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트 트라우트만
1. 개요
독일의 前 축구선수.
활동기간도 너무 먼 옛날이라서 국내에선 아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사실은 당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이었다.
2. 인생
베르트 트라우트만은 1923년에 브레멘에서 태어났다. 베르트의 부친 칼 트라우트만은 사민당 당원으로 브레멘의 부두 노동자였다. 그러나 부친의 동료나 이웃 중에는 나치당원이 많았고, 베르트 역시 나치즘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노동조합원이었던 칼은 이런 나치즘에 우려했지만, 이를 막아낼 수 없었다. 베르트는 10살때 유겐트의 주니어 반에 들어갔으며, 이후 집회에 참가하거나 행군을 하는 등, 군사 훈련을 받았다. 어린 나이임에도 베르트는 뛰어난 운동 감각을 가져 유겐트 간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1] 훗날 베르트 트라우트만은 어린 시절 나치즘에 빠져 히틀러를 지지했음을 실토했다.1938년 그는 군국주의 교육의 일환으로 고를리츠의 농장에서 노역을 수행하기도 했다.
17세가 된 1940년, 베르트는 자원해서 군에 입대했다. 처음에는 공군에 들어가려 했지만, 코드 시험에서 떨어졌고, 이후 공수부대원으로 교육을 받아 1941년 5월에 훈련을 종료하고 이후 바바로사 작전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나이는 아직 어렸기에, 상부에서는 최전방이 아닌 후방에서 군사 차량 수리 임무를 맡겼다.[2]
맹장염을 앓다 다시 복귀한[3] 소련 전선에서 베르트는 러시아인들을 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동료는 우연히 숲속에서 SS의 유대인 학살을 목격하기도 했지만, 겁이 나서 이 사건을 주변에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1941년 그는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파견되었고, 이곳에서 수많은 독일군이 죽고 동사하는 광경을 목격하며 자신이 추종한 나치즘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된다. 한편으로 당시 독일군의 전쟁 범죄에도 참여하게 되는데, 본인은 이에 반대하고 회의적이었지만, 강압적인 상부의 명령에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한다.[4]
운 좋게도 베르트는 동부전선의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스탈린그라드가 함락되고, 1944년 5월에 대서양 방면 방어를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었다.[5] 당시 베르트와 그의 전우들은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실감했었다고 한다. 클레베에서 재편된 그의 부대는 이후 파리로 쾌속진격하던 연합군의 맹공을 받고 괴멸한다. 베르트는 3일 동안 산 채로 붕괴된 학교에 뭍혀 있기도 했고 생사를 넘나드는 총격전을 겪었다. 사격을 피해 후퇴하던 중, 그는 높은 담장을 넘다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그 곳에는 전투 중 휴식을 취하던 영국군이 있었다. [6] 이때 베르트는 포로로 잡혔는데, 전후에 그가 속한 연대원 1000여명 중 생존자는 90여명에 불과했다.
22세에 포로로 잡힌 베르트는 영국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당시 심문 과정에서 그는 나치즘에 소극적으로 동의한 자로 분류되었다. 이 포로수용소에서 베르트와 독일 포로들은 재교육 과정을 거치며 독일의 전쟁범죄 실태를 알게 되었다. 이를 부정하는 열성나치들과 달리 그렇지 않아도 전쟁 범죄를 목격하고 참여했던 베르트는 깊은 자책과 후회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7] .
포로 수용소에서 머물면서 베르트는 불발탄 제거 및 도로와 선로 공사, 현지 농장 노동 등을 수행했다. 이때 영국군의 유대인 장교들의 운전수 노릇도 했는데, 유대인 공동체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그들의 물음에 "자본가와 채권자들"이라고 대답했다가 아직 제대로 교정이 되지 않았다는 고발을 받고 14일간 구금되기도 하였다.(...) [8]
1946년 베르트는 아스턴 메이커필드에서 마리온 그린넬이라는 여성을 만났다. 당시 19살인 마리온은 그의 아이를 임신했고, 부모는 격분하여 수용소장에게 항의를 한다. 엄청난 압력에 불구하고 베르트는 마리온과 결혼을 거부했다. 대신 딸 프레다가 태어나자 매주 보육비를 보냈다.
1948년에 베르트는 수용소에서 석방되지만, 그는 영국에서 머물기를 원했고, 현지 아마추어 클럽들에서 공을 찼다. 세인트 헬렌스 파크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 그는 1949년 맨체스터 시티와 계약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두고 25000여명의 팬들이 시위를 하며 경기 보이콧을 외칠 정도로 큰 반대를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맨시티의 주장이자, 참전자인 에릭 웨스트우드[9] 는 베르트와 대면에서 "이 라커룸에서는 전쟁이 없다, 나는 너를 환영하며 앞으로 행운을 빌겠다." 며 호의를 보였다. 이후 맨체스터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 알렉산더 알트만도 일방적인 증오로 베르트 트라우트만을 추방하는 건 옳지 않다는 뜻을 보이며 맨시티 팬들을 설득했다.
베르트는 11월 볼튼 원더러스와 경기에서 데뷰하여 꾸준히 좋은 활약을 이어갔고, 풀햄 경기를 위해 런던을 방문했을 때는 폭격 피해자들에게 야유와 비난을 들었지만, 꿋꿋하게 선방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1950년 베르트는 마가렛 프리어와 결혼을 한다. 장남 존은 결혼 후 7개월 후에 태어나는데, 이 결혼 생활은 1956년 장남의 교통사고 사망으로 파국을 맞게 되었다.[10][11]
1955년 FA컵 결승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선방을 펼치지만 팀은 패배하여 준우승에 그친다. 하지만 베르트 트라우트만은 영국 축구 협회에서 지정한 올해의 선수[12] 로 선정되었다.
다음해 베르트는 다시 FA컵 결승에 섰고, 팀은 버밍엄 시티를 상대로 우승을 다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후반 70분경 피터 머피의 슛을 막다가 부상을 당해 고전했지만, 팀은 3-1로 승리를 거두며 우승컵을 든다. 사흘 후 X레이 검사에서 목뼈가 부러진 사실이 밝혀졌다.[13] 그는 이 결승전을 "17분을 안개 속에서 뛰었다"고 회고했다.
수술을 마치고 다다음 시즌에 복귀한 베르트는 1964년까지 맨시티에서 508경기를 뛰었다.
3. 선수 경력
1948년에 잉글랜드의 세인트 헬렌스 타운[14] 에서 골키퍼로의 영국 축구 리그에 데뷔를 했다. 이후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시티 FC로 이적하게 되는데, '''이 때 부터 그의 전설적인 플레이가 시작된다.'''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총 15년간 뛰었는데, 활동한 시기가 오랜만큼 많은 일화가 있는데, 그 중 유명한 것은, 플레이 중 선수와 부딪쳐 '''목뼈가 부러진(!)''' 상황에서도 끝까지 팀의 골문을 지켰다는 일화가 있다[15][16] . 또한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그의 선수생활 전성기 때는 소련의 전설적 골키퍼인 레프 야신도 그의 플레이를 극찬했다. 그 때 야신의 페널티 킥 선방률이 50%였고, 트라우트만이 60%인것을 보면, 당시 최고의 골키퍼였던건 사실인 듯. 이후 1964년에 웰링턴 타운에서 잠시 뛰다가 은퇴했다.
4.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작은 몇몇 팀들과, 파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과 레바논 축구 국가대표팀의 매니저 직을 담당하다 2013년에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5. 여담
맨체스터 시티 FC에서의 전설적인 경력을 공로로 인정 받아 잉글랜드 4등급 훈장인 OBE를 수여받았다. 웬만한 영국 내 베테랑 직업인들도 수여하기 어려운 것을 독일인인 트라우트만이, '''그것도 나치 독일군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17] 어쨌든 그가 맨시티의 전설적인 선수였다는것은 사실인 셈.
훌륭한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로 뛰지 못했다. 제프 헤어베어거 감독은 독일 리그에서만 뛰는 선수를 우선적으로 선발했기 때문에 스위스 월드컵에 트라우트만을 선발하지 않았고, 결국 트라우트만은 조국의 첫 우승 대회인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할 수 없었다.
같은 동네 이웃팀인 유나이티드가 뮌헨에서 추락사고를 겪자, 현지로 가서 통역을 맡는 등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피파 온라인 4에서 뜬금없이 맨시티 ICON 클래스로 출시되었고 이후 HOT 클래스도 출시되었다. 멀리 던지기, 적극적 크로스 수비라는 좋은 특성이 있지만 키가 190이 안 되고 고급여 골키퍼인데다가 인지도도 낮고 나치 이미지까지 있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2019년 그의 일대기가 영화로 제작되었다.트라우트만(Trautmann; THE KEEPER)[18]
[1] 이미 10살 무렵에 당시 대통령이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표창도 받았다. 브레멘에서 이 표청을 받은 어린이는 트라우트만을 포함해 단 2명이었다.[2] 이 때 트라우트만은 장교들의 차량을 수리하는 업무를 주로 맡았다. 고위급 장교의 차를 고의로(!) 고장 낸 다음 해당 장교가 다른 차량을 이용할 때에 고장낸 차량을 고쳐 친구들과 타고 다녔다(...). 결국 들켜서 9개월간 수감된다.[3] 상기한 차량 수리 사건(...)건으로 수감된 후 맹장염에 걸렸다. 수술 후 원래대로라면 더 오랫동안 징역살이를 해야 했으나 인원 부족으로 부대로 복귀했다.[4]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훗날 포로 수용소에서 나치즘에 대하여 그리고 전쟁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말을 하게 된다.[5] 한 달 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행되었다.[6] 베르트는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7] 이 당시에 충격을 받은 독일 포로 중에 죄책감에 자살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8] 이 유대인 장교는 베르트에게 "독일 돼지" 라고 욕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트라우트만은 '''죽빵'''으로 답했고 또 14일간 구금된다.[9] D-Day 상륙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10] 장남의 사망이 결정적이었지만, 마가렛은 남편의 화려한 인기에 관심이 있었을 뿐, 그의 선수 생활을 돕는데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11] 마가렛과 결혼 생활은 1971년에 끝났고, 이후 우르슬라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8년을 살다가 이혼, 마를리스와 세번째 결혼을 하고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생활한다.[12] 골키퍼로 최초 선정에 외국인으로서도 최초였다.[13] 당시에는 목뼈가 부러진 줄도 몰랐지만, 사흘동안 통증이 지속되자 결국 검사를 받았고 골절 판정을 받고 대수술을 한게 된다.[14] 당시에 지역리그에서 활동하던 아마추어팀이다. 이때 전후에 선수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멀쩡히 팀이 있는 선수들 조차 '초청선수'라는 명목으로 이팀저팀 뛰던 상황이었다. 트라우트만의 경우엔 포로수용소에 있었는데 축구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기용되었다. 더 놀라운 건 원래 포지션은 골키퍼가 아닌 하프백이었다.[15] 1955-1956 시즌 FA컵 결승전때 일이다. 당시 영상이 유튜브에 있는데, 경기 끝난 후 뿐만 아니라, 수상식까지 지켰다! 경기 중이나 이후 수상식때도 계속 목을 잡고 있었는데, 처음엔 그리 심각한 부상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듯. 부러진 목뼈는 2개였는데, 다행히 신경이 손상되지 않았고 금이 간 상태에서도 목뼈가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어 전신불수가 되는 위험은 모면했다. 심지어 목뼈가 부러졌다는 걸 알게 된 건 경기가 끝나고 3일 후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은 다음이었다.(...)[16] 다만 이 부상으로 다음 시즌은 거의 통째로 날렸고(하마터면 맨시티는 강등당할 뻔했다.), 그 다음 시즌에도 부진하면서 맨시티가 한경기에 9골이나 먹는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부상후유증도 문제였지만, 이때 장남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아내도 이 때문에 심한 우울증을 겪으면서 트라우트만 본인의 심신도 정상이 아니었다.[17] 사실 트라우트만은 병역 때문에 프로데뷔 이전인 41년부터 44년 까지 군 생활을 하다 전역했다. 트라우트만이 프로 데뷔한 해는 1948년이지만, 그래도 당시 영국에는 독일에 대한 반감이 많이 남아 있었다. 젊은 세대 상당수가 전쟁에 참전하거나 혹은 독일의 폭격으로 고통받았기 때문.(당장 이웃팀 유나이티드 경우엔 올드 트레포드가 폭격으로 날아가서 메인로드에 더부살이를 해야 했다.) 그래서 그가 맨시티에 입단할 당시에는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적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커리어를 쌓아 영국과 독일 양국의 레전드 스포츠맨으로 인정받았으니 이는 정말 대단한 일이다.[18] 위에 내용을 보면 알지만, 영화에서 연애 부분은 상당한 왜곡이 있다.(...) 다만 1956년 FA컵 결승전 경기는 당시 경기 영상을 참고로 해서 매우 훌륭할 정도로 고증을 잘 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