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거

 

1. 개요
2. 생애


1. 개요


尹宣擧, 1610년 ∼ 1669년
조선 시대 후기의 유학자, 시인이다.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이다. 본관은 파평이다.

2. 생애


아버지는 윤황 어머니는 서인의 거두 성혼의 딸 창녕 성씨다.
동시기에 활약한 윤선도와 이름이 비슷하여 간혹 그와 헷갈리거나 또는 친척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아니다. 애초에 본관이 다른데, 윤선도는 해남 윤씨, 윤선거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파평 윤씨다. 게다가 윤선도의 '선'은 善이고, 윤선거의 '선'은 宣이다. 윤선거는 윤휴와 송시열간의 사이는 중재하려 하였지만 친구인 송시열과 함께 윤선도를 공격하거나 탄핵했다.
본래 아버지 아래에서 학문을 배워 성혼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나,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 문하에서도 수학하였으며, 그 때 송시열을 만나게 되어 매우 가깝게 지내게 된다.
병자호란강화도에서 강화도가 함락당하면 권순장, 김익겸, 김상용 등과 함께 순절하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그들과 부인 이씨는 순절했으나 그는 남한산성에 있던 아버지와 함께 자살하고자 어머니와 함께 강화도를 빠져나왔다. 빠져나오는 방법이라는 것도 강화도가 청군에 점령된 상황에서 청군이 남한산성에 항복을 권유하러 보낸 종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1]의 종자인 선복(宣卜)이라고 신분을 속여서 강화도를 빠져나오게 되었다. 이 때 아들 윤증과 딸을 두고 나왔는데 그의 딸은 노비로 팔려나갔지만 윤증이 족보를 쓴 수첩을 주고 외우게 하여서 구제되었다고 한다. 윤선거는 강화도를 빠져나왔지만 결국 순절하지 못해서 이후 여러 차례 벼슬에 불려나왔으나 이 때의 일로 인해 나가지 않았다. 참고로 이 때의 일을 친구이자 사돈이었던 송시열이 상당히 경멸했다고 하며[2] 아들 윤증에게도 역시 이 때의 일이 상당한 멍에로 자리 잡게 된다.
남인이었으나 교류가 있었던 윤휴가 "사물의 진리를 주자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를 수 있느냐"는 발언을 하자 그는 1653년 송시열, 이유태, 권시, 유계 등과 함께 황산서원에 모여 논의를 하게 되는데 이 때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과 같다며 비난하자 그는 윤휴를 옹호하였고, 이후에도 역시 지속적으로 윤휴를 옹호하자 송시열과 급속도로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1669년 세상을 떠났는데 별세하기 몇 달 전 송시열에게 “남인 윤휴와 허적을 '참람한 무리'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며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를 버리고 폭넓게 생각하라”란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가 아들 윤증이 송시열에게 그의 묘갈명을 부탁하면서 같이 전달해 알려지게 되었고, 송시열은 편지에 대해 노여워하며 조문에 병자호란 때 자결한 처를 두고 도망쳐나온 일을 가지고 야유하는 묘갈명을 적어주었다. 이에 대해 윤증이 여러번 수정을 부탁했으나 송시열은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이는 윤증과 송시열이 척을 지고 서인이 소론노론으로 갈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 아버지는 성종의 4대손 영천군 이정(靈川君 李侹)이며, 어머니는 상주 김씨(尙州金氏)로 좌의정 김귀영(金貴榮)의 딸이다. 아내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로, 인조의 비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이복동생(孽妹)이다. 윤선거와는 한 동네에서 살았다고.[2] 송시열의 큰형 송시희는 1627년 정묘호란전사했고 형수 김씨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다 뒤따라갔다. 아버지 송갑조는 국치를 당한 슬픔에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상처가 더해져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종형 송시영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목숨을 끊었다. 호란으로 가족을 잃은 송시열 입장에선 죽자고 결의까지 해놓고 살아나온 윤선거가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강화도를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자녀들을 놔두고 나오면서 자신을 노비 신분으로 속이기까지 했으니 더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