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스칼라브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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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브라이언 데이비드 스칼라브리니 (Brian David Scalabrine)
'''생년월일'''
1978년 3월 18일 (46세)
'''출신학교'''
남 캘리포니아 대학교
'''신장'''
206cm (6' 9")
'''체중'''
107kg (235 lbs)
'''포지션'''
파워 포워드
'''드래프트'''
2001년 드래프트 2라운드 34순위
뉴저지 네츠 지명
'''역대 소속팀'''
뉴저지 네츠 (2001-2005)
보스턴 셀틱스 (2005-2010)
시카고 불스 (2010-2012)
→베네통 트레비소 (2011)
'''역대 등번호'''
21번 (뉴저지)
44번 (보스턴)
24번 (시카고)
'''지도자'''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어시스턴트 코치 (2013-2014)
'''수상내역'''
NBA 챔피언 (2008)
First-team All-Pac-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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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소개
2. 입성 전
3. 입성 후
4. 은퇴 후의 지도자 경력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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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 보스턴 시절에는 평균 12.9분을 뛰고 우승반지를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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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유투 에어볼이 나왔는데도 MVP 챈트를 받은''' 역사상 유일무이한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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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Mamba

이탈리아계 미국 출신의 전직 농구선수로 별명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화이트 맘바. 현재는 셀틱스 지역방송국의 리포터를 담당하고 있다.
사실 못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선수인데 리그가 NBA인 만큼 실력을 얕잡아 봐서는 곤란하다.[1][2]
특유의 유머와 개그로 락커룸의 분위기 메이커를 역임(?)하였으며 현역 시절 동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선수이기도 하다.
유명해진 계기는 사실 07-08 시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전까지는 지극히 평범한 실력과 외모 등으로 아예 알려지지 않은 선수였으나, 08 시즌 정규시즌에서 놀라운 경기력으로 주전들을 일찌감치 빼고 후보들을 기용하던 셀틱스에서 팬들의 눈에 띄게 된 것. 후보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못하던(...) 스칼라브리니가 나왔다는 건 그 날 경기는 도저히 질 수 없을 정도로 볼짱 다 봤다는 의미였고, 이 때문에 셀틱스 팬들은 경기가 크게 기울면 자축의 의미로 "Sca-la-bri-ni!!"를 외치곤 했다. 이후 열화와 같은 환호와 함께[3] 그가 경기에 투입되고 득점이라도 하면 난리가 나면서 그는 행운의 마스코트, 승리의 상징(...) 취급을 받았다. 이후 이적한 팀이 또 동부 1위를 다투는 시카고 불스인지라 그의 마스코트 인생은 계속되었다. 이 와중에 인터넷에서 "그는 사실 블랙 맘바[4] 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화이트 맘바"식의 유머가 넘쳐나면서 이렇게 유명해진 것이다. 무던히 좋은 성격과 푸근하고 친근하게 생긴 외모도 한몫 하기도 했고...

2. 입성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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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인 컬리지에서는 신인 시절 평균 16.3득점, 9.6개 리바운드, 2.9개 어시스트, 1.2개의 스틸을 기록하였고, 17개의 더블-더블과 75%의 자유투 성공율로 팀을 이끌게 하여 같은 학교의 주 주니어 컬리지 챔피언쉽에서도 우승을 하였다. 또 1997년 노스 디비젼 올스타에도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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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남 캘리포니아 대학교로 진학해 28경기를 선발로만 출전해, 14.6득점, 6.4개 리바운드, 53.1%의 필드 골을 기록하였다. 1998년 12월 21일에 열린 아메리칸 대학교와의 가장 인상에 남는 경기에서는 26득점, 7개 리바운드, 2개 블록 슛을 기록하였고, 1999년 2월 13일에는 22득점을 넣어 연장전 접전 끝에 86-82로 승리해 All-Pac-10 이 해의 신인 감투상을 수상하였다.

3. 입성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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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캘리포니아 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 2001 드래프트 2라운드 34순위로 뉴저지 네츠에 입단하였다. 신인시절인 2001-02시즌에는 피스톤즈와의 시범경기에서 또 한번 오른 발을 다치게 된다. 많은 부상임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극복한 뒤, 2002년 1월 31일에 열린 밀워키 벅스와의 경기에서 데뷔를 치르게 된다. 신인 시절에는 평균 2.1득점, 리바운드 1.8개, 어시스트 0.8개를 기록하였다. 플레이오프에서는 0.3득점과 0.5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여 처음으로 동부 컨퍼런스 챔피언에서 우승하여 결승전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맞붙게 되었지만, 팀의 첫 우승 트로피는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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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동부 컨퍼런스 준결승전 5차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의 경기에서는 본인 최고 기록인17득점을 넣어 연장 3차전 끝에 승리하였고, 2005년 1월 26일에 열린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경기에서는 또 한번 능가하게 하는 29득점을 넣어 최고기록을 달성하였다. 같은 해 4월 15일에는 45분을 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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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2일에는 5년 계약으로 보스턴 셀틱스에서 플레이하게 되었다. 정규 시즌에서 48경기를 나가 10.7분을 소화해 1.8득점과 1.6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였다. 2008 플레이오프에서는 모두 출전하지 않았으나 결승전에서 라이벌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누르고 NBA 챔피언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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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21일에는 셀틱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았던 톰 티보도가 감독에 취임한 시카고 불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 5일에 열린 친정팀 셀틱스와의 경기에서는 고작 평균 시간 3분을 소화하였지만 연장 2차전 접전 끝에 110 대 105로 승리했다. 게다가 같은 시즌에는 18경기를 출전해 1.1득점과 0.4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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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2일에는 NBA 직장 폐쇄가 시작된 동안에는 이탈리아 베네톤 트레비조에서 뛰게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NBA 직장 폐쇄가 풀려난 뒤에 계약을 해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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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1일에는 불스와 재계약을 맺었고, 같은 시즌이 끝난 뒤 현역을 은퇴하였다.

4. 은퇴 후의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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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4시즌에는 1년동안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았다.
[1] 별 의미는 없지만 오히려 KBL 같은 경쟁력이 낮은 리그에서 재앙으로 군림했을 선수다. 스칼라브리니는 대학시절 팀에서 톱 득점-리바운더이자 가장 높은 필드골 성공률을 기록했고 블럭에서도 컨퍼런스 톱 10에 들던 다재다능한 센터였다. 운동능력이 넘사벽인 NBA에 오니까 거의 모든 능력이 봉인된 거지 하위리그였다면 다재다능한 득점원으로 활약했을 것. 게다가 맨발키가 6피트9인치 (206)에 가까워서 센터로서도 손색이 없다. 또한 NBA에서 파워 포워드로 뛰던 선수가 파워에서 밀릴 리도 없고... 애초에 KBL 외국인 선수들이 NBA에 진출 못한 선수들인데, 이 문턱을 넘어 10년 넘게 뛰었다는 것만 해도 비교가 실례다. 즉, '''너무 엄청난 인간들이 뛰는 리그라 허접처럼 보이는 거지, 실제론 엄청난 엘리트 선수이다.'''[2] 일반 NBA팬들이 허접의 대명사 정도로 아는 선수들의 이미지와 실제 실력 사이의 괴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 스칼리브리니는 못해서 웃긴 선수지만, KBL을 지배한 외국인 선수들과 그 중 하나를 뽑으라면 거의 모든 구단이 그를 뽑을 것이다. 일단 NBA문턱을 넘어 10년 넘게 버틴 엘리트이기 때문. 다른 예로 룩 롱리같은 경우 바보센터로 유명하지만 전성기 기준 NBA에서 주전과 백업의 경계 정도에 있는 솔리드한 플레이어였으며, 백업급으로 한정할 경우 상당한 실력자였고 본국인 호주에선 농구영웅이자 명예의 전당 헌액자이다. 바보취급받던 저베일 맥기도 NBA에서 한자리 하는 엘리트이다. 애초에 진짜 허접한 선수라면 팬들에게 이름을 알리지도 못한다. 일례로 일반적인 미국의 NBA팬이라면 2라운드에 지명되었다가 부상과 더딘 성장으로 2년 만에 사라진 하승진을 거의 모를것이다.[3] 물론 경기 다 끝난 마당에 심심한 팬들이 뭐라도 웃길 거리를 찾는 거였지만.[4] 코비 브라이언트의 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