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용성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백용성
白龍城'''

'''출생'''
1864년 5월 8일
전라북도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1]
'''사망'''
1940년 2월 20일(향년 77세)
'''별칭'''
속명은 백상규
법호는 용성
법명은 진종
'''국적'''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
'''본관'''
수원 백씨
'''직업'''
독립운동가, 승려
'''종교'''
불교
1. 개요
2. 3.1운동
3. 3.1운동 이후
4. 제자, 법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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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명은 백상규(白相奎). 본관은 수원(水原).
법호는 용성, 법명은 진종이다. 참고로 는 전통적으로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부모님이나 스승이 아닌 사람이 함부로 부를 수 없어 짓는 것인데, 동아시아 불교에서도 쓰이고 있다.
1864년,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출가했다. 현재 조계종의 약 60%가 이 스님의 계열이다.[2] 옛날에 유명했던 성철 스님이나 현재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법륜 스님 등도 모두 이 분의 영향을 받았다.

2. 3.1운동


경술국치 이후 나라의 녹을 먹었던 관리들을 찾아다니며 나라를 되찾자고 하였으나 모두 몸을 사리는데 그러다 임철호 한 분만이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고 후에 자기 아들을 출가시키는데 그 사람이 불심도문 스님이다.
이후 관리들로는 안 되겠다 싶어 종교계로 눈을 돌리는데 불교는 조선왕조의 탄압으로 세가 약했고 그래서 당시 동학의 후신이자 최대 종교조직이었던 천도교의 수장 손병희를 찾아간다.
손병희는 동학농민전쟁을 이끌었던 경험이 있고 또 그 지도자 중 전봉준, 김개남과는 달리 살아 있었기 때문에 찾아간 것. 그러나 아무래도 전과가 있고 자기 휘하의 수많은 신도들이 있어 주저하였다.
그러나 예전에 용성의 은사 스님인 혜월스님이 예전에 남원의 덕밀암에 있으면서 동학교주 최제우를 숨겨 준 적이 있었는데 그 보답으로 참여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불교의 33천에서 따온 의미로 33명을 대표로 하기로 하고 불교 11명, 기독교 11명, 천도교 11명을 하기로 한다.
이때 실질적인 행동은 한용운 스님을 시켜서 하고 스님은 계속 사람들을 만나면서 설득하러 다녔다.
그런데 기독교측에서 당시 서로 다른 파로 나뉘져 있었는데 같이 못 하겠다고 하여 설득하고 당시엔 아주 작은 조직이었던 기독교에 배려를 해주며 불교의 인원을 줄이고 불교 2인(용성, 용운), 기독교 20인(두 파가 10명씩), 천도교 11명씩하여 33인을 결성하고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다.[3]
원래 계획은 선언문 낭독 후 해산이었으나...그렇게 될 경우 국민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미흡할 것으로 판단, 여종업원을 시켜 겉옷과 신발을 숨기고 제자 동헌 스님을 시켜 종로 경찰서에 신고를 한다.
이렇게 봤을 때 3.1운동의 핵심인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3. 3.1운동 이후


불교 정화 및 대중화에 힘써 서울 시내에 최초로 포교당을 세웠고 신불교운동을 주창하며 서울에 대각사란 절을 운영하기도 하였고 선농일치 등을 주장하며 국내와 만주 등에서 과수원, 농장 등을 경영하며 독립운동의 자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60여 종의 불경어록과 저술을 남겼다.
아들뻘 제자인 동헌스님은 불교정화운동당시 수장 역할을 하며 왕성히 활동하였고 증손주뻘인 법륜스님은 정토회 등의 단체를 만들어 활발히 사회참여 중이다.
윤봉길을 불교에 귀의시킨 뒤 그를 임시정부로 보내 김구 밑에서 일하게 하기도 했다는 것이 불교계의 주장인데, 안타깝게도 백용성의 제자였던 도문의 구술 말고는 이를 입증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 윤봉길 의거 후에는 직접 중국으로 가 장제스마오쩌둥에게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하는 등 무장투쟁을 준비하였으나 밀정에게 걸려 실패했으며, 실의 속에 1940년 입적.

4. 제자, 법맥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하여 독립운동가로 유명하지만, 교계 내에서 승려로서의 위상도 상당하다. 조선왕조 500년 간의 강력한 불교 탄압으로 맥이 끊기 다시피한 한국 불교의 불을 다시 지펴내어, 근현대 한국 불교의 뿌리를 이루게 된 승려 중 한 사람.[3]
조계종 8대 총림 중 하나인 해인총림의 시발점이라 볼 수 있으며, 성철도 용성의 법맥을 잇고 있다.(용성-동산-성철),[4] 직계 법손은 법륜(용성-동헌완규-도문-법륜).

[1]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2] 동국대학교 김광식 교수의 말.[3] A B 월간해인 - 용성선사와 같은 어른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전통 한국불교 종단인 조계종이 과연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고 반문하여 본다.http://haein.or.kr/contents/?pgv=v&cno=278&wno=55[4] "항상 다른 스님은 '선생'으로 부르는 용성 스님이 성철 스님에게만은 '스님'이라는 칭호를 썼다고. 그 이유는 대단한 학식과 구도에 전념하는 모습이 제자의 제자라지만 존경스러워서".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