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
尹拯(1629년 ~ 1714년)
[image]
(윤증 초상(보물 1495호))
조선의 학자. 서인 소론의 영수다. 자(字)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윤선거의 아들이자 성혼의 외증손이 된다.
아버지 윤선거 밑에서 수학하여 성혼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그 밖에도 장인이 되는 권시를 비롯해 김집, 유계, 송준길, 송시열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 저 중 셋[1] 이나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이니 그야말로 아버지 윤선거의 위상과 평판을 알 수 있는 장면이라 볼 수 있다.
이후 학문 연구에 뜻을 품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는데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있어서 상당한 명망을 얻었다. 하지만 1669년 아버지 윤선거의 죽음이 그의 위치를 바꿔놓게 된다. 윤선거는 같은 서인인 송시열과 달리 남인에게 상당히 관대하였고, 윤증 역시 남인의 대표인 윤휴 등의 조문을 받았으며[2] 이를 송시열이 매우 불쾌해 했다. 그리고 1673년 결국 회니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회니논쟁에서 회니란 송시열이 살던 회덕[3] 과 윤증이 살던 이성[4] 을 말하는 것으로,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윤선거의 생전 친구였던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생전에 남인 영수 윤휴를 두둔했던 앙금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조문에 병자호란 때 자결한 처를 두고 도망쳐나온 일을 가지고 야유하는 뜻을 적었다. 이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시정이나 삭제를 요구했으나 송시열은 들어주지 않았고, 이 일에 감정이 상한 윤증은 결국 송시열을 비판하고 사제의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말년에는 제자인 유상기와도 불화가 있었다. 유상기의 조부 유계는 『가례』의 연원과 그 발달을 비교, 고찰하여 가례의 본질과 그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게 하기 위함으로 『가례원류』 란 책을 썼다. 문제는 이 책의 아이디어는 유계가 냈지만 자료를 찾아보는 것은 윤선거와 윤증이 한 일이었다. 따라서 『가례원류』는 유계만의 단독작품이 아니라 공동저서인 셈이었다. 문제는 유상기가 『가례원류』 의 원고를 달라 하였는데 윤증은 "그게 네 조부만의 책이더냐?" 라며 거절했지만 유상기가 노론인 이이명에게 부탁해 가례원류의 간행을 도우라는 어명에 어쩔 수 없이 주었다. 나중에 유계가 단독저자라 기록하고 부친인 윤선거와 자신이 기여한 사실을 모두 빼버린 것을 안 윤증이 분노하여 편지로 질책하자 유상기도 질세라 반격하는등 공방이 이어갔고 그러는 사이 윤증이 죽자 가례원류의 발문을 송시열의 제자 정호와 권상하에게 각각 부탁하고 응한 두사람은 윤증은 스승을 배신한 패륜아라고 비난했다. 자기 옛스승과 사소한 일로 인하여 사제간의 갈등과 분열이 말년에 재현되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 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웠으나 다행히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예송논쟁과 각종 환국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5] 특히 경신환국 이후 남인의 처리를 두고 남인을 강하게 처벌하자는 서인 강경파에 대응하여 박세채, 남구만, 박세당 등과 함께 서인 온건파를 이끌게 되어 소론의 영수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윤증은 송시열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훗날 노론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리게 된다.
1714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1716년 소론이 실각하는 병신처분이 일어날 때 관직을 모두 추탈당했으나 1722년 소론이 재집권하자 복관되었다.
[image]
(윤증 초상(보물 1495호))
1. 개요
조선의 학자. 서인 소론의 영수다. 자(字)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윤선거의 아들이자 성혼의 외증손이 된다.
2. 생애
아버지 윤선거 밑에서 수학하여 성혼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그 밖에도 장인이 되는 권시를 비롯해 김집, 유계, 송준길, 송시열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 저 중 셋[1] 이나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이니 그야말로 아버지 윤선거의 위상과 평판을 알 수 있는 장면이라 볼 수 있다.
이후 학문 연구에 뜻을 품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는데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있어서 상당한 명망을 얻었다. 하지만 1669년 아버지 윤선거의 죽음이 그의 위치를 바꿔놓게 된다. 윤선거는 같은 서인인 송시열과 달리 남인에게 상당히 관대하였고, 윤증 역시 남인의 대표인 윤휴 등의 조문을 받았으며[2] 이를 송시열이 매우 불쾌해 했다. 그리고 1673년 결국 회니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회니논쟁에서 회니란 송시열이 살던 회덕[3] 과 윤증이 살던 이성[4] 을 말하는 것으로,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윤선거의 생전 친구였던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생전에 남인 영수 윤휴를 두둔했던 앙금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조문에 병자호란 때 자결한 처를 두고 도망쳐나온 일을 가지고 야유하는 뜻을 적었다. 이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시정이나 삭제를 요구했으나 송시열은 들어주지 않았고, 이 일에 감정이 상한 윤증은 결국 송시열을 비판하고 사제의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말년에는 제자인 유상기와도 불화가 있었다. 유상기의 조부 유계는 『가례』의 연원과 그 발달을 비교, 고찰하여 가례의 본질과 그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게 하기 위함으로 『가례원류』 란 책을 썼다. 문제는 이 책의 아이디어는 유계가 냈지만 자료를 찾아보는 것은 윤선거와 윤증이 한 일이었다. 따라서 『가례원류』는 유계만의 단독작품이 아니라 공동저서인 셈이었다. 문제는 유상기가 『가례원류』 의 원고를 달라 하였는데 윤증은 "그게 네 조부만의 책이더냐?" 라며 거절했지만 유상기가 노론인 이이명에게 부탁해 가례원류의 간행을 도우라는 어명에 어쩔 수 없이 주었다. 나중에 유계가 단독저자라 기록하고 부친인 윤선거와 자신이 기여한 사실을 모두 빼버린 것을 안 윤증이 분노하여 편지로 질책하자 유상기도 질세라 반격하는등 공방이 이어갔고 그러는 사이 윤증이 죽자 가례원류의 발문을 송시열의 제자 정호와 권상하에게 각각 부탁하고 응한 두사람은 윤증은 스승을 배신한 패륜아라고 비난했다. 자기 옛스승과 사소한 일로 인하여 사제간의 갈등과 분열이 말년에 재현되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 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웠으나 다행히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예송논쟁과 각종 환국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5] 특히 경신환국 이후 남인의 처리를 두고 남인을 강하게 처벌하자는 서인 강경파에 대응하여 박세채, 남구만, 박세당 등과 함께 서인 온건파를 이끌게 되어 소론의 영수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윤증은 송시열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훗날 노론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리게 된다.
1714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1716년 소론이 실각하는 병신처분이 일어날 때 관직을 모두 추탈당했으나 1722년 소론이 재집권하자 복관되었다.
3. 여담
- 윤증의 후손인 파평 윤씨 노종파 종가에서 올리는 차례상이 상상을 초월하게 검소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윤증이 후손들에게 '제상에 손이 많이 가는 화려한 유과나 기름이 들어가는 전을 올리지 마라', '훗날 못 사는 후손이 나오면 제사도 경제적으로 부담이 될 테니 간단히 하라'는 당부를 남겨서 이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마을 사람들에게 폐가 된다고[7] 양잠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 이 분의 후손 중에 청와대 대변인까지 오른 사람이 있는데 그 작자가 하필...
- 아버지인 윤선거가 윤휴와 친하여 송시열과 중재하려 하지만 윤증은 윤휴를 매우 싫어했다. 하기사 아버지 제문을 다시 고쳐 써달라고 옛 스승인 송시열에게 몇번이나 개고생하였고 이 원인이 윤휴라서 싫어할 만도 하겠다. 윤휴도 자기 아버지를 조롱하는 제문을 보낸 것도 한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 2018년 초에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명재 윤증'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 위의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대머리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조선시대에도 당연히 대머리인 사람들이 있었는데, 상투를 틀 때는 이렇게 윤증처럼 주변 머리를 길러서 상투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