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샹클리

 

'''빌 샹클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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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히어로즈'''
'''Liverpool Football Club Heroes'''
''' 이름 '''
'''빌 샹클리 ''' '''OBE'''
'''Bill Shankly OBE[1]'''
''' 출생 '''
1913년 9월 1일 /
스코틀랜드 이스트에어셔 주 글렌벅
''' 사망 '''
1981년 9월 29일 (향년 69세) /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
''' 국적 '''
스코틀랜드
''' 직업 '''
축구선수(라이트 하프[2]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칼라일 유나이티드 FC (1932~1933)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1933~1949)
''' 감독 '''
칼라일 유나이티드 FC (1949~1951)
그림즈비 타운 FC (1951~1954)
워킹턴 (1954~1955)
허더즈필드 타운 FC (1956~1959)
'''리버풀 FC (1959~1974)'''
'''국가대표'''
5경기(스코틀랜드 / 1938~1939)
1. 개요
2. 선수 시절
3. 감독 시절
4. 은퇴 이후
5. 다큐멘터리
6. 어록
7. 여담
8.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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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Form is Temporary, Class is Permanent.''

영국(스코틀랜드)축구선수 출신 감독. 1959년부터 1974년까지 리버풀 FC 감독을 맡았다.
그가 취임하기 전, 리버풀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침체기에 빠져 2부 리그에서 전전하던 중이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지휘봉을 잡은 빌 샹클리는 경기장과 훈련장의 시스템 등 구단의 내부적인 문제들을 혁신하였으며, 동시에 영입과 방출을 과감히 단행하였다. 그 결과, 풋볼 리그 디비전 1로 승격시켰고 이후 1부 리그 3회 우승과 FA컵 2회 우승, UEFA컵 우승 등을 달성하여 마침내 리버풀을 정상의 자리까지 올려놓았다.
그렇게 1974년까지 리버풀을 이끌다가, 본인이 완벽하게 리빌딩시킨 찬란한 유산을 밥 페이즐리에게 물려주고 명예롭게 은퇴하였다. 빌 샹클리는 재임 시절, 이른바 '부트 룸(Boot room)'[3]을 활용하여 코치진과의 결속을 강화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당시 부트 룸 멤버였던 코칭 스태프 밥 페이즐리조 페이건이 그를 이어 차례로 감독직을 맡아, 리버풀 구단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인 '붉은 제국' 시절을 이어갔다.
이처럼 빌 샹클리는 리버풀이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을 제패하여 명문 클럽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클럽의 전반적인 철학과 초석을 다지는 등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리버풀의 역사는 빌 샹클리 감독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리버풀의 전설적인 명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2. 선수 시절


'''선수 시절의 빌 샹클리'''
1913년에 스코틀랜드에서 4남[4] 중 막내로 출생했으며, 19살 때인 1932년에 칼라일 유나이티드에 데뷔하여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이듬해에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 들어가 16년 동안 화려한 선수 시절을 보냈다. 프레스턴 노스 앤드에서는 톰 피니와 4시즌 간 동료로서 경기하기도 했다.

3. 감독 시절


'''샹클리와 위대한 코치진들'''
,좌측부터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로니 머랜, 루번 베넷, 톰 손더스,

선수 은퇴 이후, 칼라일 유나이티드를 비롯하여 허더즈필드 등의 하부 리그 팀만을 전전하다가 1959년에 당시 2부 리그 소속이었던 리버풀 FC에 데뷔, 그는 감독직에 취임하자 마자 리버풀을 세계 최강 '무적의 요새'로 만드리라고 다짐했다.
그는 팀의 현황을 점검하여 24명의 선수들을 방출시켰고, 스태프들을 정리하여 팀의 모양새를 갖추면서 론 예이츠, 이안 세인트 존, 이안 캘러핸 등을 영입함과 동시에 젊은 포워드인 로저 헌트의 실력이 각성하여 팀은 1962년에 1부 리그로 올라갔다.
이에 그치지 않고 팀은 끊임없이 질주하여 1964년, 1966년에 1부 리그 우승을 이루었고, 1965년에는 FA컵도 재패했다.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에는 엠린 휴즈케빈 키건, 필 톰슨, 존 토샥 등을 영입하면서 세대교체를 시도하여 1965년 리버풀 역사상 최초로 유로피언 컵 준결승까지 진출한다. 다만 이때 엘레니오 에레라인테르를 만나 명승부 끝에 탈락하였다.
그리고 1965-66 시즌엔 UEFA 컵 위너스컵 결승에 진출하였지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패배하여 준우승을 달성하였다. 1973년에는 리그 우승과 UEFA컵까지 2관왕을 달성했고, 1974년에는 FA컵을 우승했는데, 이것이 샹클리 자신의 마지막 경기였다.
'''1974년 채리티 실드 당시의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과 샹클리'''
이렇게 팀을 잉글랜드 최강으로 만들어 낸 샹클리는 이제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하여 1974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뒤 밥 페이즐리 코치에게 감독직을 물려주었고, 1974년 채리티 실드에서 일일감독을 맡아 승부차기 승리를 거둔 것을 끝으로 지도자 생활을 끝냈다. 그리고 리버풀은 페이즐리 감독 휘하에서 비원의 유로피언 컵 우승을 달성하면서 사실상 세계 최강의 팀으로 인정받는다.

4. 은퇴 이후


'''1977년 유러피언 컵 우승 축하 당시 케빈 키건, 필 톰슨과 함께'''
1974년 11월에 4등급 대영제국 훈장(OBE)을 받았고, 이후 1981년 9월 26일에 심장마비로 쓰러져 9월 29일 새벽 1시 20분 경에 타계하였으며, 그의 유골은 안필드 경기장 위에 뿌려졌다.
'''샹클리 게이트(Shankley Gates)의 모습'''
안필드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5]
1983년 리버풀은 샹클리를 기리기 위해 홈구장 안필드에 샹클리 게이트를 세웠으며, 샹클리의 부인인 네시 샹클리가 처음으로 그 문을 엶으로서 그 의미를 더했다.
'''He made the people happy'''
'''그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후 1997년에는 클럽에 대한 공헌을 기념하여 안필드에 청동으로 만들어진 빌 샹클리의 동상이 세워졌다.

5. 다큐멘터리



'''샹클리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1990)'''

'''샹클리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2007)'''

6. 어록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Form is Temporary, Class is Permanent.''

'''이 도시에는 위대한 두 개의 팀이 있다. 리버풀리버풀 2군.'''

''The best two teams on Merseyside, Liverpool and Liverpool reserves.''

'''리버풀은 나를 위해 만들어졌고, 나는 리버풀을 위해 만들어졌다.'''

''Liverpool was made for me and I was made for Liverpool.''

'''일부 사람들은 축구가 생사의 문제와 같다고 여긴다. 난 그러한 태도에 매우 실망했다. 축구는 생사의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확언한다.'''

''Some people believe that football is a matter of life and death. I'm very disappointed with that attitude. I can assure you it is much more important than that.''

'''우리가 비기고 있거나 지고 있을 때 우리를 응원하지 않겠다면, 우리가 이기고 있을 때에도 응원하지 말라.'''

''If you can't support us when we draw or lose, don't support when we win.''

'''무엇보다 나는 이타적이고, 다른 이들과 영광을 나눌 수 있도록 애쓰고 걱정하며, 머리를 높이 들고 '우리가 바로 리버풀이다' 외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뤄진 한 가족을 만든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Above all, I would like to be remembered as a man who was selfless, who strove and worried so that others could share the glory, and who built up a family of people who could hold their heads up high and say 'We're Liverpool.'''


7. 여담


  • 빌 샹클리가 리버풀 팬들의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명문 클럽'으로서의 리버풀의 정체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빌 샹클리는 리버풀의 유니폼 컬러를 상하의와 양말까지 전부 붉은색으로 바꿨으며, 드레싱 룸에서 그라운드로 들어가는 입구마다 ‘This is Anfield’ 문구가 적힌 포스터 사인을 걸어두게 만들었다.[6] 그는 항상 리버풀은 최고가 되어야 하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길 원했다고 한다. 결국 그의 바람대로 명문 클럽으로서의 기틀을 확립했고 이는 후임이자 또 다른 전설적인 감독 밥 페이즐리조 페이건, 케니 달글리쉬의 지휘 아래 이어지는 70~80년대 리버풀 황금기의 바탕이 되었다. 라이벌 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따지자면 맷 버스비의 위치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7]
  • 그는 축구 철학과 함께 뚝심있는 사회주의자로도 유명했다. 인터뷰에서도 여러차례 대놓고 언급하기도 했다. 협업과 공생을 강조했으며 그도 이런 자세가 리버풀 성장의 동력 중 하나라 말한 적도 있다.
  • 2015년 말부터 리버풀에 부임한 위르겐 클롭 감독이 현지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 빌 샹클리에 자주 비유되곤 한다. 리버풀의 레전드 골키퍼 브루스 그로벨라는 "클롭은 독일인으로 환생한 빌 샹클리다"라고 말했으며, 리버풀 레전드 미드필더 그레이엄 수네스 역시 "클롭은 리버풀과 매우 잘 어울리는 감독이며, 마치 샹클리와 같다"라는 말을 남겼다. 정작 클롭 본인은 "나는 절대로 샹클리 감독과 비교될 수 없다"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는데,# 침체기에 부임하여 리버풀을 부활시켰다는 점, 부임 5시즌 만에 1부 리그 우승을 안긴 점, 안필드에서 팬들과의 유대감을 중시하는 점, 클럽의 내부적인 문제에 대한 개혁, 훈련 시설 및 리저브 팀에 대한 프로젝트, 정치 성향 등 공교롭게도 두 감독 사이에 공통점이 꽤나 있다.

8. 관련 링크


빌 샹클리 웹사이트
[1] 1974년 수훈, 4등급 대영제국 훈장 Offic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2] 수비형 미드필더[3] 선수들의 드레싱 룸 옆에 축구화 및 신발을 보관하던 작은 방. 빌 샹클리는 이 공간에서 코칭 스태프들을 불러모아 함께 차를 마시며 전술 구상과 구단 계획 같은 것들을 상의했다고 한다.[4] 3명의 형들 역시 축구 선수와 감독으로 활약했으며, 특히 셋째 형인 밥 샹클리(1982년 작고.)는 1962년에 던디 FC를 우승시킨 바 있다.[5] 게이트 최상단의 휘장에는 리버풀 FC의 상징인 라이버 버드가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리버풀의 유명한 응원가이자 슬로건인 You'll Never Walk Alone이 새겨져 있다.[6] 두 사안 모두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함이었다고 밝혔다.[7] 실제로도 둘은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에, 사적으로도 절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