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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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朴世采 (1631년 ~ 1695년)"좌의정 박세채는 일세(一世)의 중망(重望)을 짊어지고 사림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평생의 언행은 반드시 예법을 따랐고, 재상의 지위에 오르자 정색(正色)을 하고 조정에 섰다. 연석(筵席)이나 장주(章奏)에다 간절히 아뢴 것은 모두가 속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내가 의지하기를 주석(柱石)과 같이 할 뿐만이 아니었는데, 지난 겨울에 마침 사고(事故)로 인하여 처자를 남겨놓고 서울을 떠났다. 바야흐로 승지(承旨)를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타이르고, 마음을 바꾸어 조정에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한 번 걸린 병환이 더욱 위중해져 흉(凶)한 소식이 문득 들려오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슬픔을 억제하기 어렵다." [1]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당색은 서인이었다가, 후일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될 때 소론이 되었다. 증조부 박응복은 대사헌, 조부 박동량은 형조 판서를 지냈을 정도의 명문세족이다. 박세당이 친족이고,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이 그의 사위가 된다.[2]
2. 생애 초반
1649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650년 이이, 성혼의 문묘 종사를 남인의 유생이 반대를 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효종이 남인의 유생을 옹호하는 비답을 내렸고 이에 실망하여 학문의 길을 걸었다. 1651년 김상헌과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송시열, 송준길과도 같이 교우를 갖게 되었다.
3. 관료 생활
1659년 천거로 익위사제마가 되었고, 곧바로 예송논쟁이 벌어지자 여기서 송시열 등과 함께 서인의 기년설을 찬성하는데 특히 복제사의(服制私議)를 통해 남인이었던 윤선도, 윤휴의 3년설의 부당함을 체계적으로 비판하였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자 파직당하고 유배당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곧바로 관직에 복귀하여 대사헌, 이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1684년 회니시비로 인해 노론과 소론으로 서인이 분당하자 황극 탕평론을 발표하여 파당을 막고자 하였으나 결국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4. 소론의 영수
1689년 기사환국 때 모든 관직에서 물려나서 야인 생활을 했는데 이 때 윤증, 정제두 등과 교우하며 학문적 성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특히 양명학에 대해 비판하고 유학의 도통연원을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 때 복귀하여 우의정, 좌의정을 거치면서 소론의 영수로 자리잡았고, 남구만 등과 함께 이이, 성혼의 문묘 종사를 확정시키고 김육의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게 큰 공헌을 하였다. 이후 탕평론을 적극 권장했는데 이후 영조 시절에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1695년에 65세를 일기로 졸하여 숙종을 슬프게 했고 숙종은 도승지를 보내 조문했다.
5. 사후
숙종 재위 후반기 송시열이 사사되고, 윤증도 출사하지 않게 되자 서인 산림을 대표하는 조정 관료로서 남아있었다. 비록 소론의 위치에 있었으나 노론의 주장에 영합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탕평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탕평론은 후에 영조, 정조가 탕평 정치를 펼치는데 이론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가 죽자 시묘살이를 한 문인이 무려 2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평소 윤증, 박세당과 달리 송시열과 척을 지지 않았기에 바로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764년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조에 의해 문묘에 종사되어 소론계 학자로는 유일하게 문묘에 종사된 인물이 되었다. 사실 노론에서도 박세채는 그다지 싫어하지 않았다. 우선 소론이긴 해도 노론 세력을 공격하지 않았으며 공동의 적인 남인에 대해서는 과감했고 송시열의 죽음을 듣자 심상하여 예우를 표해 노론의 호감을 얻었다. 그래서 노론들이 쓴 졸기에는 좋은 사람인데 시류에 휩쓸려서 소론이 된 흠이 있다라는 평이 실렸다. 이후 장희재와 남인 잔당 공격에 앞장서서 노론의 호응을 얻었고 그의 문하들은 대부분 노론으로 전향한다. 한마디로 남인으로 대입한다면 박세당과 윤휴가 그토록 싫어하던 송시열이라면 박세채는 온건하게 대한 송준길이라 할 수 있다.
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 매우 우호적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