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집
1. 개요
한양 출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시호 문경(文敬). 아버지는 예학자[2] 김장생[3] (金長生)이며,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조대건(曺大乾)의 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서 성혼, 김장생의 문인. 성혼의 문하에서 배우다가 나중에 아버지 김장생에게도 사사, 아버지 김장생, 제자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등과 함께 기호 예학[4] 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하였으며,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등에게 학문을 전하여 기호 학파와 노론, 소론 양당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광해군 때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은퇴하였으며, 인조 반정 이후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효종 때는 김상헌, 안방준과 함께 국가 원로로 활동했고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서인과 기호학파의 종통으로 노론과 소론의 마지막 공동 조상이다.[5][6]
2. 생애
김장생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대건(大乾)의 딸 창녕 조씨의 아들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학예에 뛰어나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나중에는 아버지 김장생에게 사사하였다.[7] 1591년(선조 24년)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했으나, 사림 집권 이후 묻혔던 사장학(詞章學, 시와 문장을 짓는 데 힘쓰는 학문)도 공부하였지만 사장학보다는 주로 경전 연구와 수양에 전념하였다.
1610년(광해군 2)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던 중 서숙부 2명이 칠서의 옥에 연루되어 죽자 은퇴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선대의 고향인 충청남도 연산으로 돌아갔다.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부여 현감과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냈고, 지평(持平)·집의 등을 지냈다. 그러나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고, 그 뒤 전라 도사·선공감첨정 등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사직하였다. 이후 학업에 전념하여 정홍명[8] (鄭弘溟)과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고, 윤선거(尹宣擧) 등과는 상례에 대해 논하였다. 또한 아버지 김장생이 편찬한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정하고 편집하는 일에 전심전력하였다.
인조 중기에 서인 중 공신 계열인 공서파(功西派)가 집권하자 사직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우부승지·공조 참의를 거쳐 공조 참판·예조 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그때마다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사임하였다. 이에 태학의 유생들이 벼슬에 오래 머물도록 해달라는 소를 올리는 등 사람들에게 그의 덕망은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뒤에 문인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죽지 못하고 왕족의 종자 선복(宣卜)으로 변장하고 살아나온 일[9] 로 죄책감에 휩싸여서 방황하였으나 김집이 그를 다시 거두었다.[10] 자괴감에 빠진 윤선거를 위로하고 그를 학문의 길로 인도하였다.[11]
아버지 김장생이 죽자 아버지 김장생의 제자들 중 일부인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 등이 다시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여 사사하였다.[12] 이후 아버지 김장생의 뒤를 이어 서인산림파[13] 의 영수가 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그에게 대임(大任)을 맡겨달라는 김상헌(金尙憲)의 특별 추천을 효종이 받아들여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하였으나 공서 김자점(金自點) 등의 영향력이 강하자 출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김자점이 파직되자, 김상헌(金尙憲), 안방준 등과 함께 등용되었다. 예조 참판·대사헌을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고 산당의 영수가 되어 정치적 역할과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안방준과 함께 대동법을 강하게 반대했는데, 대동법 시행을 극력 주장하는 한당의 영수 김육(金堉)과 대립하여 백성의 충의 발현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14]
이후 효종과 함께 북벌(北伐)을 계획하였다. 그때 실각한 김자점이 이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자, 청나라의 문책으로 사태가 시끄럽게 되므로 관직에서 사임하였다. 그 뒤 대사헌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중추부판사로 재임 중 사망하였다. 만년에 예학(禮學)을 대성하여 그와 접하는 자는 예에 통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아버지와 더불어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성하였다.
1653년(효종 4년) 좌참찬을 거쳐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의 각별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 경전 연구와 수양에 힘썼다. 아버지 김장생과 함께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하였으며,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학문을 전하여 기호학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율곡 이이(李珥)와 성혼의 학문과 송익필의 예학(禮學), 그리고 아버지 김장생의 이기설과 학문, 기호 학파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그 학문을 송시열과 송준길, 윤선거[15] 에게 전해주어 기호 학파와 노론, 소론계로 학문이 계승된다. 저서로는 《신독재유고》, 《의례문해속》등이 있다.
사후 1883년(고종 20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효종 묘정 등에 배향되었다. 고종 때 가서 문묘에 배향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옥천의 창주서원(滄州書院), 황해도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3. 여담
노론과 소론의 학문적 조상인 덕에 그들은 김집을 성인(聖人)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남인과 북인에서 계속 딴지를 걸고 발목을 잡는 바람에 실패했다.[16] 동방 18현[17] 중 가장 늦은 고종 때 가서야 문묘에 종사된 것 역시 남인과 북인들의 반대, 딴지 책동 때문이라는데... 사실 문묘 종사는 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몽주 같은 경우는 125년 걸렸고, 문묘 종사는 후대에 이루어진다.
대동법에 반대하고 굉장히 엄숙한 성격때문에 꼰대 중의 상꼰대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자신의 정실부인인 영의정 유홍의 딸이 적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적자를 보아서 후대를 이으라는 주변의 의견을 거부하고, 율곡 이이의 서녀였던 부실부인과 해로했다고 한다.
그렇게ㅠ해서 김집은 적자 대신 서자밖에 없었으나 송시열등이 조정에 간청하여 서자로 하여금 적자의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하게 됐다고 한다.
[1] 1636년 조선이 병자호란 패배 후 다수의 왕족과 사대부가 끌려갔다가 1642년 즈음에 다시 돌아왔는데, 이때 문신 유근과 김집이 김상헌에게 쓴 편지이다. 김집의 편지는 좌측. 출처[2] 이이, 성혼, 송익필 - 김장생 - 김집, 김상헌, 안방준 -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로 이어지는 예학 외에도 정구 - 장현광 - 허목, 윤휴 로 이어지는 또다른 예학이 영남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이 둘은 김집이 살던 시대로부터 한세대 뒤에 충돌하게 된다.[3] 이이, 성혼, 송익필의 학문을 계승하였다.[4] 영남 지방에는 정구 - 장현광 - 허목으로 이어지는 영남 예학이 따로 존재했다.[5] 그의 제자 송시열과 송준길은 노론이 되고, 윤선거는 윤선거를 거쳐 다시 그의 제자인 박세채와 윤증(김집에게는 손제자가 된다.)이 소론의 영수가 된다.[6] 안방준이 호남 학파로 갈라진 뒤, 기호 학파의 마지막 학문적 직계 조상이 된다. 사실 기호학파, 영남학파라는 개념은 20세기에 등장한 개념으로 조선시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7] 김장생은 이이, 성혼, 송익필을 모두 사사했는데 송익필의 예학에 주로 치중하였다.[8] 송강 정철의 아들이다.[9] 윤선거의 삼촌, 부인, 사촌, 김익겸(김집의 동생 김반의 아들.) 등 친구들, 원로 대신 김상용 등이 자살했다.[10] 그뒤 윤선거는 과거나 출사를 단념하고 김집의 문하에서 학문 연마를 계속하다가 김집이 죽은 뒤에는 서실을 열고 후학 교육에 전념했다.[11] 그러나 김집의 다른 수제자인 송시열은 이를 못마땅히 여긴다.[12] 이후 김장생을 노선생, 김집을 선생이라 했다.[13] 공서파가 이귀,김류 사후 원두표의 원당과 김자점의 낙당으로 갈라지자 산림파는 원당과 낙당에 대해 산당으로 분류되었다.[14] 김육이 일방적으로 당한 것처럼 그려지는 것과 달리, 김육 역시 김집과 산림의 비판에 못지 않게 김육 역시 완강하게 저항하며 김집을 노골적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서 후에 송시열은 대동법에 찬성하는쪽으로 돌아서면서 '스승님이 대동법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런것 같다'는 평을 내린다.[15] 윤선거를 통해 윤증, 박세채 등에게로도 학통이 이어진다.[16] 그런데 노론에서만 밀던 송시열은 어떻게 정조의 눈에 드는 바람에 송자(宋子)가 됐다.[17] 동국 18현이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