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보디나 공국
1. 개요
1. 개요
19세기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보이보디나 지역의 세르비아계 주민들 사이에서도 민족주의 의식이 확산되었고, 근대 국가 성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1848년에는 반동적인 빈체제에 항거하여 빈과 부다페스트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독립하여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간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다뉴브 강 남쪽 본국에서 건너온 의용병들의 지원에 힘입어, 헝가리 왕국 내 세르비아 다수 거주 지역에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공국[1] '의 성립을 선포했다.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 황제에 협력하여 헝가리의 독립운동을 진압하는 대신, 헝가리 왕국에서 분리독립하여, 합스부르크가의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의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공국을 공인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오늘날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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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보이보디나 공국의 영역[2]
헝가리 독립 전쟁은 이듬해인 1849년,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내 소수민족들의 저항과 결정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헝가리 지역을 회복하게 되었다. 한편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전쟁의 공로를 인정받았고, 보이보디나에 이웃한 루마니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바나트 지역과 함께 헝가리 왕국으로부터 독립된 자치지역인 세르비아 보이보디나-바나트[3] 가 성립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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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보디나-바나트 및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들[4]
보이보디나-바나트의 성립은 당연히 트란실바니아 대공국과 함께 헝가리 왕국을 견제하기 위한 오스트리아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보이보디나-바나트는 이후 헝가리 왕국 내 소수민족의 이용가치가 없어지면서 소멸할 운명이었다.
자치지역이 성립된 지 20년이 채 되지 않아, 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통일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패배하였다. 독일과 이탈리아 지역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오스트리아는 제국 내 경영에 중점을 두기로 결정하였다.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헝가리 왕국과 대타협을 맺음으로써 이중 제국이 성립되었다. 이는 헝가리 왕국내 소수민족들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 없었다. 이중제국의 성립으로 보이보디나-바나트와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은 헝가리 왕국에 합병되었다. 이에 따라,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헝가리 당국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종교와 문화, 정치참여에서 탄압받았다.
이후 반세기 가까이 세월이 지난 1914년,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에게는 다시 한번 헝가리로부터 독립의 기회가 찾아왔다. 전쟁 말, 종전을 1달여 앞둔 1918년 10월 경에 이미 전쟁 수행에 한계에 이른 이중 제국은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슬로베니아는 이중제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세르비아로의 합류를 선언했고, 협상국의 도움을 받아 재건된 세르비아군은 헝가리 남부로 진격하여 보이보디나를 점령했다. 이후 트리아농 조약(1920년)을 통해 최종적으로 보이보디나 일대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