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토크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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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 가가린이 탔던 보스토크 1호.
'''Восток''' космическая программа('''Vostok''' space programme)
1. 개요
소련의 첫 유인우주선 계획. 보스토크란 러시아어로 "동방(東方)"을 의미한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보스토크가 이것이다.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가 된 유리 가가린 또한 이 계획의 멤버.
1961년 4월 12일의 1호를 시작으로 63년 6월 16일의 6호까지 총 6번의 발사가 이루어졌다.
보스토크 1호는 바로 유리 가가린이 탑승한 인류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이었다. 발사에서 귀환까지 108분이라는 짧은 우주 나들이였다. 비행을 마치고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 그 유명한 "지구는 푸르다". 여기에 덧붙여서 '신은 없었다'라는 말을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다른 곳에서 가가린 소령이 했던 말이 기자회견에서 말했던 것처럼 와전된 것이다.
유리 가가린. 1961년 4월 12일자 이즈베스티야와의 인터뷰 中[1] }}}Юрий Гагарин рассказывает: небо очень и очень темное, а Земля голубоватая. Все хорошо видно.
유리 가가린이 말했다. "우주는 매우 어두웠으나, 지구는 푸르렀습니다.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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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토크 2호는 게르만 티토프를 태우고 25시간 동안 머무르면서 촬영 및 무중력 상태에서의 실험 등을 실시했다. 이듬해에는 3, 4호를 동시에 발사하여 랑데뷰 테스트를 실시하였고, 5km까지 근접하는데 성공했다. 5, 6호 발사시에는 4km까지 근접하였으며, 보스토크 6호에는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탑승하고 있었다. 아직도 정정한 할머니시며,[2] 11년에는 푸짜르가 이끄는 집권여당 소속으로 러시아 하원 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계에도 진출했다.
원래 13호까지의 발사계획이 잡혀있었으나 미국이 추진중이던 2인승 제미니 계획에 대항하기 위해 취소되어 버리고, 2인승이었지만 억지로 사이즈를 키워 3인승으로 전환한 보스호드 계획으로 변경된다.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에 충격을 먹은 미국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머큐리 계획에 올인했지만, 결국 유인 우주비행 타이틀도 소련이 약 25일 앞서서 따버렸다. 그나마도 이 미국인 최초의 우주비행은 고작 16분의 비행에 그쳤을 뿐이었다.
2. 사출식 귀환
보스토크 시리즈의 대기권 재돌입체는 상당히 특이한데, 나중에는 전혀 쓰이지 않는 완전한 구형 재돌입체를 사용한다.[3] 사실 이 공 모양 재돌입체는 재진입열과 압력조건을 훌륭히 견뎠고, 내부용적도 크기에 비해 넓었지만, 그 특성상 낙하위치가 바람에 따라 제멋대로 변해버리는 위험성이 있었다. 게다가 양력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탄도 재진입을 하게 된다. 미국이 사용한 원추형 캡슐은 자세를 바꾸어 어느 정도 낙하점을 조정할수 있기 때문에 훨씬 안정성이 높았다.
귀환시 소련의 우주인들은 이 구형 캡슐을 타고 대기권에 재돌입하다가 대기권에 들어와서는 우주선 캡슐에서 '''사출좌석으로 튕겨져 나와 낙하산으로 지상에 착륙'''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당시에는 당연히 소련이 비밀로 하여 알려지지 않았고 뒤늦게 소련이 붕괴된 후 밝혀지게 되었다. 당시에도 수중도 아닌 육지에 어떻게 충격없이 착륙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알 수가 없었다. 보스토크의 사출식 귀환 방식이 외부에 알려지기 전에는 보스토크와 유리 가가린을 다룬 미디어나 책에서는 보통 보스토크가 낙하산에 매달려 그대로 육지에 착륙하는 방식으로 묘사되곤 했다.
국제 항공 연맹의 규정에 따르면 유인 우주 비행은 발사할 때와 마찬가지로 착륙시에도 사람이 우주선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상태여야 하므로, 이 규정에 따르면 가가린을 비롯한 보스토크 우주 비행사들의 비행은 유인 우주 비행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 규정은 과거 '''소련의 주장에 따라 채택'''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간에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 그것도 미국과는 달리 지구를 1바퀴나 돌았다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저 규정과 관계 없이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으로 공인되어있다.
소련은 영토 대부분이 육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미국처럼 전 세계 바다에 자국 군함을 보내 우주선을 회수할 만한 해군력도 없었다. 소련 영해가 있다고는 해도 낙하 지점을 원하는대로 조정하기 힘들었으므로 의미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지면 가까이에서 역분사는 불가능했고(애초에 구형 쇳덩어리였으므로) 따라서 우주인이 낙하산을 매고 튕겨나올 수 밖에 없었다.아래를 보면 알겠지만, 서커스에 가까운 짓이었다. 당시 소련의 기술로는 착륙 자체가 어려웠다. 나중에 나온 보스호트 우주선부터 낙하산과 더불어 역추진 로켓을 설치해서 육상 착륙이 가능하게 되었다.
3. 각 미션 내용
3.1. 보스토크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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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4월 12일에 소련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발사된, 인류역사상 최초의 유인우주선. 탑승자는 유리 가가린(Ю́рий Алексе́евич Гага́рин; Yuri Alekseyevich Gagarin, 1934~1968). 그는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미션은 1시간 46분의 비행이었으며, 단 하루도 지속되지 못했지만, 서방세계에 소련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 중요한 미션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귀환할 때 목숨을 잃을 뻔 했다. 궤도 비행을 마치고 대기권으로 재진입할 때, 하단부 설비모듈(instrument module)이 분리된 후 조종사가 탄 원형 캡슐만으로 대기권에 진입하도록 되어있었는데, 실제 재진입시 설비모듈과 원형 캡슐이 분리에 실패했던 것. 때문에 기체가 제어불능 상태에 빠져 초당 0.5바퀴의 속도로 회전하며 심하게 요동쳤다. 중력가속도가 무려 10G까지 올라갔고[4] , 선체가 균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재진입시 마찰로 생긴 뜨거운 열기가 캡슐과 설비모듈의 연결부위를 녹여 버려 마침내 설비모듈이 떨어져 나갔다. 이후 선체가 안정화되고 캡슐에서 사출되는데 성공했다.
3.2. 보스토크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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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8월 6일에 발사되었으며, 탑승자는 게르만 티토프(Герман Степанович Титов; Gherman Stepanovich Titov, 1935~2000).[5]
지구 궤도를 17회 돌면서 25시간을 비행하였으며 다양한 실험들을 했는데, 인류 최초로 우주멀미를 겪기도 하였다.
3.3. 보스토크 3호,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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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토크 3호와 4호는 1962년 8월 11일과 12일에 각각 하루차이로 발사되어, 최초로 랑데뷰 비행을 한 우주선이 되었다.
양쪽의 탑승자중 3호는 안드리얀 니콜라예프(Андриян Григорьевич Николаев; Andriyan Grigoryevich Nikolayev, 1929~2004).[6] 4호는 파벨 포포비치(Павел Романович Попович; Pavel Romanovich Popovich, 1930~2009). 두 비행사들은 서로가 보인다고 보고해왔다고 한다.
3.4. 보스토크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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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6월 14일에 발사되었으며 탑승자는 발레리 비콥스키(Валерий Фёдорович Быковский; Valery Fyodorovich Bykovsky, 1934~).[7]
이 우주선은 5일 동안 우주에 체류하여 1인용 유인 우주선 미션 최장 시간 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은 2015년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원래는 8일로 짜여진 계획이었지만 태양의 플레어가 강해지는 등의 악조건 때문에 5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비콥스키는 무려 나흘 동안이나 그 좁은 우주선 내에 있어야 했으며, 초기 우주 식량을 먹으며 견디는 게 곤욕이었다고 회고했다. 섭취 3일째 되던 날에는 그냥 우주 공간으로 다이빙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맛이 없었다고 한다.
3.5. 보스토크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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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6월 16일에 발사된 마지막 보스토크 미션. 탑승자는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시코바(Валенти́на Влади́мировна Терешко́ва; Valentina Vladimirovna Tereshkova, 1937~). 우주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신체반응의 데이터를 모으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미션의 임무는 남성 우주비행사들처럼 실험과 작업을 하면서 이틀 전에 발사된 보스토크 5호와 랑데부 비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우주로 올라오면서 콜사인으로 최초로 말했던 '''Я чайка'''(직역하면 '''나는 갈매기다'''라는 뜻이다.)는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사실 테레시코바는 제대로 훈련받은 조종사가 아니라 공장 노동자로 취미로 낙하산 타기를 하는 정도였는데, 소련의 여성 인권 보장을 서방에 알린다는[8] 명목의 선전용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사흘 간의 미션에서 그녀는 발사 후에 우주멀미로 괴로워했으며 2일에는 단순한 무선조작의 실수로 인해 교신이 끊기면서 히스테리 상태로 계속 콜사인을 외쳐댔으며, 겨우 교신이 된 지상관제부에 신경질적으로 화를 냈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미션의 일부를 제외하고 귀환했다고 한다.
4. 폭발사고
원래는 보스토크 우주선을 발사하기 위해 당시 최신형이던 R-16(서방에는 SS-7 Saddler로 알려져 있다) 로켓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무리한 계획추진에 신뢰성이 입증되지 않은 기술 도입 등 문제가 많았고 결국에는 60년 10월 24일, 발사 시험을 위해 추진체를 준비하던 중 갑자기 대폭발을 일으켜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물론이고[9] 빠른 발사를 위해 로켓 근처에 가서 닥달하고 있던 전략로켓군 사령관 미트로판 네델린 포병 상원수와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사령관까지 포함해 수백 명이 죽는 대참사를 내게 된다.[10]
당시 서기장이던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이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11] 희생자들은 전원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되었다. 이후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야 기밀 문서의 효력이 해제되면서 사실로 드러나게 된다.
결국 보스토크 로켓으로 선정된 것은 구식 R-7 로켓(SS-6 Sapwood)이었고 이는 보스토크 우주계획이 종료된 후에도 우주발사체의 발사용도로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개량되며 널리 이용되었다. 대부분은 성공적이었으나 1980년 발사대에 대기중인 상태에서 그대로 폭발, 작업원 등 58명을 죽게 만드는 참사를 일으키기도 했다.
5. 화재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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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3월 23일 우주비행사로 선발된 20명중에 가장 최연소인(당시 24세) 발렌틴 본다렌코가 훈련도중[13] 화재로 사망하고 말았다. 본다렌코는 '''전신 3도 화상'''을 입었고 사고 후에도 몇 시간 동안 고통을 호소하다가 사망했다. 원래 보스토크 1호에 탑승할 비행사는 본다렌코였지만, 이 사고로 인해 가가린이 대신 선발되었다는 설도 있다.
미국과의 우주개발 경쟁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해 소련 정부는 본다렌코의 화재 사고를 기밀에 부쳤다. 다만 본다렌코의 유족들에게는 계속 보상금과 여러 사회적 혜택이 보장되었고, 본다렌코의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소련 공군 조종사가 되었다. 소련 해체 후 우주개발 관련 비밀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본다렌코의 죽음도 공표되었고, 이후 달에서 새로 발견된 크레이터에 본다렌코의 이름이 붙었다.
그의 내용 일부가 다뤄진 다큐멘터리 영상
여기서 사고정황을 다룬 내용이 있다. 단 일어로 되어있다.
6. 관련 음모론
이하 내용은 '''어디까지나 음모론으로 어디가서 진지하게 주장하지 말자!''' 이것이 왜 거짓이냐면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소련의 모든 우주교신을 감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소련이 숨길 수가 없었다. 유리 가가린의 교신기록과 티비화면조차 미국은 감청하고 있었고, 이것의 발사 성공도 나사는 이미 소련 관제센터와 동시에 실시간으로 알고 있었을 정도. 만약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냉전시절에 미국이 당연히 소련의 "어설픈 기술력"을 알리기 위해 대대적으로 선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적국의 모든 통신을 감청하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알리는 멍청이 정부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음모론의 전형적인 한계.
하지만 1960년대 당시 대중용 과학잡지 등에는 (마치 아폴로 계획이 조작된 가짜라는 아폴로 계획 음모론과 유사하게) 소련의 초기 유인 우주비행 성공이 조작된 가짜라는 식의 기사나 아래의 예처럼 실패했는데 감추고 있다는 식의 보도들이 신문에 그럴싸하게 실리곤 했다. 하긴 아담스키의 UFO 목격 기사나 UFO에 납치된 사람들 인터뷰가 버젓이 신문에 보도되는 시대 분위기였기는 하지만...
6.1. 가가린 이전의 우주 비행사
'블라디미르 일류신(Vladimir Ilyushin)'라는 우주비행사[14] 가 가가린 이전인 1961년 4월 7일 우주로 올라갔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15] 당시 소련의 특성상 미션이 성공리에 끝나야 편집 후 방송에 알리는 구조였으므로 실패는 묻혔다는 것이다.
이때는 재진입 기술 부족으로(당시 소련에선 최초의 재진입 시도였다) 진입각이 깊었던데다 낙하산이 늦게 펴지고 역분사 자체도 늦었던 탓에 중국 서부의 이상한 곳에 떨어진 후 내장 파열까지 당한 후 중국 농부에게 발견되었으나 하필이면 당시 중국과 소련은 이념 차이 + 국경분쟁 중이라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결국 중국 병원에서 1년여간 입원해있다가 간신히 살아서 소련으로 복귀하였다고 하는게 주장의 내용이다. 일류신은 1999년에 퇴역하였고, 2010년 3월 1일에 사망하였다. 당사자는 그 사실을 부인하였다고 한다.
러시아 당국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당시 유인비행 시험을 위해 실제 사람과 같은 크기, 같은 무게의 인형(이반 이바노비치라는 이름도 붙였다고)을 탑승시켰으며 통신시험을 위해 녹음된 음성 송신을 사람의 음성으로 착각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련 붕괴 이후, 웬만한 비밀정보들이 거의 다 해제되어 실패했던 소련의 로켓 실험들이나 사망자 목록들도 열람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그 중에 어디에서도 블라디미르 일류신의 이름이나 그가 탔다는 로켓의 발사 기록은 없었다. 지금에 와선 완전히 도시전설로 치부해도 좋다.
6.2. 돌아오지 못한 우주 비행사
블라디미르 일류신은 그래도 지구에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지구 재진입 자체에 실패해서 우주 궤도를 돌다가 죽어버린 비행사도 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사라진 소련 우주비행사 문서 참고. 추가로 이 역시 소련해체후 공개된 내부문서에 없다고 한다.
[1] 우주 궤도를 돌면서 기록한 녹음기에는 지구가 무척 아름답다고 했지 푸른 베일의 신부 같은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2] 우리나라의 이소연이 우주선에 탑승할 때도 마중나와 격려를 해주셨다![3] 드래곤볼에 보면 베지터나 다른 성인들이 지구에 올때 타던 어택볼과 모양이 비슷하다. 이쪽의 원조격?[4] 원래는 8G정도의 가속도가 걸린다.[5] 20명의 우주비행사 후보중에서 가가린과 함께 최종후보였으며, 보스토크 1호의 발사전까지 유리 가가린의 백업요원이기도 하였다.[6] 1963년에 최초의 여성우주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와 함께 '우주비행사 부부'라는 별명을 받으면서 결혼했지만, 1982년에 이혼했다.[7] 1976년에 선장으로서 소유즈 22호에 탑승하여 다시 우주에 올랐으며, 1978년 다시 소유즈 31호의 선장이 되어 살류트 6호 우주정거장과의 도킹을 끝으로 1988년에 은퇴하였다.[8] 소련은 실제로 여권 신장에 앞선 나라 중 하나였고, 유럽 최초의 여성 장관과 외교관이 배출된 나라기도 하다.[9] 그러나 설계자인 미하일 얀겔은 1km 떨어진 지하 벙커에서 일정에 대해 의논 중이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10] 통칭 네델린 참사(Nedelin catastrophe)라고 한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정부에서는 기밀 해제 문서를 통해 9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실종자를 포함하면 실제 사망자는 200명에 가깝다고 한다. 관련 기사 링크[11] 당시 사고현장으로 달려온 흐루쇼프는 설계자인 얀겔에게 '''어째서 당신은 죽지 않았는가?!'''라고 소리쳤고 얀겔은 '''그저 모두 제 탓입니다...'''라고 간신히 말했다고 한다.[12] 그에 대한 사진이 이 하나 밖에 없는데, 사고에 대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는 걸 알 수 있다.[13] '고독훈련'이라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갑압실에서 장기간 탑승으로 인한 신체적 변화를 실험하는 것이라고 한다.[14] 이 사람은 사실 훈장도 여러번 받은 테스트 파일럿이며, 아버지가 유명한 항공기 제작회사인 일류신 설계국의 창시자인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일류신이다.[15] 이러한 주장은 가가린 귀환 직후 우리나라에도 언론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 네이버 신문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