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타협
'''Ausgleich''' (독일어)
'''Kiegyezés''' (헝가리어)
'''대타협''' 또는 '''아우스글라이히/키에제제시'''는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분리주의자 사이에 맺어진 협상이다. 이 협상의 결과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에서 사실상 독립해 자치를 하게 되며 이중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하게 된다.
보통 독일어권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k.u.k라는 약칭으로 부른다. 이는 (오스트리아의)황제이자 (헝가리의)왕이라는 뜻의 kaiserlich und königlich을 줄인 표현이다.
하지만 동시기에 발생한 독일, 이탈리아의 통일운동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다루지 않을 정도니, 말 다한 셈.
16세기까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분리된 독자적인 국가였다. 엄밀히 말하면 오스트리아라기보다는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만 사실상 오스트리아라 불러도 할 말 없는 상황.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나왔다.
하지만 헝가리는 1526년에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하며 나라가 둘로 갈라져 하나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 다른 하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는 신성 로마 제국과 동군연합이 되었고, 이후 두 나라는 헝가리의 영유권을 두고 수십년간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 와중에 오스만의 세력권 아래에 들었던 헝가리 중부와 동부 가운데 중부가 오스만의 직접 지배를 받는 지방행정구역이 되었고,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이름이 바뀐 동부 헝가리의 공작 자포여 지그몬드 야노시는 1570년에 헝가리 왕위를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넘겼다. 이후 1683년부터 1699년까지 계속된 대(大)튀르크 전쟁(Great Turkish War)에서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에게 승리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전체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니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헝가리 국왕을 겸하여 합스부르크 황가의 영지에 헝가리가 추가된 것으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가 일단은 다른 나라에 가깝지만 둘 다 합스부르크 황가의 지배를 받는 영토가 된 것이다.
19세기가 되면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한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오스트리아 제국 재형성과 같은 역사적으로 큰 격변의 시기가 닥쳤지만 여전히 헝가리의 지위는 큰 변함이 없었다. 1867년의 대타협 이전에도 헝가리는 근대적 의미로서 오스트리아의 식민지 따위가 '''아니라''', 엄연히 동군연합으로 '''합스부르크 군주를 헝가리 국왕으로 모실 뿐''' 헝가리 자체의 법률과 독립된 귀족 의회 등을 모두 유지하고 있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주들은 새로 즉위할 때마다 신성 로마 황제로서 뿐만 아니라 헝가리 왕으로서의 즉위식 또한 따로 치러야 비로소 그 권위가 인정되었다.
근대 이전에는 이렇게 애매모호한 중세의 정치적 봉건주의에 기반한 타협적 형태의 군주정도 그럭저럭 먹혀 들어갔는데, 프랑스 혁명과 근대적 민족주의의 발흥이라는 세계사를 뒤집은 폭풍이 중부 유럽에 다가오면서 이러한 전통적 통치 체계가 뿌리부터 뒤흔들렸다.
나폴레옹에게 오스트리아가 고전하는 모습과 프랑스 혁명이 남기고 간 씨앗인 자유, 독립, 민족주의는 헝가리인들의 독립의지를 한껏 부풀게 만들었고 19세기 전반기 내내 헝가리인들은 격렬하게 독립운동을 시도한다. 특히나 1848년 유럽 곳곳에서 일어난 봉기에 맞추어 발발한 헝가리 독립운동은 성공할 뻔했으나.... 헝가리 독립이 성공할 경우 자국 내의 소수민족이 들고 일어날 것을 우려한 러시아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면서 끝끝내 실패로 끝나고 만다. 헝가리의 독립운동에 크게 데인 오스트리아 당국은 강경책으로 선회, 가혹하게 헝가리를 탄압하게 된다. 형식적으로 헌법 등 자치권을 가지고 있던 헝가리를 아예 오스트리아의 영토로 편입했으며, 헝가리 전역에 군사독재가 행해지면서 헝가리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독일어를 공용어로 선포하며 헝가리어를 탄압했다. 1848년의 봉기에 자극받은 빈의 합스부르크 중앙 정부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동군연합에 기반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러 개 타이틀 중 동등한 하나의 국체가 아니라, 근대적 의미의 속국처럼 대접하기 시작한 것이다.[1]
이러한 강경책을 뒤엎은 것은 바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다. 프로이센 왕국에 참패하고 독일 연방과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린 오스트리아 제국은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이 파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합스부르크는 제국을 전면 재편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합스부르크가 헝가리인들에게 공동의 제국을 제안한다.'''
헝가리 자유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 제안의 찬성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다. 헝가리 자유주의자의 대표격이며, 후일 자유당을 창당하게 되는 데악 페렌츠(Deák Ferenc)는 이런 논란의 와중에, 내부적으로는 완전한 자치를 누리되 외교 및 재정/군사 분야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공동으로 처리하자는 입장을 지지한다. 이러한 입장에는 오스트리아 지역이 더 산업화되고 부유했던지라 오스트리아와 동행하는 게 여전히 헝가리에게 이득이라는 경제적 계산과, 피지배자에서 지배자로 헝가리인들의 정치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헝가리 영역에 거주하는 기타 슬라브 계열 민족들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동시에 있었다. 이렇게 양 민족의 입장이 잘 맞아떨어졌던지라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1867년 5월 29일 독자적인 헝가리 의회가 황제에게 인준을 받고, 정식으로 헝가리 왕령 내의 입법, 사법권을 넘겨 받으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하게 된다.
따라서 1867년의 대타협은 근대적 의미로서의 합병도 아니고, 독립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근대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동군연합이라는 유럽의 정치적 봉건제의 유산을 성문화된 헌법에 따라 근대적 방향으로 부활시킨 것에 가깝다.
대타협의 결과로 헝가리의 주도 세력이었던 귀족층과 헝가리계 주민들은 실질적인 주권 국가로서의 권리를 누리면서도 기존의 합스부르크 왕가라는 보다 큰 정치적 연합체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 상당히 만족해했으며, 이후 안정적인 번영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현대 헝가리인들 스스로가 이 시기를 '평화로운 황금의 시대'라고 회상하고 있을 정도[출처] 이다.
그러나 이 시절 헝가리 왕국은 오늘날의 헝가리가 아니라 다른 여러 슬라브계 소수민족들의 영토까지 차지하며 이루어졌던 만큼[2] , 헝가리 내부의 슬로바키아, 트란실바니아,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소수민족들의 불만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헝가리는 이러한 소수민족들의 불만에 단호한 강경책으로 대응한다. [3]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실질적인 외교권이 없었던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를 따라 참전하게 되고 1918년 10월 31일 제국의 항복과 더불어 이 대타협도 무효가 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도, 헝가리 왕국도 산산조각났다.
'''Kiegyezés''' (헝가리어)
1. 개요
'''대타협''' 또는 '''아우스글라이히/키에제제시'''는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분리주의자 사이에 맺어진 협상이다. 이 협상의 결과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에서 사실상 독립해 자치를 하게 되며 이중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하게 된다.
보통 독일어권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k.u.k라는 약칭으로 부른다. 이는 (오스트리아의)황제이자 (헝가리의)왕이라는 뜻의 kaiserlich und königlich을 줄인 표현이다.
하지만 동시기에 발생한 독일, 이탈리아의 통일운동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다루지 않을 정도니, 말 다한 셈.
2. 역사
2.1. 배경
16세기까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분리된 독자적인 국가였다. 엄밀히 말하면 오스트리아라기보다는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만 사실상 오스트리아라 불러도 할 말 없는 상황.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나왔다.
하지만 헝가리는 1526년에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하며 나라가 둘로 갈라져 하나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 다른 하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는 신성 로마 제국과 동군연합이 되었고, 이후 두 나라는 헝가리의 영유권을 두고 수십년간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 와중에 오스만의 세력권 아래에 들었던 헝가리 중부와 동부 가운데 중부가 오스만의 직접 지배를 받는 지방행정구역이 되었고,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이름이 바뀐 동부 헝가리의 공작 자포여 지그몬드 야노시는 1570년에 헝가리 왕위를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넘겼다. 이후 1683년부터 1699년까지 계속된 대(大)튀르크 전쟁(Great Turkish War)에서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에게 승리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전체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니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헝가리 국왕을 겸하여 합스부르크 황가의 영지에 헝가리가 추가된 것으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가 일단은 다른 나라에 가깝지만 둘 다 합스부르크 황가의 지배를 받는 영토가 된 것이다.
19세기가 되면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한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오스트리아 제국 재형성과 같은 역사적으로 큰 격변의 시기가 닥쳤지만 여전히 헝가리의 지위는 큰 변함이 없었다. 1867년의 대타협 이전에도 헝가리는 근대적 의미로서 오스트리아의 식민지 따위가 '''아니라''', 엄연히 동군연합으로 '''합스부르크 군주를 헝가리 국왕으로 모실 뿐''' 헝가리 자체의 법률과 독립된 귀족 의회 등을 모두 유지하고 있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주들은 새로 즉위할 때마다 신성 로마 황제로서 뿐만 아니라 헝가리 왕으로서의 즉위식 또한 따로 치러야 비로소 그 권위가 인정되었다.
근대 이전에는 이렇게 애매모호한 중세의 정치적 봉건주의에 기반한 타협적 형태의 군주정도 그럭저럭 먹혀 들어갔는데, 프랑스 혁명과 근대적 민족주의의 발흥이라는 세계사를 뒤집은 폭풍이 중부 유럽에 다가오면서 이러한 전통적 통치 체계가 뿌리부터 뒤흔들렸다.
2.2. 탄생
나폴레옹에게 오스트리아가 고전하는 모습과 프랑스 혁명이 남기고 간 씨앗인 자유, 독립, 민족주의는 헝가리인들의 독립의지를 한껏 부풀게 만들었고 19세기 전반기 내내 헝가리인들은 격렬하게 독립운동을 시도한다. 특히나 1848년 유럽 곳곳에서 일어난 봉기에 맞추어 발발한 헝가리 독립운동은 성공할 뻔했으나.... 헝가리 독립이 성공할 경우 자국 내의 소수민족이 들고 일어날 것을 우려한 러시아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면서 끝끝내 실패로 끝나고 만다. 헝가리의 독립운동에 크게 데인 오스트리아 당국은 강경책으로 선회, 가혹하게 헝가리를 탄압하게 된다. 형식적으로 헌법 등 자치권을 가지고 있던 헝가리를 아예 오스트리아의 영토로 편입했으며, 헝가리 전역에 군사독재가 행해지면서 헝가리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독일어를 공용어로 선포하며 헝가리어를 탄압했다. 1848년의 봉기에 자극받은 빈의 합스부르크 중앙 정부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동군연합에 기반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러 개 타이틀 중 동등한 하나의 국체가 아니라, 근대적 의미의 속국처럼 대접하기 시작한 것이다.[1]
이러한 강경책을 뒤엎은 것은 바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다. 프로이센 왕국에 참패하고 독일 연방과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린 오스트리아 제국은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이 파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합스부르크는 제국을 전면 재편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합스부르크가 헝가리인들에게 공동의 제국을 제안한다.'''
2.3. 채택
헝가리 자유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 제안의 찬성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다. 헝가리 자유주의자의 대표격이며, 후일 자유당을 창당하게 되는 데악 페렌츠(Deák Ferenc)는 이런 논란의 와중에, 내부적으로는 완전한 자치를 누리되 외교 및 재정/군사 분야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공동으로 처리하자는 입장을 지지한다. 이러한 입장에는 오스트리아 지역이 더 산업화되고 부유했던지라 오스트리아와 동행하는 게 여전히 헝가리에게 이득이라는 경제적 계산과, 피지배자에서 지배자로 헝가리인들의 정치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헝가리 영역에 거주하는 기타 슬라브 계열 민족들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동시에 있었다. 이렇게 양 민족의 입장이 잘 맞아떨어졌던지라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1867년 5월 29일 독자적인 헝가리 의회가 황제에게 인준을 받고, 정식으로 헝가리 왕령 내의 입법, 사법권을 넘겨 받으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하게 된다.
따라서 1867년의 대타협은 근대적 의미로서의 합병도 아니고, 독립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근대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동군연합이라는 유럽의 정치적 봉건제의 유산을 성문화된 헌법에 따라 근대적 방향으로 부활시킨 것에 가깝다.
3. 이후
대타협의 결과로 헝가리의 주도 세력이었던 귀족층과 헝가리계 주민들은 실질적인 주권 국가로서의 권리를 누리면서도 기존의 합스부르크 왕가라는 보다 큰 정치적 연합체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 상당히 만족해했으며, 이후 안정적인 번영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현대 헝가리인들 스스로가 이 시기를 '평화로운 황금의 시대'라고 회상하고 있을 정도[출처] 이다.
그러나 이 시절 헝가리 왕국은 오늘날의 헝가리가 아니라 다른 여러 슬라브계 소수민족들의 영토까지 차지하며 이루어졌던 만큼[2] , 헝가리 내부의 슬로바키아, 트란실바니아,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소수민족들의 불만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헝가리는 이러한 소수민족들의 불만에 단호한 강경책으로 대응한다. [3]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실질적인 외교권이 없었던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를 따라 참전하게 되고 1918년 10월 31일 제국의 항복과 더불어 이 대타협도 무효가 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도, 헝가리 왕국도 산산조각났다.
[1] 헝가리에서는 예로부터 주(megye)별로 각각의 지방 의회를 통하여 자치권을 행사해 왔는데, 이러한 주 제도가 전면 폐지된 대신에 국토가 5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저마다 오스트리아 내무성에서 파견된 지사의 통치 하에 놓이게끔 된 것이다(박재영 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연합 체제 연구」 P20).[출처] 「두 가지 정체성의 공존: 헝가리인의 비유럽적 기원과 유럽적 ‘자기인식’」(김지영, 2013) P15[2] 시스라타니아와 갈라치아-로도메리아, 뵈멘-메렌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3] 정작 오스트리아 제국 쪽은 은근히 자유주의적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