고는 볼 수 없다. 은퇴한지 한참 지난 시점임에도 사람들이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안정환과 마찬가지로 '''역시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종목의 스타들은 CF나 TV 프로에 출연하는 일이 흔하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스포츠스타를 운동기계로 취급하고 연애 결혼 휴식시간의 간단한 오락, 비시즌 기간 방송 출연 등을 악플의 명분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미디어에서 특정 스포츠가 등장, 대두될 때는 본래 그 곳에서 마스코트 역할을 했던 선수가 존재했고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외유를 한 경우가 많다. 고종수의 문제점은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깥으로 새어버렸다는 점이다. 어차피 프로 선수가 잘하면 미디어에 노출 될수 밖에 없다. 프로이기 때문에 팬의 관심을 끌고 기사거리를 제공하는건 오히려 의무에 가까운 일이다. 되는 사람은 뭘 해도 된다. 똑같이 전파를 탄 안정환도 페루자 이적 사건으로 클럽 경력이 완전히 꼬인거지, 방송 타서 포텐을 망가트리진 않았다. 또 이동국 역시 현재 방송을 타면서 현역 생활을 하지만 성적은 여전히 잘 나오고 있다. 또 아무리 방송 안타고 묵묵히 훈련만 하는 선수라고 해도 부상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6. 좆레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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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고종수가 세레머니를 펼치다가 쥐가 난 탓에 은퇴한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데, 그건 결코 사실이 아니며 그저 타이밍이 절묘했을 뿐이며, 2019년 대전 시티즌 출정식에서 고종수는 절대 이 세레머니 탓에 은퇴한 것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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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움짤은 온라인 상에서 좆레머니(...)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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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각종 합성 사진을 비롯해서 수많은 고종수의 좆레머니 짤들이 생겨졌다.
고종수 감독은 대전 시티즌 감독을 맡은 뒤 출정식에서 승격하면 이걸 '''다시 보여주겠다고''' 선언했다.

7. 악성 루머


오랫동안 고종수는 악성 루머와 헛소문으로 고생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리니지설이 있다. 리니지에 빠져 훈련을 게을리하고 연봉도 아덴으로 달라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는 부상으로 쉴 때 동료 선수가 한번 해보라고 권해서 몇번한게 다였는데 기자 들의 왜곡을 거쳐 오랫동안 그의 이미지를 좀 먹었다. 말도 안되는것인데 이걸 같이 퍼뜨린 누리꾼들도 공범이다. 그래서 고종수는 "연봉을 아덴으로 받으면 나는 뭘 먹고 살겠냐?"라면서 굉장히 억울해했다.
여담으로 이거 말고도 은퇴한 뒤 이야기한 걸 봐도 갑자기 경기장에 나타나 처음 보는데 반말까던 사람이 나 기자인데 재수없게 잘 부탁한다느니 시건방 떨면서 잘 해보자구 이래서 "저 알아요? 반말부터 하시고." 이랬더니 다음 날 그 기자가 아무개 신문 1면기사로 "고종수 나에게 반말하지 마라, 건방진 뭐시기"라고 왜곡으로 갈겨대서 기자보면 패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했다고 회상했을 지경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악동 이미지가 고착화되고 그 때문에 고종수 이름이 신문에 뜨기만 하면 대중들에겐 고종수가 또 사고쳤겠거니... 정도로 인식되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가수 조성모와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었다는 사건 기사#해당기사캡쳐 이미지 그런데, 기사 내용상으로 먼저 욕설을 한 것도 먼저 주먹을 휘두른 것도 조성모였고 고종수는 일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금방 자리를 떴을 뿐인데 욕은 고종수가 다 먹었다. 하필 기나긴 재활과 슬럼프를 반복하던 기간이다 보니 축구 선수가 경기는 안 뛰고 술만 마시냐며 까인 것도 있었지만....
다만, 이 사건에 대해 2007년 이영미 기자와 했던 한 인터뷰에서 고종수가 직접 밝히기를, 본인은 술 한 잔도 안 마신 상태에서 술을 좀 마신 상태의 조성모랑 인사를 나눴는데 아는 형이 둘이 나이가 같으니까 친구 먹으라고 해서 친구하자며 반갑다고 주먹으로 퉁퉁 치고 약간의 장난기 있는 액션을 취한 것 뿐인데 다음날 스포츠 신문 1면에 '고종수, 조성모랑 난투극' 운운하는 기사가 뜬 거라고 황당하고 "왜 기자들은 자기한테만 이럴까?" 하는 생각에 정말 많이 서러웠다면서 상황을 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기레기의 농간임을 주장했다.
애초에 시비가 붙어서 주먹다짐을 했다던 기사 내용도 진짜인지 소설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체적인 대화 내용과 상황 설명이 꽤 디테일하게 나와있다보니 정확한 진실은 당사자와 당시 함께 있던 목격자들만이 알 듯... 다만, 조성모가 당시 최고의 인기 스타였고 직접 싸웠다는 증언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기레기가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라 사실이 아닌 듯 하다.

8. 논란




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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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년 1월 28일, 터키 안탈리아에서 열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몰도바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관중석에 앉아 있는 장면이 중계에 포착되었는데,[17] 해설위원이었던 이영표가 '하마터면 종수라고 부를 뻔했다. 친한 친구이기도 한 고종수 감독이 새롭게 부임한 대전의 축구가 궁금하다”라고 말하였으며, # 또 같이 중계하고 있었던 이재후 캐스터는 대전 팬들이 고종수 감독에 대한 밝히기도 했다(...).
  • 1997년 과학소년이란 잡지에 '2002 월드컵을 노리는 복제인간'이란 만화가 실린적이 있었는데[18] 고종수를 모티브로 한 고정수란 인물이 등장한다.[19] 작중에서 묘사는 그야말로 2010년대의 리오넬 메시 또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급의 실력을 갖춘 선수. 2002 월드컵에서 한국팀을 우승시킨다.
  • 대전 시티즌 감독으로 선임되었을 당시 P급 라이센스를 취득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축구협회 1급 자격증을 취득했기 때문에 대전 감독을 맡는데는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2019년부터는 P급 라이센스가 있어야만 프로팀 감독을 맡을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뀐다고 한다. [20]
  • 2018년 11월 24일 상당히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 2019년 출정식에서 만일 대전 시티즌이 리그 우승을 하거나 승격을 하거나 선수 시절 전설의 세레머니와 덤블링을 펼치겠다고 했었다.#
  • 대전 시티즌 감독을 맡으면서 정장을 입고 나온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언제나 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10. 수상 경력


  • 1997년 아디다스컵 어시스트왕 수상
  • 1998년 스포츠서울 최고의 인기선수상 수상
  • 1998년 K-리그 MVP 수상
  • 1998년 K-리그 베스트 11 선정
  • 1999년 K-리그 베스트 11 선정
  • 2000년 아디다스 컵 득점왕 수상
  • 2000년 험멜-스투 인기상 수상
  • 2001년 AFC 선정 '2월의 골'
  • 2001년 AFC 선정 '3월의 선수'
  • 2007년 윈저어워즈 올해의 재기상 수상

11. 관련 문서



[1] 다만, 이 나이는 호적상 또는 축구상 나이라는 말이 있다. 77년생인 이영표가 처음으로 고종수를 맞닥뜨렸을때 후배인줄 알고 바로 말을 놨다가 '''포크를 맞을 뻔 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었고, 당시 금호고 출신 사람들에 말도 들어보면 실제 나이는 77년생이라는 말도 있고 76년생이라는 말이 있기도 하였는데, 일단 빠른 76년생인 안정환한테는 확실히 형이라고 부르는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5월 28일 따봉월드컵에서 이 얘기가 잠시 나왔었는데 76년생이었던 조우종이 고종수가 형인줄 알았다며 당시 같이 출연했던 김남일에게 말했는데 정작 77년생 김남일은 고종수가 이때까지 '''79년생'''인 걸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2] 시즌 도중 경질.[3] 무죄추정의원칙에 따라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진 범죄자 취급을 하지 않으므로 범죄자라고 단정해서 서술하는 것을 금함. 추후 유죄가 선고되고 판결이 확정될 시 범죄자로 서술 바람.[4] 하지만 성적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데, 대전 시티즌이 2018년 1부 리그에서 2위를 거두고, FA컵에서 우승한 경남이나 대구 같은 시민 구단들보다도 더 예산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주관적으로 따지면 대전이 2018년에 2부 리그에서 4위를 차지한 게 결코 잘한 게 아니라는 주장 역시 상당하다.[5] 당시 16강 진출 실패한 원인이 K리그의 약화 때문이며 2002 월드컵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조건 K리그를 많이 봐야 한다는 등 언론이 K리그 오빠부대를 이끌고 다니던 트로이카(고종수, 이동국, 안정환)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K리그 분위기 쇄신에 앞장섰다. 이때까지만해도 야빠언론이니 해축빠니 하면서 팬들이 언론에 각을 세우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굳이 보기 운동을 안했더라도 이 당시 월드컵 열기와 K리그 오빠부대의 인기가 아주 상상을 초월해 관중들이 항상 많았기 때문이었다.[6] 이때 고종수의 인기는 가히 인기아이돌 그룹 H.O.T급이었으며, 팬레터가 하루에 20000개씩 날아왔다고 한다.[7] 참고로 1998년 당시 MBC 드라마 해바라기에서 삭발투혼으로 열연하며 각광받던 신예 탤런트 김정은이 고종수의 오랜 여자친구 역으로 나온다.[8] 이 수상은 현재까지도 K리그 역사상 최연소(만 20세) 리그 MVP 수상으로 남아있다.[9] 결국 에피스도 결말은 고종수 키커와 신동엽 골키퍼의 승부차기 대결... 하나라도 막아내면 고종수가 깨끗이 물러나는 조건. 그런데 승부차기로 난타당하던 중 우희진이 오고, 둘 사이의 사랑이 진심임을 알게된 고종수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일부러 공을 허공으로 높이 차 노골시켜버린다. 나름 간지나던 결말...[10]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K리그 최연소 및 최소 경기 출장 20-20클럽 가입 기록이다.[11] 여담으로 당시 신성이었던 박주영이 막 뜨고 있던 시기였는데, 시사매거진 2580에서 박주영에 대해 다루면서 그가 잘 성장하기 위해서 반면교사로 삼아할 예인 다른 쪽 길로 빠지고 자만하고 게을러서 실패한 천재 선배(...)의 한 예로 그의 모습이 나온 적이 있다.[12]대전 하나 시티즌 감독[13] 감독의 말을 듣지않거나, 팀을 무단이탈하고, 음주를 하는 등의 행동을 하지말라는 의미였다.[14] 여담으로 만약 이 당시 뛰었다고 해도 2002년 월드컵 팀의 스타일상 아마 팀에서 상당히 애매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팀 전술상 플레이메이커나 공격형 미드필더의 자리는 없었고 (실제로 이 덕분에 당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평가받고 평가전에서도 우수한 모습을 보인 윤정환 같은 경우는 본선에서 단 한 게임도 뛰지 못했다.) 고종수가 딱히 피지컬과 활동량과 수비력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였기 때문. 쓰리톱의 한자리에는 유럽 선수들과 대등하게 경합하며 볼을 운반하는게 가능한 설기현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설사 뽑혔어도, 압박으로 상대팀 체력이 소진되었을때를 노린 조커로나 기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고종수가 부상을 당하기 이전, 컨페더레이션스컵 직후 히딩크는 공개적으로 고종수에 대한 부정적 소견을 연거푸 밝히며 고종수에게 실망한 모습을 숨기지 않았고 실제로 최종엔트리 발표후 고종수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고종수의 실력 미달 문제를 거론했을 뿐 부상때문에 뽑지 않았다는 소린 하지 않았다. 이를 비추어 볼 때 설사 부상이 없었더라도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는 뽑히지 못했거나 뽑혀도 1경기도 못뛰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대체로 조커나 서브로 뽑힌 박지성, 이천수, 차두리, 최태욱 등을 보면 공통적으로 스피드가 일정 수준이상이며, 활동량 많고, 측면에서 활약할 수 있는 선수들이다. 그에 비해 압박이 부족하고, 슈팅이 제1옵션이고 포지션이 중앙인 고종수는 영 역할이 애매해진다.[15] 제2국민역으로 편입되어 병역의 의무는 없기에 사실상 면제다.[16] 최문식과 윤정환은 90년대 K리그에서조차 탈압박이 안돼서 고생하던 선수들이다.[17] 이 당시 대전 시티즌도 터키 안탈리아에서 전지 훈련을 하고 있었다.[18] 독일이 복제기술로 히틀러를 부활시킨 다음 펠레, 마라도나, 베켄바우어, 크루이프 등의 유전자를 섞어 베를린이란 이름의 공격수와 보탄이란 이름의 수비수를 만들어 월드컵 제패를 노린다는 내용이다. 이 사실을 한국 어린이 신문기자가 밝혀내어 베를린과 보탄은 체포되고 복제인간 연구소는 폭파된다. 개연성 같은건 없으니 묻지말자.[19] 물론 선배인 고정운의 설정도 섞여 있다.[20] 최문식이영익은 P급 라이센스가 있었음에도 부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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