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처분
1. 개요
노론 송시열과 소론 윤증 간 1681년에 있었던 회니시비에 대해 1716년 병신년(숙종42) 국왕인 숙종이 판정을 내린 처분이다.
2. 회니시비
회니시비는 송시열이 살던 충청도 회덕(懷德)[1] , 그리고 윤증이 살던 이성(尼城)[2] 두 지명의 앞글자를 따서 명명된 논쟁으로, 숙종 때 사제 관계에 있었던 송시열과 윤증의 불화 때문에 그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분쟁을 말한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송시열은 김장생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는데,[3] 남인 윤휴에 대한 평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송시열은 한때 윤휴의 학문의 깊이를 높게 평가했으나, 윤휴가 주자의 책에 대해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하고 주를 달아 독서기(讀書記)를 저술하자 송시열은 그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반면 윤선거는 윤휴의 견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웠다. 또한 윤선거는 송시열이 현종 때 윤휴와 예송 문제로 불화를 빚자 그들을 화해시키려 하다가 송시열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윤선거는 송시열이 격분하자 윤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더 이상 표면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둘 사이의 갈등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1669년, 윤선거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윤증이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부탁하며 박세채가 찬한 행장과 함께 기유의서를 동봉하여 보내자, 송시열은 묘갈명을 무성의하게 짓고,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비겁하게 살아돌아왔다는 식으로 폄하했다. 이에 윤증은 여러 번 묘갈문의 내용에 대한 개정을 요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약간의 자구만을 수정할 뿐 그 내용의 개정에 끝내 응하지 않았다. 결국 윤증은 스승이었던 송시열에게 등을 돌렸다.
윤증은 1681년(숙종 7) 송시열에게 비난의 편지를 보내려다 박세채의 만류로 그만두었는데, 여기에는 송시열이 '의리와 이익을 같이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병용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를 '신유의서(辛酉擬書)'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송시열의 손자이자 박세채의 사위인 송순석이 몰래 베끼어 송시열에게 전했다.
1684년 4월 최신이 신유의서의 내용을 가지고 스승을 배반한 죄로 윤증을 고발하고 처벌할 것을 요구하자 대대적인 정치적 분쟁이 야기됐다. 윤증의 제자 나양좌와 친구 박세채 등은 그를 옹호했고, 송시열의 제자들과 조정의 대신들은 윤증을 비판했다. '''이리하여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중앙 정계에서는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정계에서 축출된 가운데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며 정국을 주도하다가, 1701년 이른바 무고의 옥으로 '''장희빈의 처벌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했는데, 숙종의 강력한 탕평 의지로 정국이 파탄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후 1710년, 소론 최석정의 예기유편(禮記類編)을 놓고 노론이 '이는 주자를 경시하고 주자의 학설에 어긋난 것'이라며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주장, 노론-소론 대립이 격화됐다. 여기서 예기유편의 판각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는 것으로 정리되면서, 노론 세력에게 점차 정국의 주도권이 넘어갔다.
3. 서인 내부의 대립 격화와 병신처분
노론과 소론은 1711년 가례원류(家禮源流)의 간행으로 다시 대립했다. 가례원류는 병자호란 직후 유계와 윤선거가 함께 가례에 관한 글들을 정리한 것인데, 유계의 손자 유상기가 간행을 주도하고, 노론의 권상하가 서문을, 정호가 발문을 쓰면서 윤증을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이에 논란이 일자, 숙종은 책을 확인한 뒤 정호가 윤증을 비난한 것은 잘못이라 판정하고 정호를 파직시킨 한편 발문을 쓰지 못하게 했다.
이 즈음하여 회니시비가 조정 내 노론-소론 대립으로 확대되자, 숙종은 처음에는 아버지가 중하고 스승은 경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윤증을 옹호하면서 윤증을 비난하는 노론을 처벌하는 등 소론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힘입어 소론의 공격이 심해졌다. 그러자 1716년 병신년, 숙종은 윤증의 신유의서와 송시열의 묘갈명 등을 검토한 후, "윤증의 말이 송시열을 억누르는 것이 너무 많으니 허물이 없다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여러 사람들이 이를 따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고 판결했다. 동시에 앞서 빼도록 지시한 정호의 발문을 다시 넣도록 했고, 윤증에 대해서는 선정(先正)의 칭호를 금하도록 했다. 이를 병신처분이라고 한다.
4. 결과와 평가
1684년 최신이 신유의서를 가지고 윤증을 처벌할 것을 간한 이래 32년 간 지속된 회니시비는 사제 간의 사사로운 분쟁이 정치적 분쟁으로 비화한 사건이었다. 이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서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고, 병신처분은 극에 달한 노론과 소론의 대립에 '''국왕이 직접 관여하여 노론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국왕의 판정으로 소론은 학문적,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정국에서 위축되었다. 한편 사문의 시비에까지 국왕이 판정했다는 점에서, 재위 초기부터 스스로 강조하기도 했던 군사(君師)로서의 숙종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1] 회덕현 외남면 소제리, 즉 현 대전광역시 중구 소제동[2] 이성현 장구동면 유봉리, 즉 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3] 논산(연산)의 광산 김씨, 논산 노성(니산)의 파평 윤씨, 회덕의 은진 송씨를 일컬어 호서 3대족 이라했는데, 연산의 광산 김씨는 김장생, 김집 부자를 배출한 서인의 유력가문이었고 (김장생, 김집의 제자가 송시열), 회덕의 은진 송씨는 노론 거두 송시열, 니산의 파평 윤씨는 송시열과 회니시비를 다툰 소론 윤증 등을 배출한 서인 명문가였다. 이 일대 호서지방은 전통적으로 서인 유력가문의 세가 강한 지역으로 김장생으로부터 이어진 학맥으로 이어진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