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카 타타르

 



1. 개요
2. 역사
3. 현황
4. 미국 이민
5. 인물
6. 관련 문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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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카 타타르인 무프티들이 문화 행사에 참여한 모습. 좌측은 리투아니아 수니파 무슬림 영적 중심지의 무프티인 로마스 야쿠바우스카스(Romas Jakubauskas). 우측은 폴란드 공화국 무슬림 종교 연합의 무프티인 토마시 미시키에비치(Tomasz Miśkiewicz).
과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땅에 살던 타타르족은 한때 킵차크 칸국의 칸이었던 토크타미쉬 세력의 후손들로써 '립카(Lipka) 타타르족'이라는 별개의 명칭으로 불렸으며 이슬람교를 믿는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였다. 벨라루스어로는 그냥 립카라고 부르며 리투아니아어로는 Lietuvos Totoriai(례투보스 토토랴이)라고 한다. 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인 오늘날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폴란드 이렇게 3개국에 거주한다.
볼가 타타르인들이 타타르어를, 크림 타타르인들이 크림 타타르어를 사용하고 시베리아 타타르인들이 시베리아 타타르어를 사용한다면 이들은 예배하는 경우 외에는 현지어를 사용한다. 다만 다른 타타르인들과 마찬가지로 종파는 수니파이며 마드하브는 대체로 하나피파를 따른다. 볼가 타타르인이나 시베리아 타타르인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주의자 혹은 냉담자가 많은 편이기도 하다.

2. 역사


튀르크계에다가 자신들의 언어를 로마자 대신에 아랍 문자로 표기하는 등 인종적/문화적으로 이질감이 큼에도 이들은 대대로 리투아니아 대공국(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흡수)에게 충성하면서 1792년 폴란드 분할로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단 한번도 배신을 하지 않는 충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려 그룬발트 전투 시절부터 참전 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역시 이들이 전력을 높게 평가하여 웬만해선 이들을 견제하지 않았다. 단 한번, 폴란드 리투아니아에서 노가이 칸국 출신 용병을 고용하며 자신들의 특혜를 나눠주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당시 폴란드의 국왕이던 얀 3세 소비에스키가 노가이족 용병들의 특권을 폐지하면서 금세 진정되었다.
1590-1591년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내 타타르 인구가 20만여 명에 모스크만 400여개라는 기록이 있으나 다소 과장이 섞인 듯 하다. 립카 타타르인들이 쉴레이만 1세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에는 백여개의 립카 타타르인 마을이 있다는 문장이 있다. 서신이나 기록은 립카 타타르인 인구와 규모를 과장한 듯 하고 정확한 규모 추산은 힘들지만 빌뉴스에는 "토토류 루키스케스(Totoriu Lukiskes)"라는 타타르인 거주 구역이 있었으며 트라카이민스크, 나바흐루다크에는 립카 타타르인 쿼터가 존재했다는 점을 보면 나름 인구 규모가 있었던 듯 하다. 민스크의 구시가지 중 립카 타타르인들이 거주하던 구역은 타타르스카야 슬라바다라고 불렸다. 오늘날에도 트라카이 성으로 올라가는 골목에는 타타르식으로 지은 오두막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비타우타스 대공이 자신의 개인 호위병으로 임명한 타타르인들의 후손들이 살던 집이라고 한다. 트라카이의 지역 음식 중 키비나스라는 군만두 비슷한(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앙아시아의 삼사 비슷한) 요리가 있는데, 이 요리의 기원은 비타우타스가 데려온 타타르인 아니면 카라임 유대인들이 전수한 요리라고도 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내 립카 타타르인들은 귀족층으로 대우를 받았으며,[1] 평균적인 립카 타타르인 가정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농민층은 물론 크림 칸국크림 타타르인들에 비해서도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다. 비교하자면 크림 타타르인 중에서는 생각보다 보병이 많았고 노예 납치에 나설 때 상당수가 부자들에게서 말을 빌린 후에 약탈에 참여하는 경우도 흔했다. 반면 토크타미쉬 칸을 따라온 기마 전사들이 중심이 된 립카 타타르인들은 경기병 보조부대 전력으로 활용되기 위해서 군마를 직접 유지해야 되는 이유로 리투아니아 대공국 측으로부터 상당부분 특혜를 제공받았다.[2] 이들은 자신들이 타타르라고 불리는 것 자체를 달갑지 않게 여겼는데, 동쪽에 사는 다른 타타르인 동포들보다 자신들이 훨씬 고상하고 유식하다는 선민 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을 타타르 대신에 립카 혹은 무슬림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3]
그러나 립카 타타르인들 역시 인구 대다수가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의 리투아니아인 혹은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상당수가 폴란드인과 완전 동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폴란드 귀족 문화는 근세 동유럽 문화권에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최신 르네상스 학문과 기술을 수용한" 매력적인 최신 문화로 유명했고 리투아니아 대공국 내 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이 아예 리투아니아어를 버리고 폴란드어만 사용하게 된 것은 물론 심지어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일대의 정교회를 믿던 지주들 상당수가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폴란드인과 통혼 후 완전히 폴란드화하였다.[4]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고 완고하게 이슬람 신앙을 지키는 것으로 보였던 립카 타타르인들도 점차 폴란드인 귀족과 결혼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폴란드 분할 이후로는 립카 타타르인들의 이슬람 신앙과 모스크에 대한 법적인 우대조치마저 사라지면서 남아있던 립카 타타르인들의 폴란드화는 더 가속되었다. 폴란드의 민족주의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모친이 립카 타타르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도 알려졌다. 러시아 제국 치하에서는 러시아 제국 본토의 볼가 타타르인과 혼혈되는 경우도 존재했으며, 현대 러시아에도 소수나마 거주하고 있다.
리투아니아의 경우 카우나스의 네만 강 근처에 목조로 된 모스크가 있었으나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당시 원정군이 도시를 약탈하는 과정에서 불에 탔다.[5] 카우나스의 립카 타타르인들은 모스크가 불탄 이래 1906년까지 모스크 없이 지내다가, 알렉산드라스 일랴세비추스(Aleksandras Iljasevičius)라는 리투아니아인 가톨릭 신도가 무슬림이었던 자신의 양친 묘지 근처에 다시 통나무로 10x8 제곱미터 넓이로 소형 모스크를 지은 다음부터 다시 예배 장소가 생겼다고 한다. 일랴세비추스가 부모님을 위해 모스크를 다시 복원한 이후에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붐볐다고 하는데, 당시 카우나스에는 립카 타타르인 120여명에 불과했지만, 근교의 주둔한 러시아군 중 무슬림 군인 2,000여 명이 금요일 예배 때마다 해당 모스크를 즐겨 찾아 마당에서 예배했다고 한다.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이 독립한 이후 해당 모스크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전성기를 기념한다는 명목 하에 석조건물로 증축되었다.
19세기 크림타타르계 이슬람 모더니즘 학자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İsmail Gasprinskiy / 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 1851년 3월 20일 ~ 1914년 9월 24일)[6]는 튀르크인 무슬림들이 중앙아시아 부하라의 보수적인 이슬람 마드하브 대신 립카 타타르인들의 진보적인 문화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공교롭게도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며 립카 타타르인 인구는 오늘날 겨우 15,000여 명 정도로 감소하였다. 이마저도 상당수는 자신들의 조상 중 립카 타타르인이 있었다고 가끔 전통의상 입고 사진찍고 기념하고 장례식 방식이 이슬람식으로 다르게 치루어진다 정도의 수준이다.[7] 소련 시절 국가 무신론을 권장하는 정책상 일어난 박해 과정에서 립카 타타르 전통 문화 유산 중 상당수가 소실되었다 한다. 기사가 작성된 시점에서 보전되거나 복구된 립카 티타르인들의 모스크는 3개국에 7개 밖에 되지 않는다. 관련 기사. 상술한 카우나스 모스크도 2차대전 당시 문이 닫힌 후에 소련 시절에 이국적인 건축 양식과 인테리어 때문에 서커스장으로 개조당했다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야 모스크로 다시 환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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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카우나스의 모스크(마스지드)

3.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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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립카 타타르 마스지드
현재도 이슬람교를 믿으며 자신들의 핏줄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건축양식도 나름 독특해서 교회처럼 생긴 목재로 지은 모스크가 특징이다. 이런 모스크들의 경우 독특한 건축 양식 때문에 나름 관광 상품으로 개발될 수도 있지만 폴란드에 있는 립카 타타르 모스크들은 주로 대도시보다는 시골에 있는 경우가 많고, 벨라루스 도심에 있는 모스크들은 벨라루스가 관광객한테 별로 친절한 나라가 아니다보니... 물론 지역 주민들이 손을 놓은 것은 아니고 폴란드에 있는 모스크들은 단색으로 예쁘게 페인트칠을 해서 관광객들을 유인하는 편이다.
21세기 들어서 폴란드 내 이슬라모포비아가 심해지면서 사회적 입지가 약화된 립카 타타르인들. 오늘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양국 모두 이슬라모포비아와 난민 혐오가 심각한 상황이라 굳이 대도시에는 모스크를 복원하지는 않는 편이고 복원하더라도 최대한 아담한 사이즈로만 복원하는 편이다. 굳이 모스크를 크게 지어놓으면 이슬람주의 성향 이민자들이 자석처럼 우르르 몰려들 가능성도 있고, 애초에 폴란드에 잔존한 립카 타타르인 인구는 2천여 명 이하, 리투아니아에는 3천여 명 이하만 거주하는 상황이라 이미 폴란드 내 무슬림 인구 중에서도 마이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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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Dua)[8]를 드리는 폴란드의 립카 타타르 무슬림. 사진을 보면 이미 다른 무슬림들과 예배하는 방식도 많이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수니파에서는 두아를 드릴 때 맨손으로 드리지 사진에서처럼 책을 들고 드리는 경우는 없고 남녀가 같은 줄에 서서 예배하는 것은 2대 칼리파 우마르 이후로는 사실상 금지된 예배 방식이다. 예배법 일부가 간략화된 방식으로 변형되었거나 아니면 비무슬림들이 이슬람 예배에 약식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모습을 두고 와하브파 성향의 다른 나라 출신 무슬림들과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도 있다. 샌드위치 신세가 되기 딱 알맞은 상황.
상단의 사진에 터번을 쓴 인물이자 개요 항목 사진에 폴란드 측으로 나온 인물은 폴란드의 무프티 토마시 미시키에비치(Tomasz Miśkiewicz)이다. 이모저모로 고생을 많이 하는 인물로 단적인 예로 2017년, 지중해 한가운데서 익사 중에 구조되어 이탈리아에 정착한 콩고 난민이 이탈리아의 대표적 해변휴양지 리미니에서 폴란드 출신 20대 관광객을 상대로 다른 아프리카 출신 불량배들과 함께 집단 성폭행을 가하고 나서 체포되어 폴란드와 이탈리아 양국 모두에서 국민적인 분노를 일으킨 사건도 있었는데, 해당 사건의 여파로[9] 이 사건 직후 폴란드의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뜬금없이 폴란드 내 모스크들에 돌을 던져서 창문을 박살낸 사건도 일어났다. 갖은 욕 다 먹어가면서 이런 일을 다 수습하는 것도 극한 직업의 일종이다. 폴란드 극우단체가 콩고가 무슬림 국가인지 부두교 국가인지 기독교 국가인지는 별 관심은 없을테고, 그냥 가까운데 있는 만만한 소수자들이 사건과 연관도 없는데도 불구 화풀이 대상이 된 상황이다.

4. 미국 이민


미국에 최초로 모스크를 세우고 무슬림 권익단체를 만든 무슬림 집단 중 하나가 바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폴란드인 대량 이민 과정에 같이 합세한 립카 타타르인이었다. 같은 시기 터키계 미국인들도 이민 왔으나 터키 출신의 경우 오스만 제국과 서구와의 역사적 관계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슬람을 내세울 경우 따돌림을 당할까봐 오히려 립카 타타르인들보다 더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6년 시카고에 정착한 보슈냐크인들이 커피 하우스를 중심으로 보슈냐크인 권익단체를 세우고 1년 후 1907년 뉴욕에서 “미국 무함마드교[10] 협회(American Mohammedan Society)”라는 단체를 조직한다. 해당 단체의 노력으로 미국 최초의 모스크가 세워졌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미국 최초의 모스크는 바로 립카 타타르인들이 뉴욕 브루클린에 1927년에 세운 모스크였다.# # 당시 건축된 모스크는 일부러 교회와 똑같은 외양으로 짓고 건물 내부만 밈바르(금요일 예배 때 이맘이 앉는 자리)를 설치하는 수준이었다. 립카 타타르인 후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거나 더 이상 이슬람을 믿지 않는 이유로 해당 모스크는 종교 시설보다는 역사 유적 정도로 분류되어 관리되고 있다. 21세기 이전 미국으로 이민간 무슬림 인구는 심지어 아랍계마저 순니파 이슬람에서 개신교로 개종하거나 아예 무종교인이 된 경우가 많은 것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긴 했다.

5. 인물



6. 관련 문서


[1] 18세기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체 인구의 10~12%가 귀족이었다. 즉 광대한 영지를 거느린 대귀족도 있었고 그냥 자영농인데 타이틀만 귀족인 경우도 많았다.[2] 참고로 18세기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에서 남성 농노는 평균 200루블, 여성 농노는 100루블에 매매되었고, 군마는 500루블이 평균 시세였다.[3] 여기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귀족들의 선민사상이자 특권의식인 사르마티즘도 주요 원인 중 하나였는데, 16세기 이후 연방에서는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벨라루스인" 같은 개념은 주로 하층민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귀족과 대귀족은 자신들이 고대 기마민족인 사르마티아인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사르마티아인이라 칭했기 때문이다.[4] 한 가지 예로 오늘날 근세 리투아니아 내전에 참여한 귀족가문 대다수가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루테니아계였다.[5]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 가운데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이 많이 참전했지만 당시 나폴레옹군은 보급이 현지 조달 방식이라 같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인들도 걍 일단 약탈하고 본 것.[6] 튀르크어식 성씨인 가스프랄르(Gaspıralı, Gaspralı)로도 알려져 있다.[7] 비교하자면 스웨덴의 보스니아계 축구 선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평소에는 이슬람과 담 쌓고 살지만 가족들의 장례식은 이슬람식으로 치루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8] 예배가 끝난 이후나 소원이 있을 때 양손 손바닥을 얼굴 방향으로 하며 드리는 이슬람식 기도.[9] 주요 가해자 콩고 남성은 무슬림이 아니었으나, 가해자 동료 중에 모로코인 형제가 포함되어 있었다.[10] 과거에는 영어권에서 이슬람을 무함마드교라고도 불렀다. 오늘날에는 영어가 국제 공용어화되면서 더 이상은 잘 사용되지 않는 어휘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번역된 책에서 마호메트교 등등의 어휘가 나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