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야신

 

''' 레프 야신의 수상 이력'''

'''러시아의 前 축구선수'''
<colbgcolor=#c40b0b> ''' 이름 '''
'''레프 야신
Лев Яшин'''

''' 본명 '''
레프 이바노비치 야신
(Лев Иванович Яшин/Lev Ivanovich Yashin)
''' 출생 '''
1929년 10월 22일 /
소련 소비에트 러시아 모스크바
''' 사망 '''
1990년 3월 20일 (향년 60세)
''' 국적 '''
소련
''' 신체 '''
190cm | 체중 82kg
''' 포지션 '''
골키퍼
''' 소속 클럽 '''
'''FC 디나모 모스크바 (1950~1970)'''
''' 국가대표 '''
78경기 (소련 / 1954~1970)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 별명 '''
흑거미, 검은 문어, 흑표범

1. 개요
2. 유년기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4. 은퇴 이후
5. 플레이 스타일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6.3. 수훈
7. 야신에 대한 말, 말, 말
8. 어록
9. 기타
10.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소련의 전 축구선수.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골키퍼다.
'''현재까지 발롱도르를 수상한 유일한 골키퍼[1]다.'''
커리어를 FC 디나모 모스크바에서만 보냈으며, 소련 대표팀 소속으로 초대 EURO 우승을 이끌었다. 골키퍼라는 포지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으며, 현재까지도 러시아 축구계는 물론 역대 골키퍼 포지션의 아이콘으로 남아 있다. 과거에도 현재에서도 골키퍼의 전설이자 표본이다.[2]

2. 유년기


레프 야신은 소련 RSFSR 모스크바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2살 무렵, 군수 공장에 다니면서 축구공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3. 선수 경력


[image]

3.1. 클럽 경력


1949년 20세의 나이로 입단했는데 당시 FC 디나모 모스크바에는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뛰어난 골키퍼 알렉세이 호미치(Алексей Хомич)가 있었기 때문에 처음 3년 동안은 '''후보 선수'''에 머물렀다. 그는 부업으로 같은 FC 디나모 모스크바의 '''아이스하키 팀의 골키퍼'''를 맡기도 했는데, 이 때 그의 팀은 소련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53년, 알렉세이 호미치가 부상을 당하면서 야신에게 기회가 생겼다. 야신은 데뷔전에서 매우 실망스런 경기력 때문에 고위급 관계자에게 썩 꺼지라는 독설을 듣기도 했지만 금방 폼을 끌어올리며 주전 골키퍼 자리를 굳혔다. 이후 FC 디나모 모스크바에서 326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소련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5회, 소련 컵 대회 우승 3회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특히 심각한 부진에서 재기하여 발롱도르를 수상하던 1963년에는 소련 리그에서 '''27경기 동안 불과 6실점''' 밖에 하지 않는 우주방어를 펼쳤다. 이는 상술했듯 현재까지 골키퍼가 유일하게 발롱도르를 수상한 사례다. 41세가 되던 1971년, FC 디나모 모스크바 VS 유럽 올스타 팀의 친선경기를 끝으로 은퇴했다. 당시 이 경기에는 소련이 폐쇄적인 공산권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에서 10만명이 운집했으며 보비 찰튼, 에우제비우, 게르트 뮐러 등 축구계의 거성들도 참여했다.

3.2. 국가대표 경력


야신은 1954년에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는데 당시 소련은 발레리 보로닌, 알베르트 셰스테르네프 등 월드클래스 선수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는데 1956 멜버른 올림픽에서 야신은 소련이 금메달을 따는데 큰 공헌을 한다.[3] 이후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도 출전했는데 잉글랜드와는 2:2로 비기고,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었으며 펠레브라질을 만났는데 바바에게 2골을 허용해 패했다. 이후 4조 순위 결정전에서 잉글랜드를 1:0으로 꺾고 8강에 진출하나 닐스 리드홀름, 군나르 그렌이 이끄는 스웨덴에게 2:0으로 패하고 만다.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0에서 야신은 대활약을 하는데 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를 연파하며 소련의 우승을 이끌어 소련이 유로 초대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이 대회에서 야신은 당연히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야신이 언제나 최고의 골키퍼였던 것은 아니었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는 예선전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 18분 만에 3골[4]을 실점했는데 골키퍼라면 당연히 막아야 할 평범한 슛을 막지 못해 실점을 하는 등 최악의 모습을 보이며 당시 손꼽히는 강호였던 소련이 8강에서 탈락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5][6]
이후 1963년에 부활한 야신은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에서 다시 한 번 소련을 유로 결승으로 이끄나 개최국 스페인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친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도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된다.
이후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을 상대로 3:0 승리, 이탈리아에게 1:0으로 승리, 칠레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고 헝가리를 2:1로 격파하며 4강까지 이끄나 결국 우베 젤러가 이끄는 서독과의 경기에서 헬무트 할러프란츠 베켄바워에게 골을 내줘 1:2로 패배해 결승 진출이 좌절되고 만다. 그리고 이어지는 3·4위전에서 흑표범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포르투갈과 대결하는데 전반 12분에 에우제비우에게 페널티 킥 선제골을 내주고 이후 에두아르두 말로페예프가 동점골을 넣었으나 후반 89분에 통한의 결승골을 내줘 4위에 그치고 만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도 국가대표에 뽑혔으나 후보에 그쳤다. 이후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4. 은퇴 이후


'''작고한 해에 남긴 사진.'''
이후 코치로 활동하다가 선수 시절 입었던 무릎부상이 악화되어 1986년도에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고,[7][8] 말년에는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199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1994년 미국 월드컵부터 그를 기려 대회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골키퍼에게 야신상[9]을 수여하게 되었다.
이후 2019년부터 프랑스 풋볼에서 한 해 최고의 골키퍼에게 야신 트로피를 수여하며 다시 한번 골키퍼라는 포지션에서 그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5. 플레이 스타일




동체 시력과 선방 능력 모두 축구 역사상 최고 수준이다. 야신의 이름은 골키퍼의 대명사가 되었고, FIFA 월드컵 골든 글러브의 초창기 이름이 야신상이었을 정도다. 흔히 실력 있는 골키퍼에게 '거미손' 내지는 '문어발' 등의 별명이 붙곤 하는데, 이러한 별명들의 시초가 바로 레프 야신이다.
현역 시절, 천모자와 검은 옷에 검은 장갑을 끼고 나와서 당시로서는 거인과도 같던 190cm의 장신을 바탕으로 공격수들에게 위압감을 주고, 들어갈법한 슈팅도 막아내는 신들린 모습을 보여주며 유명세를 떨쳤다. 웬만한 공은 그 자리에 서서 팔만 뻗어 잡아내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 이렇게 얻은 별명이 '''흑거미''' 혹은 '''검은 문어'''. 이 때문에 이후 이름 좀 날린 골키퍼들은 검은 옷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즉 경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현대 골키퍼의 이미지를 구축한 셈. 또한 축구골대의 좌우 상단 구석, 즉 골키퍼가 막기 매우 어려운 사각지대를 일명 ''''야신 존''''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야신은 이 쪽으로 날아오는 슈팅조차도 매우 잘 막았다고 한다.
야신은 A매치 78경기 출장에 실점이 불과 70골(경기당 평균 실점 '''0.89''')이었다. 21세기의 전설적인 골키퍼인 잔루이지 부폰은 2014년 11월 기준 평균 실점 0.81골을, 이케르 카시야스는 0.55골을 기록 중이지만 수비수들의 실력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 이탈리아 대표팀 소속의 부폰에게는 파비오 칸나바로, 알레산드로 네스타, 파올로 말디니, 잔루카 잠브로타 등이 있었고 스페인 대표팀 소속의 카시야스에게는 페르난도 이에로, 카를레스 푸욜, 세르히오 라모스 등의 최상위 클래스의 수비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야신과 함께 뛰던 수비수들은 당시 소련의 축구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곤 하나 부폰과 카시야스와 함께 뛰던 수비수들에 비해선 클래스가 떨어졌다.
[image]
'''역대 FIFA 월드컵 경기당 평균 실점율'''
당시의 축구는 지금보다 경기당 평균 실점율이 2배 가량 높았다. 그 이유는 당시 포메이션에는 현대의 전술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WM포메이션으로 일컬어지는 3-2-5형태의 포메이션이 가장 널리 사용됐으며, 이는 근대축구 태동기에 쓰이던 2-3-5 같은 공격 일변도의 포메이션보다는 낫지만, 현대 축구만큼 정교한 수비를 구사할 수있는 전술은 아니었다. 쉽게 말하자면 당시 축구는 우리팀이나 상대팀이나 '''공격 위주의 축구'''를 구사했으며, 많이 넣고 많이 실점하는 메타 속에서 상대보다 더 많이 득점한다를 추구하는게 일반적인 방향성이었다. 야신의 실점률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평가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심각한 부진에서 재기하여 발롱도르를 수상하던 1963년에는 소련 리그에서 '''27경기 동안 불과 6실점''' 밖에 하지 않는 우주방어를 펼쳤다. 야신이 출전하지 않은 나머지 11경기에서의 실점 수가 8실점으로 오히려 더 많다!
발롱도르 투표에서 유효표를 받은 횟수도 역대 골키퍼로서는 최다인 10번이다.[10]
FIFA 월드컵에 총 4번 출전[11]하여 13경기 중 4경기를 무실점으로 막아냈으며, 전체 출장 경기 812경기 중 무실점으로 막아낸 경기가 절반이 넘는 480 경기[12]나 된다.
[image]
손이 큰 것과 동시에 힘도 매우 좋았는데, 특히 어깨힘과 팔힘이 매우 강하여 손으로 공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을 센터 서클까지 던질 수 있었다. 또한 몸도 근육질의 탄탄한 체형이다. 거기에 야신은 현대의 스위퍼 키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 시대에 드물게 수비진을 모두 통솔하고 자신이 직접 에어리어 밖으로 나가 공을 쳐내거나 좋은 킥력으로 팀의 공격 방향을 정해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13] 그의 활약상을 담은 영상을 보면 필드 수비수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지시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모든 기록들을 제치고 그가 과연 인간인지에 대해 의심하게 만드는 부분은 바로 페널티 킥 방어율로, 그는 선수 시절 총 150번의 페널티 킥을 막아냈다고 전해진다. 페널티 킥의 평균 성공률은 80%라고 하지만, 야신의 페널티 킥 방어율은 50%가 넘었다.
야신의 개인 기록[14]
  • 프로 통산 812경기 470클린시트
  • 국가대표 78경기 70골 실점 역대 최다 클린시트
  • FIFA 월드컵 12경기 11클린시트
  • 1000회 이상[15]의 1대1 찬스에서 50골 실점
  • 150회 이상의 페널티 킥 선방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63[16]
  • 발롱도르 드림팀[17] : 2020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60, 1964
  • USSR 올해의 골키퍼: 1960, 1963, 1966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3, 1964, 1966, 1967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FIFA XI: 1963
  • FIFA 공로 훈장: 1988
  • FIFA 20세기 월드팀: 1998
  • FIFA 20세기 유럽팀: 1998
  • FIFA 20세기의 골키퍼: 1998
  • UEFA 주빌리 어워드: 2003
  • IFFHS 레전드: 2016
  • 월드 스포츠 1950~1970년 월드 베스트 XI: 1970

6.3. 수훈



7. 야신에 대한 말, 말, 말


'''직접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진 못했으나, 이 선수는 꼭 언급해야겠다. 야신은 역대 최고의 골키퍼 명단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손님이다. 나는 영상을 통해 그가 곡예사처럼 폴짝 뛰어 한 손으로 환상적인 세이브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야신은 아이스하키 골키퍼도 했다고 들었다. 그는 유일한 골키퍼 발롱도르 수상자이다. 검은 거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그는 존재 그 자체로 상대팀에게 위협이었다. 킥오프 전부터 상대 선수들에게 심리적 우위를 점하는 것은 정말 큰 이점이다.'''

'''이케르 카시야스'''

'''야신은 나보다 축구를 잘한다.'''

'''산드로 마촐라'''

'''내가 유일하게 무서워했던 골키퍼.'''

'''펠레'''


8. 어록


'''세상에 그 어느 골키퍼가 실점하는 것이 괴롭지 않을까? 골키퍼라면 실점하는 것이 괴로워야 한다! 만약 실점하는 것이 괴롭지 않은 골키퍼가 있다면, 그가 과거에 어떤 존재였든간에 그에게는 아무런 미래가 없다.'''

'''사각지대는 어떤 골키퍼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막을 수 있다.'''

'''우주를 나는 유리 가가린을 보는 즐거움만이 페널티 킥을 막을 때의 기쁨에 비할 수 있는 기분이다.'''

'''난 세계 최고의 골키퍼가 아니다. 그건 블라디미르 베아라가 들어야 할 말이다.'''

'''세계에 월드클래스 골키퍼는 단 두 명이 있다. 하나는 나고, 하나는 맨체스터에 있는 독일인 청년이다.'''


9. 기타


  • 축구황제 펠레와 1:1 페널티 킥 승부를 벌인 적이 있었다. 1967년 브라질 축구 연맹이 주최한 산투스 FCFC 디나모 모스크바의 친선경기 후 승부차기 이벤트가 열렸는데, 양 팀을 합쳐 키커 5명과 골키퍼 5명을 뽑아서 키커 한 명이 한 골키퍼를 상대로 10개씩, 모두 50개의 슛을 해 가장 많은 골을 넣은 키커와 가장 많은 슛을 막아낸 골키퍼를 뽑는 방식이었다. 첫 골은 야신이 펠레의 슛을 막아냈지만, 나머지 9골은 펠레가 성공시켰다. 펠레는 50개 중 48개의 슛을 성공시켜 1위를 차지했다. 야신도 50개 중 25개의 슛을 막아내어 골키퍼 부문 1위에 올랐다.[18]
그의 이름을 딴 상이 월드컵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골키퍼에게 주어지고, 야신이 세상을 떠난지 28년이 지나서 러시아월드컵을 개최하게 되었는데 월드컵 공식 포스터에 있는 검은 옷을 입은 골키퍼는 레프 야신이다. FIFA.com에 레프 야신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것이라고 나와있다. 지구 위 모든 축구 대회 중 가장 권위있고 선수들이 나가고 싶어하는 월드컵 대회의 공식 포스터에 등장한다는 것은 야신이 러시아 축구계에, 또 세계 축구계에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보여 준다.
  • 경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보드카를 마셨다고 한다. 골키퍼로서의 중압감이 상당하긴 했겠지만 제 명을 못 채우고 위암으로 사망하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안타까운 점.
  • 간과되기 쉽지만 현역 시절에는 상당한 미남이었다. 게다가 러시아인은 무뚝뚝하다는 편견과는 달리 표정이 있는 편이라, 단체 사진을 보면 필드 플레이어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어도 쉽게 눈에 띄는 경우가 많다.
  •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 골키퍼 장갑의 사용에 있어서도 선구적이었다. 제대로 된 장갑을 착용하는 골키퍼가 드물던 그 시절에 현재의 골키퍼 장갑과 유사한 온전한 형태의 가죽제 장갑을 상시 착용하고 경기에 임했다.
  • 항상 검은 옷을 입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가 주로 입은 상의 색은 숯처럼 새까만 색이 아니라 약간 남색을 띤 검은색이었다고 한다.
  • 소련의 대표적인 선수였지만 국내에도 기사가 많았다. 반공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웠던 당시 대한민국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례적인 일.
  • 공산당원이었다. # #
  • 러시아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도 만들어졌다. 국내에서는 2020년 9월에 개봉했지만 시국이 시국이어서 그런지 인지도는 별로 없는 듯.
  • 코로나로 취소한 2020 발롱도르 대신 프랑스 풋볼에서 선정한 올타임 발롱도르 드림팀에 예상대로(?) 주전 골키퍼로 선정되었다. 선정전에 발표한 후보군의 포지션 배분을 보면 레프 야신, 프란츠 베켄바워, 펠레, 마라도나, 로타어 마테우스의 선정은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어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라는 평가.
[image]

10. 관련 문서



[1] 또한 발롱도르 유효표만 10차례(1956, 1957, 1958, 1959, 1960, 1961, 1963, 1964, 1965, 1966)나 된다.[2] 수비수에서의 베켄바워와 비슷한 포지션내 절대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각종 매체에서 올타임 베스트를 선정할 때 베켄바워가 자리하는 센터백 한자리와 함께 그의 골키퍼 포지션은 가장 논란이 없고 가장 뻔한 선발로 공인되는 수준. 거의 일렉트릭 기타에서 지미 헨드릭스가 차지하는 위치와 동급이라고 평받는다.[3] 지금이야 올림픽 축구 경기는 A대표팀이 아니라 U-23팀이 출전하며 그 위상이 월드컵에 한참 못 미치지만, 과거에는 올림픽의 위상이 월드컵 못지 않았다. 우루과이 축구대표팀의 앰블럼에 붙은 별 4개 중 2개가 올림픽 우승을 뜻하는 것일 정도.[4] 심지어 이 3골 중 1골은 '''월드컵 역사상 유일한 코너킥 골이다.'''[5] 이때의 심각한 슬럼프로 축구선수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지만 심기일전하여 다시 뛰어난 활약을 펼쳐서 1963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하고, 그 이후로 은퇴할 때까지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서 군림했다.[6] 이 때 뇌진탕으로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야 알려졌다.[7] 야신의 선수시절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오른쪽 다리에 항상 붕대를 감고 있다.[8] 다만 다리 절단의 직접적인 원인은 혈관 문제였다.[9] 이후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상의 이름이 월드컵 공식 스폰 아디다스의 명칭을 빌어 아디다스 골든 글러브로 공식 변경되었다. 예상하겠지만 이 때 되게 말이 많았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축구선수의 이름을 딴 상을 돈으로 갈아버렸다고...[10] 2위는 총 9회 유효표를 받은 잔루이지 부폰이며, 3위는 7회 유효표를 받은 소련의 리나트 다사예프다.[11] 1958, 1962, 1966, 1970(1970년 대회에서는 후보 골키퍼로 대회에 참가했다.)[12] 407 경기라고도 한다.[13] 출처 : 베스트일레븐[14]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만 적는다. 그런데 이마저도 대단한 것이다.[15]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모두 1000회가 넘는다.[16] 골키퍼로서 이 상을 수상한 선수는 지금 이 글을 읽는 이 순간까지도 오직 야신뿐이다. 그후 디노 조프잔루이지 부폰이보 빅토르, 올리버 칸, 마누엘 노이어가 각각 2위와 3위를 했을 뿐이다.[17]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19 판데믹으로 인해 발롱도르를 수여하는 대신 각 포지션의 올타임 넘버원을 선정하였고, 골키퍼 포지션에 선정되었다.[18] 북한에서 발간된 '세계 축구계의 별들'(2001)에서 발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