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포

 

1. 개요
2. 의미
3. 역사
3.1. 태동
3.2. 발전
3.3.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
3.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3.5. 북한군
4. 부활의 가능성


1. 개요


해안포는 대(對)함선용으로 운용되는 육상 해안 요새대포를 말한다. 해안에서 적 함선을 상대할 수 있는 대포면 다 포함되기 때문에 열차포 같은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포함되지만 일반적으로는 해안 요새에 설치된 요새포같은 것을 지칭한다. 국가별로 해군 육전대 내지는 해병대, 육군 등 운용 주체가 다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후부터는 전쟁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면서 퇴물이 되었으나 최종적인 퇴역은 냉전이 종식될 때로 매우 오랜 기간 존속했다.
간혹 큰 손상을 입은 군함들이 수리할 여유가 없으면 군항등의 거점 근처에 착저해서 해안포로 변신하기도 한다.

2. 의미


모든 해안선을 함정항공기만으로 지키기에는 해당 세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으며, 주요 항구나 해협에 대한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상에 설치된 방어시설물이 필요하다. 이 중 가장 강력한 방어시설이 바로 해안포였었다.
놀랍게도 '해안포 1문의 가치는 (동급의) 함포 3문'으로 치는 게 정설이다.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해안포가 이만큼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 흔들리는 함선에서의 함포사격에 비해, 안정된 지상에서 발포하는 해안포의 명중률이 훨씬 높다.
  • (함포가 아닌 다른 곳에 맞아도 무력화될 수 있는)함선에 비해, 해안포는 피탄면적이 매우 작아 생존률이 훨씬 높다. 동굴, 언덕 등 지형까지 잘 활용하여 배치하면 이 이점은 배가된다.
  • 고립된 함선과 달리, 해안포는 대부분 해안요새에 설치되므로 모태가 되는 요새의 방어력, 수리보급/인력의 도움을 즉각 받을 수 있다.
  • 함선의 밸런스를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함포와 달리, 해안포는 추가장갑, 은/엄폐/탐지/사격통제 장비 등 전투력 추가에 거의 부담이 없다.
단점은 역시 이동할 수 없다는 것. 함대 입장에서 해안포를 밀집배치했다면 다른 곳을 때리면 그만이고, 해안포가 적다면 그냥 때려 부수면 된다. 함대는 이동할 수 있고, 밀집할 수 있지만 해안포는 아니니까. 해안포 1문이 함포3문에 비견된다면, 주력함대와 맞서기 위해서는 함대의 1/3에 달하는 해안포를 깔아야 한다는 말도 되는데...그게 다 예산이다. 게다가 해안포는 이동할 수 없으니, 적이 공격하지 않는다면 그냥 예산 먹는 하마일 뿐. 적의 공격을 차단할 수 있다는 게 방어자의 이점이라면, 굳이 공격할 것 없이 군함 을 뽑기만 해도 적의 자원을 해안선 방어에 투입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공격자의 이점이다. 해안포를 박아넣은 만큼 다른 곳에 쓰일 예산을 끌어와야 하니까.

하지만 단점을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강력한 장점 때문에 해안포는 대단히 오랜기간 중요하게 사용 되었으며, 지금도 일부 국가에서 사용하고 있다. 연평도 포격 사태 당시 우리 군이 북한군의 해안포를 즉각 무력화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도 해안포가 가지는 장점으로 인한 것이었다.[1] 그리고 (후술될) 레일건이나 코일건과 같은 군사기술이 상용화된다면 해안포가 다시 주력 대함병기로 부활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도 위와 같은 전술적 이유들 때문이다.

3. 역사



3.1. 태동


해안포는 1381년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전쟁에서 처음으로 기록이 발견된다. 포르투갈의 왕은 카스티야 함대의 공격에 대항하여 리스본을 방어하기 위해 대포를 사용하였다.
해안포의 사용은 16세기 대항해시대에 확대되기 시작한다. 식민 강대국들이 바다 건너 영토의 원주민들을 복속시키고 경쟁국의 해군을 막아내기 위하여 처음으로 한 일이 해안요새의 건설이었다. 19세기 중국 또한 수백의 해안요새를 서양의 해양 위협에 대항하여 건설하였다. 비슷한 시기 조선에도 강화도초지진이나 광성진 같은 요새를 통해 서양 세력을 막으려 했으나 무기 격차가 너무 커서 실패했다.
일단 제대로 만든 최상급 해안요새는 함포를 수십개씩 싣고 다니는 프리깃이나 전열함에 비해서는 턱없이 포문이 부족했지만 전열함조차도 함부로 싸울수 없는 상대였다. 일단 근세의 전열함은 그 특성상 대부분의 함포가 부앙각이 극히 제한될수밖에 없었는데 해안요새는 당연히 높은곳에서 아래를 어느 정도 조준할수 있었으므로 함선을 선체를 엄청나게 기울이지 않는한 포격 자체가 힘들었는데 반해 해안요새는 편하게 함선을 두들길수 있었으며 장갑 재질도 목재 VS 석재...게다가 구멍이 숭숭 뚫리면 침수가 시작되고 마스트가 부러져서 버틸수가 없는 함선에 비해서 포탄에 맞아도 구멍이 뚫리지도 않고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침몰할리가 없었기때문에 포안구로 정확히 포탄을 명중시키는 묘기를 해야했는데 설사 그게 성공한다고 해도 고폭탄도 아닌 구형포탄이 해안요새에 피해를 줄 가능성은 적었다. 더군다나 해안요새는 화재의 위험이 함선에 비해 매우 낮았으므로 대함 필살기(...)인 가열 포탄을 사용할수 있었다.[2] 때문에 함선들은 차라리 상륙선을 선호했지만 당연하게도 요새라는건 상륙전에 대한 대비도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건 숫자상으로도 몇 개 안되며 돈과 자재를 아끼지 않고 투입해서 만든 강력한 요새에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실제로는 해안요새를 건축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며, 한 지역에 다수의 해안요새를 건축하는 것도 재정상, 지형상등의 이유로 곤란하기 때문에 해안요새 자체가 함대의 화력에 밀려버리는 사례가 많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 때까지의 해안포는 함포와 비슷한 구조와 크기를 가지는 것이 보통이었고, 시대의 한계상 전장식 단포신 활강포였으며, 포탄도 통솔리드 구형 포탄인 것은 함선과 마찬가지므로 고작해야 수백미터 거리에서 서로 난사를 하는 꼴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고정된 목표이며, 손상되었다고 임무를 교대할 수 없는 해안요새가 크게 불리해진다. 덤으로 그 당시의 요새는 현대식 요새처럼 장갑포탑이 설치된 것이 아니라 포대와 흉벽, 대피호로 구성된 구식 방식의 요새이므로 요새가 탄탄하지 않거나 화포의 수량이 적으면 전열함과 같은 강력한 함선을 만나면 양패구상하거나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포격을 맞다보면 석벽이 쉽게 붕괴되면서 해안요새 자체가 폐허로 변하는 일도 많았다. 원래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이 구식 대포의 포격으로 쑥밭이 된 이후의 성벽은 포격의 직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매우 낮고, 두께가 엄청나게 두꺼워지는 야트막한 언덕형으로 변하는데, 해안요새는 특성상 해안에 바짝 붙어서 지어야 하므로 그런 기술을 사용할 수 없기에 높은 석벽이 바다로 노출될 수 밖에 없으므로 대포의 연사에 쉽게 붕괴되는 것이다.[3] 또한 포각이 고각으로 조정되는 구포를 장비한 전문적인 대요새 공격용 함선에는 상당한 열세를 보였다. 그래서 프랜시스 드레이크같이 사략선을 운영하는 해적이 스페인 식민지의 해안요새를 몇 척 안되는 함선으로 쑥밭행진을 하면서 갈아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3.2. 발전


해안포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함포와 마찬가지로 철갑선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철갑선은 기존의 전장식 단포신 활강포를 무용지물화했기에 새롭게 개발되는 후장식 장포신 강선포에서 제대로 된 철갑탄철갑유탄을 발사해야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함포도 크게 발전했지만, 상대적으로 더 탄탄한 토대와 함께 중량제한에서도 유리한 해안포가 해안요새의 발전과 더불어서 먼저 강력한 위치를 선점한다. 그리고 해안요새의 건축방식도 달라져서 원시적이지만 선회가 가능한 장갑포탑이 달린 전장식 해안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서 해안포를 담당하는 주체도 확실하게 정해졌다. 해안포는 해군해병대(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 전시 독일, 소련, 그리고 스페인어포르투갈어 사용 국가) 혹은 육군(영어 사용국가, 미국 제외)에 속해있다. 영국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까지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육군 포병 부대의 소관이었다.
미국의 해안포는 1794년에 육군의 한 갈래로 설립되어 많은 해상방어계획을 시작하였다. 1794에 첫 번째 체계, 1804에 두 번째 체계 그리고 1816년에 세 번째 체계인 ‘지속될 체계’가 설립되었다. 이후 미서전쟁 과 엔디콧 이사회의 보고로 미국의 해상방어는 새로운 강선식 포대와 기뢰지대로 매우 강화되었다. 이때는 기뢰 부설을 위해 육군이 직접 부설함을 운용했는데, 이를 운용하고 관리하기 위해 당시 해군에만 존재하던 준사관 제도를 육군이 도입했다.[4] 얼마 지나지 않아 1907년 미 의회는 지상포병대와 해안포병대를 나누어 미합중국 해병대 소속 해안포대부대(CAC)를 만들었다. 20세기 초 미 해병대는 강화진지부대를 설립하였다. 이 부대는 강화진지를 건설, 방어하였고, 해군과의 좋은 관계로 자신의 진지 주변 해안포대에도 배치되었다.

3.3.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


함선의 발달로 인해 최초의 진정한 전함드레드노트가 등장하면서 해안요새와 해안포의 가치가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대포 발전의 주체가 함포에 있었던 것도 큰 이유지만, 해안요새의 경우 한번 건설된 후에는 숫자가 많다는 등의 이유로 인해 상대적으로 개량이 적었으므로 해안포의 발전도 정체된 것이다. 그래도 요소에 설치된 해안포는 갈리폴리 전투처럼 나름대로 활약했다. 물론 개발살나면서 활약한 것이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에는 철근 콘크리트라는 건축자재가 보편화되면서 엄청난 방어력을 가진 요새가 등장했으며, 해안포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업그레이드되었다. 하지만 이미 대포의 발전이 함포로 옮겨진 후라서 이 당시의 최신식 해안포는 함포의 육상화버전이었으며, 아예 전함의 주포탑과 바벳구조를 통째로 강화해서 이식한 드럼 요새같은 물건까지 등장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넓은 지역에서 한정된 수량의 대포를 운용하기 위해 열차포도 이동식 해안포처럼 사용하게 된다.

3.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렇게 강화된 해안요새와 해안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름대로 활약하게 된다.
1940년 4월 드뢰바크 해협 전투 중 크릭스마리네는 여러 해안포대의 협공으로 중순양함 블뤼허를 구식 크루프 열차포 둘과 화이트헤드 어뢰정에게 잃었다. 독일 해군 함대를 이끄는 블뤼허가 1,000명을 태우고 좁은 오슬로 피오르에 진입 했을 때, 첫 번째 기습공격이 1마일 거리의 노르웨이 해군 오스카보리 요새에서 발포되었고, 곧 블뤼허의 주포는 불타올랐다. 또한 요새의 소구경 포들의 포격이 갑판을 난타하여 블뤼허는 선회 불가가 되었다. 이후 블뤼허는 불길이 화약고에 이르기 전에 여러 어뢰에 피격되어 격침되었고, 다른 함정들은 선수를 돌렸다. 기함에 타고 있던 승조원들 일부와 육군 산악부대원들 대다수가 그대로 전사했고, 지휘관 오스카르 쿠메츠 제독과 육해군 생존 장병들은 포로가 되어 노르웨이가 점령될 때까지 구금되었다. 그 결과 노르웨이 왕가, 의회, 내각은 안전하게 탈출하였고, 도시가 적의 손에 떨어지기 전에 노르웨이의 금을 도시 밖으로 이동시켜 보존할 수 있었다.
태평양 전선 발발 직후인 1941년 12월 웨이크 섬 전투에서는 미 해병대는 여섯 문의 127㎜ 포를 일본군 함대에게 발사하였고 일본 해군 구축함 하야테의 화약고에 명중, 침몰 시켰다. 경순양함 유바리 또한 11발 피격되어 퇴각해야 했고, 그 결과 잠시나마 일본의 섬 점령을 저지시켰다.
하지만 이렇게 활약한 해안포보다는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고 개발살나거나, 종전까지 아무런 일도 못한 해안포들이 더 많았다. 당장 일본남방작전싱가포르 전투전투만 봐도 영국의 싱가포르 요새에 배치된 해안포들은 막상 공격이 대양쪽이 아니라 조호르 해협쪽의 육상공격이었으므로 공격위치가 불리하고 탄종도 육군에 사용하기에는 불리한 철갑탄 위주라서 영국군일본 육군에게 별로 저항도 못해보고 쉽게 함락당했으며, 대서양 방벽 중 가장 방어가 잘 된 도버 해협의 칼레 구역의 독일 해군 해안 요새와 해안포는 영국쪽 해안 요새의 요새포 공격을 맞고 개발살나는 등의 사태가 발생했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과 미국의 본토 주요지역을 지키던 해안 요새와 해안포들은 종전까지 제대로 된 활동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눈에 띄는 활약이 없었다고 하여 해안포가 아무런 역할을 못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앞서 언급된 '해안포 1문 = 함포 3문'으로 쳐 줄 정도로 전술적 이점이 강한 것이 해안포였기에, 연합군은 추축군의 해안포를 제거하거나 무력화하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그래서 상륙이 가능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철근콘크리트로 떡도배를 한 일본군의 해안포는 절대로 고폭탄 포격/폭격에 무력화되지 않으며, 함포의 철갑탄 사격 or 항공기로부터의 철갑로켓탄 공격만이 유일한 해법이고, 심지어 그 낙탄각도까지 고려해야 격파할 수 있다는 노하우를 얻어낼 때까지 미군은 2~3년 간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해야만 했다. (상륙 및 성공가능성은 0%에 수렴했지만 하와이, 지브롤터 등 연합군의 중요한 요새 역시 해안포가 매우 중요한 방어요소였다. 하와이의 해안포를 구경해 보고 싶으면 참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트기미사일의 발달과 핵무기의 등장으로, 적에게 피격되기 쉬운 고정된 포대인 해안포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거대한 대포와 강력한 요새로 이루어지는 해안포는 하나둘씩 퇴역했으며, 육군의 대전차포등을 이용해서 임시적으로 구축된 해안포도 한국전쟁 이후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소련만이 냉전이 끝날 때까지 소수의 해안포와 열차포를 해안포 명목으로 유지했지만 결국 퇴역시켰다. 현재 미국만 해도 해안에는 굳이 요새가 없고 미국 해안경비대가 사실상 제5군이 되어 해안선 방어에 나서고 있다. 단 항구 등에 설치한 대함 미사일은 해군기지 방어용으로 아직까지 미 해병대 소속 경비대대가 운용 중이다.
대함미사일의 발전은 반드시 해안가에 요새를 건축할 필요가 없으며 다른 지령소에서 목표로의 유도가 가능하다는 등의 장점이 있으므로 현재의 상황에서도 육지에 설치된 대함미사일 발사장치들이 해안포의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미사일이지 견인포, 곡사포가 아니므로 해안포로 보기는 어렵다.

3.5. 북한군


북한의 조선인민군도 해안포를 애용하는 군대 중 하나로 1967년에는 한국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을 해안포 포격으로 저질렀고 2차례의 연평해전, 대청해전, 연평도 포격 사태 등의 해상도발에서도 해안포를 이용해 대한민국 해군 함정들의 기동을 제약하였다.
조선인민군의 다른 대부분의 무기체계와 마찬가지로 현대화가 되어 있지 않아서 발사속도가 느리고 정확도가 매우 떨어지지만, 숫자가 많고 상당수가 갱도화되어 방어력이 높기 때문에 한국 해군과 해병대에는 상당히 성가신 포이다. 연평도 포격 사태에서도 사상자 자체는 북한군 측이 몇배나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정작 해안포에 대한 무력화에 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 등, 대응수단이 155mm 포나 127mm 함포 정도가 최대인 제한전 상황에서의 갱도화된 해안포 무력화는 상당히 어려운 과제다. 한국군은 연평도 사태 이후 스파이크 대전차미사일, 천무 다연장로켓 등의 신무기들을 서해5도에 배치 중이다. 이것만으로는 양적으로 훨씬 많은 북한의 해안포에 맞서기에 불충분하므로 공군의 공대지 유도폭탄이나 해군의 함대지 미사일 등을 유사시 해안포 제압 작전에 동원할 계획이다.
북한이 대한민국과의 관계가 굳어버리면 제일먼저하는것이 남쪽을 향한 해안포 문을 열어놓는것. 포를 언제든 쏠수있다는 무언의 시위이다.
해안가에 있기에 포에 습기가 찰것을 대비해 자주 열어주고는 있지만 포문을 3일넘게 열면 그것만으로도 남북관계를 알수 있다. 따라서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한국 언론에서도 제일 먼저 하는것이 포문 지켜보기. 여러 언론들이 열린 포문을 보여주려 앞다퉈 연평도에 들이닥친다고한다.

4. 부활의 가능성


군사력이 괜찮은 국가의 경우에는 지상발사 대함미사일이 해안포의 역할을 대신하는 중이다. 값비싼 미사일을 대량으로 갖추기 어려운 중소국가의 경우에는 아직도 해안포를 애용하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포대 대신 퇴역 전차를 해안포 대용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5]
대형 해안포를 전부 퇴역시킨 러시아군도 1990년대 들어 A-222라는 신형 해안포 시스템을 재배치했다. A-222는 과거 해안포의 약점인 고정포대라는 점을 탈피하여 전 포대자주화되어 있으며, 현대의 대구경 함포 중 세계 최고 수준의 포로 정평이 높은 AK-130 130mm 2연장 함포(발사속도 분당 20~80발)를 쌍포신의 연장포에서 단일포신의 단장포로 개수한 ZIF-94-1 130mm 해안포를 탑재하고 있다. 이들은 생산된 전량이 러시아 해군 해안포부대에서 지상배치 대함미사일 발사 플랫폼 시스템들과 함께 운용되고 있어 일종의 하이로우 믹스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몇몇 국가를 빼놓곤 사장되다시피 한 분야이지만 레일건이 개발된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기본 사거리가 수백 km가 넘고 포의 특성상 미사일보다 훨씬 싸고 지속적으로 화력을 퍼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레일건의 약점인 막대한 전력문제도 개발된 시점에선 해결했을 것이고, 설령 해결이 안됐다 하더라도 충분한 발전시설 및 부대시설을 갖출 수 있는 육상인 만큼 운용에도 별 문제가 없다. 해협 같은 요충지에 설치한다면 매우 요긴한 시설이 될 수 있을뿐더러 서로간의 거리가 가까운 국가간이라면 방어용도를 넘어 적국 영토와 영해에 대한 공격용으로까지 사용될수도 있다.

[1] 물론 제한전 상황이라는 정치적 요소가 제일 컸다. 한국군이 확전 위험 때문에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보복전에 나섰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2] 포탄을 뜨겁게 달구어서 발사하는 방법, 함선들이 목재로 이루어진 전열함 시대에서 매우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는데 바짝 마른 목재위에 페인트까지 발라져서 화재에 극도로 취약해진 범선에 뜨겁게 달궈진 포탄이 착탄되면 곧바로 불이 붙어버린다, 재수없으면 화약등에 불이 붙어 끔살이고 운이 좋아 금방 꺼도 또다른 가열포탄이 이미 날아오고 있을것이다.. 당연하지만 범선은 사실상 쓸수 없는 기술이였는데, 안그래도 파도때문에 흔들리는 범선에 화로를 깔고 포탄을 가열하다간 자기 배에 불내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3] 당장 수원화성만 살펴보더라도 구식 대포의 사격을 막아내기 위해 석벽 뒤에 엄청난 두께의 토벽이 존재한다. 석벽이면 포격을 막아낼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중세때 폐기된 사상인 것이다.[4] 이들은 미국해군사관학교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다.[5] 러시아군은 퇴역한 전차 포탑을 해안포로 삼기도 했으며 한국군 해안포의 상당수도 구형 전차에서 탈거한 90mm 전차포이다. 최근에는 너무 노후화가 심해져서 40mm 60구경장 함포 등이 추가되고 있으나 여전히 주력은 구형 전차포를 운용중이다. 러시아군과의 차이점은 포탑을 통째로 쓰지 않고 포 부분만 가지고 고정화시킨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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