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채

 


'''박세채
朴世采
'''
<colbgcolor=#94153e> '''시호'''
'''문순(文純)'''
'''본관'''
반남 박씨
'''성명'''
박세채(朴世采)
''''''
화숙(和叔)
''''''
남계(南溪), 현석(玄石)
'''생몰년'''
1631년 ~ 1695년 2월 5일
1. 개요
2. 생애 초반
3. 관료 생활
4. 소론의 영수
5. 사후

[clearfix]

1. 개요


"좌의정 박세채는 일세(一世)의 중망(重望)을 짊어지고 사림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평생의 언행은 반드시 예법을 따랐고, 재상의 지위에 오르자 정색(正色)을 하고 조정에 섰다. 연석(筵席)이나 장주(章奏)에다 간절히 아뢴 것은 모두가 속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내가 의지하기를 주석(柱石)과 같이 할 뿐만이 아니었는데, 지난 겨울에 마침 사고(事故)로 인하여 처자를 남겨놓고 서울을 떠났다. 바야흐로 승지(承旨)를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타이르고, 마음을 바꾸어 조정에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한 번 걸린 병환이 더욱 위중해져 흉(凶)한 소식이 문득 들려오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슬픔을 억제하기 어렵다." [1]

朴世采 (1631년 ~ 1695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당색은 서인이었다가, 후일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될 때 소론이 되었다. 증조부 박응복은 대사헌, 조부 박동량은 형조 판서를 지냈을 정도의 명문세족이다. 박세당이 친족이고,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이 그의 사위가 된다.[2]

2. 생애 초반


1649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650년 이이, 성혼의 문묘 종사를 남인의 유생이 반대를 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효종이 남인의 유생을 옹호하는 비답을 내렸고 이에 실망하여 학문의 길을 걸었다. 1651년 김상헌과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송시열, 송준길과도 같이 교우를 갖게 되었다.

3. 관료 생활


1659년 천거로 익위사제마가 되었고, 곧바로 예송논쟁이 벌어지자 여기서 송시열 등과 함께 서인의 기년설을 찬성하는데 특히 복제사의(服制私議)를 통해 남인이었던 윤선도, 윤휴의 3년설의 부당함을 체계적으로 비판하였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자 파직당하고 유배당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곧바로 관직에 복귀하여 대사헌, 이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1684년 회니시비로 인해 노론소론으로 서인이 분당하자 황극 탕평론을 발표하여 파당을 막고자 하였으나 결국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4. 소론의 영수


1689년 기사환국 때 모든 관직에서 물려나서 야인 생활을 했는데 이 때 윤증, 정제두 등과 교우하며 학문적 성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특히 양명학에 대해 비판하고 유학의 도통연원을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 때 복귀하여 우의정, 좌의정을 거치면서 소론의 영수로 자리잡았고, 남구만 등과 함께 이이, 성혼의 문묘 종사를 확정시키고 김육의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게 큰 공헌을 하였다. 이후 탕평론을 적극 권장했는데 이후 영조 시절에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1695년에 65세를 일기로 졸하여 숙종을 슬프게 했고 숙종은 도승지를 보내 조문했다.

5. 사후


숙종 재위 후반기 송시열이 사사되고, 윤증도 출사하지 않게 되자 서인 산림을 대표하는 조정 관료로서 남아있었다. 비록 소론의 위치에 있었으나 노론의 주장에 영합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탕평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탕평론은 후에 영조, 정조가 탕평 정치를 펼치는데 이론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가 죽자 시묘살이를 한 문인이 무려 2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평소 윤증, 박세당과 달리 송시열과 척을 지지 않았기에 바로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764년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조에 의해 문묘에 종사되어 소론계 학자로는 유일하게 문묘에 종사된 인물이 되었다. 사실 노론에서도 박세채는 그다지 싫어하지 않았다. 우선 소론이긴 해도 노론 세력을 공격하지 않았으며 공동의 적인 남인에 대해서는 과감했고 송시열의 죽음을 듣자 심상하여 예우를 표해 노론의 호감을 얻었다. 그래서 노론들이 쓴 졸기에는 좋은 사람인데 시류에 휩쓸려서 소론이 된 흠이 있다라는 평이 실렸다. 이후 장희재와 남인 잔당 공격에 앞장서서 노론의 호응을 얻었고 그의 문하들은 대부분 노론으로 전향한다. 한마디로 남인으로 대입한다면 박세당과 윤휴가 그토록 싫어하던 송시열이라면 박세채는 온건하게 대한 송준길이라 할 수 있다.
...(중략)... '''자품이 명수(明粹)하고 덕성(德性)이 온순(溫醇)하여''', 약관(弱冠)에 진사 고등(進士高等)에 합격하였다. 효종조(孝宗朝)에 태학(太學)의 여러 유생을 인솔하고 상소하여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고 미안(未安)하다는 비답이 있었다. 드디어 과거 공부를 중지하고 오로지 성리서(性理書)에 뜻을 기울여 이학(理學)에 침잠(沈潛)하고, 예서(禮書)를 정밀히 연구하여 상례(常禮)·변례(變禮)의 의심나고 불분명한 것에 대해 많은 고증(考證)이 있었으므로, '''많은 학도(學徒)들이 모여들어 일세(一世)의 유종(儒宗)으로 추존하였다. 저서(著書)가 매우 많아 거의 수십 종에 달하니, 사람들이 그 엄박(淹博)한 학식에 탄복하였다.''' 일찍이 천섬(薦剡)에 올랐으나 불러도 나가지 않았고, 현종(顯宗)께서 누차 춘방(春坊)과 대헌(臺憲)으로 불렀으나, 역시 명에 응하지 않았다. 당저(當宁)에 이르러 부르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니, 결국 조정에 들어오게 되었다. 전후에 걸쳐 부름을 받고 나온 것이 세 차례인데, 계해년에는 입조(入朝)하여 요악한 무녀(巫女)에 대해 논하였고, 무진년에는 역종(逆宗)을 논하였으며, 갑술년에는 명의(名義)를 제창하고 윤기(倫紀)를 부식하였다. 또 송준길(宋浚吉) 등 여러 현인들과 뜻이 같고 도가 부합하여, 반드시 춘추(春秋)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의리를 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벼슬을 제수하는 고신(告身)에 특별히 청(淸)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음으로써 그 의지를 펴도록 하였다. 처음에 현석(玄石)에 거주하니 학자들이 현석 선생(玄石先生)이라 일컬었으며, 나중에 파주(坡州)의 남계(南溪)에 거주하니 이내 남계 선생(南溪先生)이라 일컬었다. 작년 겨울에 조정에서 물러나 시골로 돌아가자, 여러 번 소명(召命)을 내렸지만 끝내 조정으로 돌아오지 않고 졸(卒)하니, 사림(士林)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박세채는 계해년 이후로 의견이 송시열(宋時烈)과 자못 맞지 않았다. 그런데 송시열을 위해 가마(加痲)하자 윤증(尹拯)에게 큰 원한과 분노를 샀으나, '''사론(士論)은 그의 마음가짐의 공평함을 훌륭하게 여겼다.'''...(후략)...
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 매우 우호적임을 알 수 있다.

[1]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숙종의 반응.[2] 송순석은 훗날 윤증이 할아버지 송시열을 깐 편지를 발견(박세채가 먼저 보고 내용의 파문을 예상해 부치지 말라고 윤증을 말렸다.),필사해 일러바치는 바람에 노론과 소론의 분열에 방아쇠를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