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야누코비치
1. 소개
우크라이나의 4대 대통령이다.
2. 생애
야누코비치는 1950년 7월 9일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예나키예베에서 태어났다. 그는 2살 때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청소년 시절에 절도와 폭력으로 17살이 되던 1967년에 3년간 소년원에서 수감 생활을 하였다. 1972년 버스 회사에서 전기공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 후 도네츠크 기술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1980년 졸업 직후에 예나키예베에서 운송 회사의 최고 관리자로 임명되었고,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2.1. 정치 활동
1990년대 초반 정치에 입문하였고, 소련이 붕괴되었다. 이후 동부 공업지대인 도네츠크 주 주지사를 지냈다. 친러시아 성향의 지역당에서 활동하며 도네츠크 주지사로 영향력을 행사했고, 2002년 총선에서 지역당이 포함된 연정이 중앙 정권을 잡아 그도 입지를 굳혔다. 2002년 11월, 총리로 임명되어 중앙 정계에 진출했고, 2003년부터 지역당 당수를 지냈다. 2004년 10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빅토르 유셴코 후보와 격돌했으며, 1차 투표에서는 근소한 차로 유셴코가 앞섰으나, 유셴코와 야누코비치 모두 다수표는 얻지 못하여 11월에 결선 투표가 치러졌다. 개표 결과 야누코비치가 49.46%의 득표로 대통령 당선인으로 발표되었으나, 선거 부정이 개입되었다는 이유로 유셴코 후보 지지자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오렌지 혁명으로 알려진 시위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등 큰 논란 끝에 12월 26일 재선거가 실시되어 결국 유셴코가 다수표를 얻어 대통령 당선인으로 발표되자, 이번에는 야누코비치 후보 지지자들이 반발하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를 뒤집지 못하고 유셴코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야누코비치는 2005년 1월 총리직에서도 축출되었다.
그 후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지역당은 2006년 3월 총선에서 최다 의석을 확보했으며,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정국은 다시 여당과 야당의 대립으로 불안이 계속되었다. 지역당은 친러시아 성향의 다른 당들과 연정을 구성해, 2006년 8월에 야누코비치는 다시 총리 자리에 올랐다. 야누코비치의 정적이었던 유셴코 대통령은 정국 안정을 위해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후로도 정국 불안은 계속되어 유셴코 대통령은 2007년 4월 국회 해산을 결정했으며, 이에 따라 조기 총선이 치러졌다. 조기 총선에서 그의 지역당은 제1당의 자리는 유지했으나, 율리야 티모셴코가 중심이 된 다른 당들이 연정을 구성하여 그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고, 티모셴코가 총리 자리에 올랐다.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다시 지역당 후보로 선출되어 선거에 출마했다. 야누코비치는 1차 투표에서 1위에 올랐으나, 다수표는 얻지 못하여,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와 결선 투표를 치렀다. 이 선거에서도 극심한 정파, 지역, 민족간 대립으로 매우 심한 혼란이 있었으며, 결선 투표 결과 48.95%의 득표율로 최종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야누코비치는 2010년 2월 25일,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율리야 티모셴코 내각은 해산되었으며, 야누코비치의 측근인 미콜라 아자로우(Микола Янович Азаров)가 지역당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후 티모셴코 전 총리는 직권 남용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아 수감되었고, 친러시아와 친EU를 사이에 놓고 정국 불안은 계속되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아자로프 총리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서부와 키예프 일대를 중심으로 계속되었으며, 2013년 하반기부터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확산되었다. 그는 유화책으로 아자로프 총리를 해임하고, 야권 인사들의 사면을 발표하고 EU와의 관계를 강화하겠다고 하였고, 최종적으로 야권 대표와 휴전의 합의했으나, 문제는 이 합의를 멋대로 뒤엎고 만다. 게다가 경찰에 강경진압을 지시하여 경찰의 발포로 대규모 유혈사태가 일어났으며, 국민들과 야권은 더욱 강하게 반발하였다. 결국 분노한 시위대가 키예프와 의회를 점거하자, 야누코비치는 키예프를 떠나 도주하였다. 이 일로 여당도 그에게 등을 돌렸으며, 2014년 2월 22일, 국회는 그를 인권침해와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탄핵을 가결하여 그는 대통령직을 상실하였다.
이후 그는 러시아로 망명하였다가 2014년 2월 28일에 로스토프나도누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신이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합법적인 대통령이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최고의회인 라다는 2015년 2월 4일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의 대통령 직위를 박탈하는 법안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야누코비치는 공식적으로 대통령 직위를 잃고 전임 대통령으로서 특권과 혜택도 누릴 수 없게 됐다. 특히 2014년에 야누코비치의 호화별장이 공개되자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이를 보고 하나같이 분노했다.#
대통령직을 잃고 1년 뒤 차남 빅토르를 교통사고로 잃었고, 또 그로부터 1년 뒤에는 부인과 이혼을 하는 등 악재가 겹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