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양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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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洋艦隊. 청나라 왕조의 말기, 서구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창설되었던 4대 서양식 함대인 북양, 남양, 복건, 광동 함대 중 최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던 함대로, 정식 명칭은 북양수사(北洋水師)이다. 한때 동양 최강의 함대로도 불리며 기울어가던 청 왕조의 마지막 자랑거리로 위세를 떨쳤지만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사실상 첫 실전이었던 황해 해전에서 일본의 연합함대에 패하면서 허무하게 궤멸당하고 만다.
1871년부터 청조는 연안 방위를 위해 새로 편성된 4개 함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이들 이른바 4대 수사(함대) 중 가장 강력한 함대는 상하이에 본진을 두고 있던 남양수사(남양함대)였고, 북양수사는 4개 함대 중 최약체로 분류되었지만, 당대 청조의 실력자였던 이홍장은 북양대신의 직위에 취임하면서 자신의 세력권에 해당되는 북양수사를 전략적으로 육성하고자 막대한 예산을 북양 수사에 집중시켰다. 이 결과, 1884년 청불전쟁 발발 즈음, 북양수사는 남양수사에 버금가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청불 전쟁으로 남양수사가 궤멸당하면서 북양수사가 급부상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래서 1890년 즈음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북양수사가 사실상 청조 해군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위용을 자랑하게 된다.
북양함대가 다른 3개 함대를 능가하는 최강의 함대로 불렸던 이유는, 다른 3개 함대와는 달리 군함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비를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업국이자 해군국이었던 영국과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던 독일로부터 직도입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1885년 11월 북양함대가 연이어 직도입한 독일제 전(前)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은 7천톤급의 배수량과 30센티미터가 넘는 두께의 측면 장갑, 그리고 무장으로 12인치 구경 2연장 포탑 2기, 6인치 구경 포탑 2기를 장비한 거함으로, 영국 다음가는 대해군을 건설하고 있던 기술 선진국 독일에서 건조된 전함답게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사실상 이 배들에 맞설 전함이 존재하지 않았고 1891년 일본에의 친선 방문 당시에는 일본 해군 관계자들을 패닉에 빠뜨렸다는 일화가 있을만큼 당대의 불침함으로 여겨졌을 정도였고 1894년 황해 해전에서도 정원과 진원은 일본 함대의 포격에 난타당했음에도 그리 큰 손상을 입지는 않았다.[1]
비록 1888년에 이르러 청조의 실권자 서태후가 해군 건설에 추가 투자를 중단하면서[2] 북양 함대의 증강은 중단되기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점에서 청조의 해군력은 총 척수 78척, 총 톤수 83,900톤에 이르러 최소한 동양에서는 근대적 군비를 갖추고 있던 일본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특히 정원과 진원의 존재감은 대단해서, 일본은 심지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황해에서 북양함대와 맞붙을 때까지도 동급의 전함이 없었다. 황해 해전 당시 일본 연합함대의 기함이었던 마츠시마는 배수량 4,277t밖에 안되는 순양함이었다. 카탈로그 상의 스펙으로는 청일전쟁 시점에서 북양함대가 일본해군보다 월등한 우위였던 것이다. 총 배수량으로도 우위였고 개별함선 배수량으로도 북양함대가 일본해군보다 우위였다. 때문에 청일전쟁 발발시 청나라의 패배를 예상한 국제여론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은 당시 보유한 함포들로는 정원과 진원에게 이빨도 안 들어간다는 것을 깨닫고 구경 32cm의 대형 함포를 4천톤급 순양함에 달아버리는 미친 짓을 했는데 이들이 마츠시마를 비롯한 3척의 삼경함 시리즈였다. 게다가 달아놓은 방식도 순양함의 선두나 선미에 32cm 구경의 함포를 아무런 방어 장갑 없이 딱 1문만 달았는데 당연히 밸런스가 개판이었으며 장전 속도나 선회 속도가 바닥을 기었다. 여기에 더해서 위력도 신통치 않았는지 32cm 포탄이 정원에 단 한발 명중하긴 했는데 큰 대미지를 주지 못한 걸로 판명됐다. 즉 완벽한 뻘짓. 그나마 3경함은 일본의 독자 아이디어가 아니라 북양함대의 거함에 대응하려는 일본의 오더를 받은 프랑스가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넣어서 만든 함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세트 플레이를 노렸다고도 할 수 있는데, 당대 일본 해군도 이런 컨셉에 불안을 느껴 4번함은 취소해버리고, 이후 프랑스가 아닌 영국이나 미국에 신형함을 주문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위세 이면에는 여러 문제점이 숨어 있었고, 그 문제점이 끝내 북양 함대의 파멸을 이끌어내고 만다.
황해 해전[4] 에서 패배한 후 일본군에게 나포되거나 격침된 함을 제외한 나머지는 위해위에 있는 본거지인 유공도로 피신하였으며, 곧 일본군이 산동 반도에 상륙해서 위해위 주변을 몽땅 장악한 후 포위전을 벌였다. 결국 이 과정에서 대다수의 함선이 탈출도 못해보고 교전 중에 좌초나 침몰하거나 항구에 정박한 채 나포당해서 북양함대는 사실상 소멸한다.
정원과 진원도 유공도까지 피신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정원은 유공도 주변에서 섬을 포위하려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일본 어뢰정의 야습으로 대미지를 입고 좌초되어 노획을 피하기 위해 자침해버렸고 진원은 노획당하고 마는 최후를 맞이한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간 후, 북양함대에서 아직 쓸만한 함선은 모조리 일본이 압수해서 배상함이라는 명목으로 일본 연합함대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다른 함대가 명목상 지원해 준 몇 척의 함선도 북양함대 소속에서 싸우다가 역시 나포되었는데, 이 함선을 돌려달라고 해당 함대의 제독들이 일본군에게 탄원... 한 사실이 있어서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그리고 북양함대에서 빼앗은 함선은 일본군이 오랫동안 써먹지는 못했다. 불과 10여년 후인 러일전쟁무렵에는 무적 전함이라던 진원은 이미 2등 전함으로 분류되어 2선급 전력이 되어있었는데 불과 10년 사이에 일본은 일등 전함으로 배수량이 두배인 15,000톤급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칠듯한 속도로 발전하던 당시의 군사 기술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일화다. 이것도 모자라서 진원은 1908년에는 훈련용 함선이 되고 1911년에는 아예 제적 당한 후 연습용 표적으로 전용되어 파괴당했다. 1912년에는 매각되어 고철로 스크랩처리됐다. 무적의 전함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던 함선이 준공 후 불과 13년만이자 노획 후로는 불과 3년만인 1898년에 2선급이 되고 진수 30년째에는 아예 고철로 분해되는 기막힌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1. 개요
北洋艦隊. 청나라 왕조의 말기, 서구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창설되었던 4대 서양식 함대인 북양, 남양, 복건, 광동 함대 중 최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던 함대로, 정식 명칭은 북양수사(北洋水師)이다. 한때 동양 최강의 함대로도 불리며 기울어가던 청 왕조의 마지막 자랑거리로 위세를 떨쳤지만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사실상 첫 실전이었던 황해 해전에서 일본의 연합함대에 패하면서 허무하게 궤멸당하고 만다.
2. 창설
1871년부터 청조는 연안 방위를 위해 새로 편성된 4개 함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이들 이른바 4대 수사(함대) 중 가장 강력한 함대는 상하이에 본진을 두고 있던 남양수사(남양함대)였고, 북양수사는 4개 함대 중 최약체로 분류되었지만, 당대 청조의 실력자였던 이홍장은 북양대신의 직위에 취임하면서 자신의 세력권에 해당되는 북양수사를 전략적으로 육성하고자 막대한 예산을 북양 수사에 집중시켰다. 이 결과, 1884년 청불전쟁 발발 즈음, 북양수사는 남양수사에 버금가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청불 전쟁으로 남양수사가 궤멸당하면서 북양수사가 급부상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래서 1890년 즈음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북양수사가 사실상 청조 해군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위용을 자랑하게 된다.
3. 극동의 무적함대
북양함대가 다른 3개 함대를 능가하는 최강의 함대로 불렸던 이유는, 다른 3개 함대와는 달리 군함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비를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업국이자 해군국이었던 영국과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던 독일로부터 직도입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1885년 11월 북양함대가 연이어 직도입한 독일제 전(前)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은 7천톤급의 배수량과 30센티미터가 넘는 두께의 측면 장갑, 그리고 무장으로 12인치 구경 2연장 포탑 2기, 6인치 구경 포탑 2기를 장비한 거함으로, 영국 다음가는 대해군을 건설하고 있던 기술 선진국 독일에서 건조된 전함답게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사실상 이 배들에 맞설 전함이 존재하지 않았고 1891년 일본에의 친선 방문 당시에는 일본 해군 관계자들을 패닉에 빠뜨렸다는 일화가 있을만큼 당대의 불침함으로 여겨졌을 정도였고 1894년 황해 해전에서도 정원과 진원은 일본 함대의 포격에 난타당했음에도 그리 큰 손상을 입지는 않았다.[1]
비록 1888년에 이르러 청조의 실권자 서태후가 해군 건설에 추가 투자를 중단하면서[2] 북양 함대의 증강은 중단되기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점에서 청조의 해군력은 총 척수 78척, 총 톤수 83,900톤에 이르러 최소한 동양에서는 근대적 군비를 갖추고 있던 일본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특히 정원과 진원의 존재감은 대단해서, 일본은 심지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황해에서 북양함대와 맞붙을 때까지도 동급의 전함이 없었다. 황해 해전 당시 일본 연합함대의 기함이었던 마츠시마는 배수량 4,277t밖에 안되는 순양함이었다. 카탈로그 상의 스펙으로는 청일전쟁 시점에서 북양함대가 일본해군보다 월등한 우위였던 것이다. 총 배수량으로도 우위였고 개별함선 배수량으로도 북양함대가 일본해군보다 우위였다. 때문에 청일전쟁 발발시 청나라의 패배를 예상한 국제여론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은 당시 보유한 함포들로는 정원과 진원에게 이빨도 안 들어간다는 것을 깨닫고 구경 32cm의 대형 함포를 4천톤급 순양함에 달아버리는 미친 짓을 했는데 이들이 마츠시마를 비롯한 3척의 삼경함 시리즈였다. 게다가 달아놓은 방식도 순양함의 선두나 선미에 32cm 구경의 함포를 아무런 방어 장갑 없이 딱 1문만 달았는데 당연히 밸런스가 개판이었으며 장전 속도나 선회 속도가 바닥을 기었다. 여기에 더해서 위력도 신통치 않았는지 32cm 포탄이 정원에 단 한발 명중하긴 했는데 큰 대미지를 주지 못한 걸로 판명됐다. 즉 완벽한 뻘짓. 그나마 3경함은 일본의 독자 아이디어가 아니라 북양함대의 거함에 대응하려는 일본의 오더를 받은 프랑스가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넣어서 만든 함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세트 플레이를 노렸다고도 할 수 있는데, 당대 일본 해군도 이런 컨셉에 불안을 느껴 4번함은 취소해버리고, 이후 프랑스가 아닌 영국이나 미국에 신형함을 주문하게 된다.
4. 현실
하지만 이러한 위세 이면에는 여러 문제점이 숨어 있었고, 그 문제점이 끝내 북양 함대의 파멸을 이끌어내고 만다.
- 서양식 군비를 갖추기 위해 서양에서 최신 군함과 장비를 사들이고 교관을 불러들인 것은 좋았지만, 문제는 이걸 쓸 청나라군의 상태가 형편없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훈련을 시킬 외국인 교관을 초빙했지만 당장 의사 소통부터 어려움을 겪는 형편이었다. 훈련소에서 교관이 외국어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여기에 내부 비리도 심해서 수병들에게 제식훈련만 시킬 것도 아니고 포도 쏘고 항해도 나가봐야 할 터에 예산이 줄줄 새고 있으니 훈련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 함대는 근대식이지만 청나라는 아직 근대화되지 못해서 옛날 방식, 즉 전근대식으로 함대를 운영했다. 인적 자원의 질만 따지자면 당시 북양함대의 지휘관들은 영국 등 해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이 상당수 있었으며 마미 선정 학당 같은 교육 기관에서 제대로 배운 장교들도 여럿 있긴 했다. 그러나 청군의 체계는 여전히 명나라를 무너뜨리던 그 방식대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좋은 함대를 옛날 방식으로 굴렸으니 이 부문에서도 효율이 팍팍 떨어졌다. 북양대신 이홍장은 원래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뜬 사람이라서 육전에 대한 이해도는 좋을 지 몰라도 함대 운용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었고, 이홍장이 북양수사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한 정여창 역시 육전 능력은 있었지만 해군에 대해서는 근대적인 교육을 받지못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청나라 말기의 부패 현상이 너무 심해서 함대 유지 및 보수에 대한 예산이 크게 부족했다. 이건 국방비를 삥땅쳐 놀고먹는데 쓴 서태후의 탓이 가장 크지만, 이를 제외하고 봐도 전체적으로 당시의 부패상이 너무 심각해 함대의 설립자인 이홍장도 이를 어찌하지 못했다. 전투 시 함대 운용 전술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당장 탄약이 없어서 개전 직전에 소량이나마 탄약을 채워넣을 지경이었고 이를 해전 한번에 전부 사용할 수는 없었기에 정여창은 출격하면서도 상당수의 탄약을 보급창에 남겨둔 채로 원래 보유할 수 있는 탄약량보다 적은 양만 가지고 해전에 임했다. 북양함대의 자랑거리이자 주력인 정원/진원의 12인치(305mm)함포 포탄마저 양이 부족해서 화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으니 말 다했다.
- 최신식 전함을 유지 및 관리할 역량이 청조에 있었는지의 여부도 의심스럽다. 독일은 중국애들이 이 전함들을 제대로 다룰지의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여기에 전술했듯 주포는 탄약마저 부족해서 도입 초기부터 탄약이 부족한 상태로 오랫동안 예산 부족에 시달리다가 청일전쟁 발발 전에야 겨우 어느 정도 탄약을 추가 구입한 실정이었다. 이 탓에 교전 시에 제대로 된 포탄조차 갖추지 못했는데, 어느정도냐면 함대는 물론이고 해안포에서 쏘는 포탄도 제대로 된 철갑유탄이 아니라 터지지 않는 불발탄이었다. 포탄 안에는 석탄 가루/진흙/모래/콩이 화약 대신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 여기에 수뇌부의 소극적인 지휘까지 합쳐지는 바람에 기존에 확보해놨던 철갑유탄이나 어뢰도 짱박아두고 되도않은 불량 포탄이나 쏴댔으니 명중시켜봤자 타격을 입힐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구조적인 문제도 있어서, 그 엄청나다던 12인치 포탑도 말이 포탑이지 사실은 상부가 훤하게 노출된 노출형 포대였기 때문에 덕분에 속사포를 가진 소형함에도 쉽게 제압당할 수 있었다. 물론 해당 군함을 인도할 시점에서는 영국 해군의 신형 전함들 중에서도 주포가 노출형 포대에 탑재된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하지만, 당시의 해군 군함의 발전 속도가 매우 빨라서 이미 몇 년 지나지도 않아서 이는 완전한 구식으로 전락한 주포 탑재 방식이었다. 그래서 훗날 뚜껑을 덮는 방식으로 간신히 문제점을 해결해 1894년 황해 해전 당시에는 장갑화된 유개 포탑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그 부작용으로 안그래도 느린 포탑 선회 속도가 더 느려졌다.
- 북양함대가 소유하던 대구경 주포의 숫자는 일본 함대를 압도하였으나, 소구경이나 중구경 속사포의 숫자에서는 매우 열등하였고 함선의 경우도 정원과 진원을 제외하면 일본 함대가 약간 우월했다. 이 시기에는 아직 협차나 일제사격같이 대구경 주포의 명중률을 높이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구경 주포는 원거리에서는 느린 발사 속도와 조준 속도로 인해 명중이 불가능에 가까워서 근거리에서 치명타를 먹이는 용도로 사용되던 상황이라는 점이다.
청나라 측에서도 이를 모르지는 않아서 정여창 등이 계속 소, 중구경 속사포의 구입 및 배치를 요구했으나 무시당했다. 결국 전투에서 정원과 진원은 당시의 느린 대구경 주포 발사 속도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최대의 발사 속도를 보여줬으나 대부분 빗나갔고, 반대로 일본군은 속사포를 마구 쏴대서 대부분의 함선들이 포에 얻어맞고 전투력을 상실했다. 이미 이 시점에서 해전은 참패한 것이다. 정원과 진원 역시 예외는 아니라 정원이 159발의 명중탄을 맞을 만큼 속사포에 마구 얻어터졌지만 원체 튼튼한 최신함이라 멀쩡했다. 전사자가 17명밖에 안 나왔을 정도로 건재했기에 사방이 포위당한 상황에서도 정원과 진원의 저항은 계속되었지만 사령관이 포의 반동으로 부상을 입는 희대의 개그장면이 나오는 바람에(...) 전투지속은 불가능했고 결국 독자적으로 전장에서 탈출한다.
북양함대의 화력은 절대 나쁘지 않아서 대구경 포를 보유한 덕에 어그로를 크게 끌었던 일본군 기함 마츠시마가 진원의 305mm 포에 직격, 대파당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죽하면 중상을 입고 죽어가던 일본 수병이 '정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라는 유언을 남겨 이 에피소드로 군가까지 만들었을 정도였다.[3]
북양함대의 화력은 절대 나쁘지 않아서 대구경 포를 보유한 덕에 어그로를 크게 끌었던 일본군 기함 마츠시마가 진원의 305mm 포에 직격, 대파당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죽하면 중상을 입고 죽어가던 일본 수병이 '정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라는 유언을 남겨 이 에피소드로 군가까지 만들었을 정도였다.[3]
- 북양함대의 승무원들은 열심히 전투에 임했으나, '치원' 함장 등세창 및 일부 장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교들은 그렇지 않았다. 함장을 맡은 고급장교들 역시 예외는 아니라 자신의 함선이 잘 싸우고 있는데도 전장에서 임의로 도주하는 역적짓을 했다. 싸워야 할 놈들이 쫄아서 도망치는데 암만 엘리트들을 배치한들 무슨 소용인가. 결국 이것도 패배의 큰 원인이 된다. 일례로 황해 해전 당시 북양함대의 좌익을 맡았던 순양함 중 하나인 '제원'은 전투 중 '치원'이 격침된 이후 바로 적전 도주했다. ' 제원'의 함장은 당시 중국의 기대주로 영국 유학까지 다녀왔음에도 이랬다.
5. 말로
황해 해전[4] 에서 패배한 후 일본군에게 나포되거나 격침된 함을 제외한 나머지는 위해위에 있는 본거지인 유공도로 피신하였으며, 곧 일본군이 산동 반도에 상륙해서 위해위 주변을 몽땅 장악한 후 포위전을 벌였다. 결국 이 과정에서 대다수의 함선이 탈출도 못해보고 교전 중에 좌초나 침몰하거나 항구에 정박한 채 나포당해서 북양함대는 사실상 소멸한다.
정원과 진원도 유공도까지 피신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정원은 유공도 주변에서 섬을 포위하려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일본 어뢰정의 야습으로 대미지를 입고 좌초되어 노획을 피하기 위해 자침해버렸고 진원은 노획당하고 마는 최후를 맞이한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간 후, 북양함대에서 아직 쓸만한 함선은 모조리 일본이 압수해서 배상함이라는 명목으로 일본 연합함대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다른 함대가 명목상 지원해 준 몇 척의 함선도 북양함대 소속에서 싸우다가 역시 나포되었는데, 이 함선을 돌려달라고 해당 함대의 제독들이 일본군에게 탄원... 한 사실이 있어서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그리고 북양함대에서 빼앗은 함선은 일본군이 오랫동안 써먹지는 못했다. 불과 10여년 후인 러일전쟁무렵에는 무적 전함이라던 진원은 이미 2등 전함으로 분류되어 2선급 전력이 되어있었는데 불과 10년 사이에 일본은 일등 전함으로 배수량이 두배인 15,000톤급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칠듯한 속도로 발전하던 당시의 군사 기술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일화다. 이것도 모자라서 진원은 1908년에는 훈련용 함선이 되고 1911년에는 아예 제적 당한 후 연습용 표적으로 전용되어 파괴당했다. 1912년에는 매각되어 고철로 스크랩처리됐다. 무적의 전함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던 함선이 준공 후 불과 13년만이자 노획 후로는 불과 3년만인 1898년에 2선급이 되고 진수 30년째에는 아예 고철로 분해되는 기막힌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6. 청일전쟁 당시 북양함대 전투력
7. 관련 항목
[1] 1886년 8월에는 정원호를 비롯한 북양 함대가 일본 나가사키를 방문하여 무력 시위를 함으로서 일본을 위압을 주어 청 수병들이 행패를 부려도 청 군함의 무력이 두려워 제대로 아무것도 못 했다고 한다. 출처 : 청말 해군의 재건 - 1. 아편 전쟁부터 청일 전쟁까지.[2] 군사력에 부어넣어야 할 돈이 이화원과 개인 의식주 등등 각종 쓰잘데없는 부분에 낭비된 것은 덤이다.[3] 죽어가던 수병이 옆의 부장에게 '정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라는 말을 남겼고 부장은 전투 불능이 됐다며 안심시켰다. 이에 그 수병은 옅은 미소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군가의 줄거리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마츠시마를 대파시킨 건 진원인데 왠지 정원이 일본인들의 어그로를 끌며 유명세를 타고 있다.[4] 다만, 일본측에 굉장한 운이 따라준 것이었다. 윗 문단에서 언급되었듯 일본해군 주력함의 주포는 오버스펙이었고 몇 발 발사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초탄에 북양함대의 기함에 적중함으로써 북양함대의 지휘계통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지휘체계를 잃은 북양함대가 일사분란하게 기동하는 일본해군에게 각개격파 당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