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그로벨라
1. 소개
'''1980년대와 90년대 초반 리버풀의 레전드 골키퍼'''
'''짐바브웨 축구 선수 중 가장 성공한 인물'''
브루스 그로벨라는 짐바브웨의 축구 선수이자 축구 코치 및 감독이다.[2] 그는 짐바브웨 선수들 중 가장 성공한 축구 선수이자 붉은 제국의 수문장으로서 전설적인 활약을 선보였고 트레이드 마크인 인중에 난 콧수염과 거칠고 흥분을 잘하는 성격, 그리고 톡톡 튀는 캐릭터는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2. 선수 경력
2.1. 초기 커리어
그로벨라는 1957년 10월 6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더번에서 태어났다. 이후 그로벨라는 10대 때 크리켓에 재능을 보였고 학교에서 야구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축구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었고 결국 야구와 크리켓을 포기하고 축구 선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로벨라는 처음엔 하이랜더스, 치부쿠 삼바, 하이랜드 파크 같은 아마추어 팀에서 활동하다가 1977년 더번 시티와 계약을 체결하며 처음으로 프로 축구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온갖 인종 차별을 당했고 경기에 나가긴 커녕 온갖 궂은 일을 해야 했다. 이에 그로벨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캐나다로 이주한 후 1979년 밴쿠버 화이트캡스로 소속팀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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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화이트캡스 시절
그로벨라는 밴쿠버로 이적한 후 전 잉글랜드 및 블랙풀 골키퍼였던 토니 월터스 감독의 지휘를 받으며 자신의 잠재력을 급속도로 끌어올렸다. 그는 초기엔 필 파크스 골키퍼에 이은 세컨 골키퍼로 활동했다. 그러던 1979년, 그로벨라는 가족의 친구들을 보기 위해 잉글랜드를 방문했다. 이때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의 감독이었던 론 엣킨슨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입단 테스트를 받아볼 것을 권유했다. 그로벨라는 이를 수락했고 테스트를 지켜본 엣킨슨은 그의 기량에 만족을 표해 계약을 체결하려 했다. 그러나 취업비자가 나오지 않아 결국 웨스트브로미치로의 이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79년 12월 18일, 그로벨라는 잉글랜드 4부리그의 소속 클럽인 크루 알렉산드라로 임대 되었다. 그는 별로 유명하지 않아서 처음 입단했을 때는 "빌 그로벨라"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곧바로 자신의 진가를 마음껏 드러내 팬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그로벨라는 크루 알렉산드라에서 24경기에 출전하였고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넣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4부리그의 별로 유명하지 않은 팀에서의 활약인 만큼 그가 이름을 크게 날릴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였다.
그런 그를 주목한 이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아닌 리버풀의 수석 스카우터 톰 선더스였다. 그로벨라가 임대를 마치고 밴쿠버로 돌아간 뒤, 선더스는 밴쿠버로 향해 그로벨라의 활약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봤다. 당시 화이트캡스는 리즈 유나이티드로부터 데이비드 하비 골키퍼를 영입했지만, 그로벨라는 하비를 일찌감치 밀어내고 팀내 최고 골키퍼로서 맹활약을 선보였다. 선더스는 그가 리버풀의 레전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마침내 영입 작업을 개시했다.
2.2. 리버풀 시절 : 붉은 제국의 최전성기와 암흑기를 함께한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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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3월 17일, 리버풀은 25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지불하고 그로벨라를 전격 영입했다. 그는 처음엔 레이 클레멘스를 받춰줄 서브 골키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81년 여름, 클레멘스가 토트넘 핫스퍼로 이적하게 되면서 그로벨라는 주전 골키퍼로 활약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로벨라는 1981년 8월 28일에 울버햄튼 원더러스와의 경기에서 리버풀 선수로서 처음으로 데뷔전을 치뤘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실망스럽게도 1:0 패배였다. 그의 첫번쨰 클린시트 경기는 그해 9월 5일 아스날과의 경기였다. 이날 리버풀은 2;0 승리를 거두었고 그로벨라는 탁월한 선방 능력을 과시하며 리버풀의 승리를 지켜냈다.
하지만 당시 리버풀 팬들은 그를 매우 탐탁치 않게 여겼다.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일컬어지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레이 클레멘스의 후계자가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경력도 볼품 없는 남아프리카 태생의 흑인 골키퍼라니 그럴만도 하다. 몇몇 리버풀 팬들은 그를 향한 인종 차별 발언을 퍼부으며 "당장 내 팀에서 나가!"라고 외쳤다. 특히 1981년 박싱데이에서 맨체스터 시티에게 3:1로 패할 때는 이런 비난이 극심해졌다. 그로벨라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이 경기를 치른 후 숱한 살해 위협을 받았고 축구 선수를 그만둬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톡톡 튀는 캐릭터성을 발휘해 팬들의 비난을 찬사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리버풀의 전설적인 명장 밥 페이즐리의 지휘 하에, 그는 탁월한 기량을 선보이며 리버풀의 상승세를 이끌었고 급기야 3월 13일 리그컵 결승전에서 토트넘 핫스퍼를 3:1로 제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상대팀 골키퍼가 다름아닌 그로벨라 이전 리버풀 골키퍼였던 레이 클레멘스라서 더욱 뜻깊은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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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로벨라는 1981년부터 1994년까지 13년간 627경기를 소화하며 리버풀의 전설적인 골키퍼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그의 활약상 중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꼽자면 1984년 유로피언 컵 결승전을 들 수 있다. 이날 리버풀은 AS 로마와 맞붙었다. 정규시간을 1:1로 마감한 양팀은 연장전까지 갔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결국 승부차기에서 모든 것이 결판이 날 판이었다. 이후 로마 선수 세 선수 중 한 명이 실축을 한 반면 리버풀 선수 4명이 나란히 골을 기록하며 리버풀이 4:2로 앞서가게 되었다. 이제 로마의 네번째 선수 프란체스코 그라지아니가 페널티킥을 차게 되었는데, 그로벨라는 이때 기행을 저질렀다. 골대 그물망을 스파게티인 마냥 씹어먹은 것이다.(...) 그런 그의 행위에 심리가 흔들렸는지, 그라치아니는 실축하고 말았고 리버풀은 극적으로 유로피언컵 우승을 달성했다.
아무튼 그는 참 인상적인 선수였다. 실력은 당대 최고 골키퍼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캐릭터성은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경기 도중 여러 기행을 저지르는가 하면 우승 세례머니를 할 때 뜬금없이 우산을 가지고 와서 팀동료 및 팬들과 함께 우산을 펼친 채 온갖 익살스러운 사진을 찍기도 했다. 1984-85 시즌 도중에는 한 관중이 경기장에 난입해 공격해오자 단숨에 제압하고는 경찰이 달려와서 그 관중에게 수갑을 채울 때까지 관중을 붙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리버풀에서의 삶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1989년 4월 15일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FA컵 경기에서 힐스버러 스타디움이 무너지는 바람에 리버풀 팬 96명이 사망한 힐스버러 참사가 발생할 때, 그는 그 비극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이때 그로벨라는 이 사고로 죽을 뻔한 관중들을 많이 구조했고 피해자들의 장례식에 모두 참석해 깊은 애도를 보내 팬들의 아낌없는 박수를 받았다. 그후 심적으로 흔들린 탓인지, 그의 활약상은 예전에 비해 떨어졌고 리버풀 역시 암흑기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후 그로벨라는 리버풀이 암흑기에서 헤쳐나오지 못하는 와중에도 꿋꿋이 나와서 팀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갈수록 그의 기량이 떨어지자 리버풀 측은 왓포드 소속의 데이비드 제임스를 1992년 중반기에 전격 영입했다. 이후 그로벨라는 제임스에게 밀려 세컨 골키퍼 룰을 부여받아야 했다. 그로벨라는 1992-93 시즌에서 6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1993년엔 2부리그 소속의 스토크 시티로 임대되어 4경기를 추가로 출장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데이비드 제임스가 너무 부진하는 바람에, 리버풀은 다시 그로벨라에게 주전 골키퍼 자리를 맡겼다.
1993-94 시즌, 그로벨라는 초반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줘 자신의 기량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노쇠화된 기량이 드러나고 말았고 팀 성적도 곤두박질쳐졌다. 급기야 1993년 9월 18일 에버튼과의 더비 매치 도중 팀이 2:0으로 패하게 생기자 격노한 나머지 당시 막 데뷔한 팀동료 스티브 맥마나만과 언쟁을 벌이다가 서로 과격 행위를 해 빈축을 샀다.(...) 결국 그로벨라는 1994년 2월 리즈와의 경기 도중 부상을 당한 뒤 더 이상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시즌이 끝난 뒤 팀을 쓸쓸히 떠나야 했다. 그래도 그는 리버풀에서 14년간 활약하며 6번의 리그 우승, 3번의 FA컵 우승, 3번의 리그컵 우승, 그리고 한 번의 유로피언 컵 우승을 달성했다.
2.3. 사우스햄튼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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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벨라는 1994년 여름 리버풀에서 방출된 후 사우스햄튼에 자유계약으로 이적했다. 그는 1994년 8월 20일 블랙번과의 데뷔전을 치뤘고 경기 결과는 1:1 무승부였다. 그는 사우스햄튼에서 2시즌 동안 활동하며 데이브 비산트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비록 뒤에 서술할 승부 조작 논란으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당시 사우스햄튼 감독이었던 앨런 벨은 그를 굳게 신임했고 그로벨라는 그의 신임에 힘입어 1994-95 시즌의 대부분을 선발 출전했다. 하지만 다음 시즌에서는 경쟁에 밀려 겨우 2경기만을 뛰었고 결국 그는 시즌이 끝난 뒤 플리머스 아가일로 이적했다.
2.4. 말년
그로벨라는 플리머스 아가일에서 1996-97 시즌 동안 36경기에 출전했다. 이후 그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 3년 동안 옥스퍼드 유나이티드, 셰필드 웬즈데이, 올덤 애슬레틱, 체셤 유나이티드, 버리 FC, 링콘 시티, 노리치 빅토리아를 거쳤다. 그후 그는 조국인 짐바브웨로 돌아가 코치 경력을 쌓다가 2007년 잉글랜드에 돌아온 후 현재까지 스윈튼 애슬래틱의 골키퍼로서 활동하고 있다. 이제 연세가 어언 58세이신데 아직도 축구 선수로 뛰는 걸 보면 진정으로 축구를 사랑한 분이신듯.
2.5.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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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벨라는 비록 남아프리카 공화국 태생이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에 깊은 실망과 혐오를 느끼고 1980년에 자신의 국가를 짐바브웨로 변경했다. 그는 짐바브웨 선수로서 1980년부터 1998년까지 32경기를 출전했다.
3. 코치 경력
그로벨라는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이래 짐바브웨와 남아프리카에서 많은 축구 팀을 맡았다. 그는 1999년에 세븐 스타스 감독을 맡아 강등권에 몰려있떤 팀을 4위로 끌어올리기도 했고 뒤이어 슈퍼스포츠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아 1999년부터 2000년까지 2년간 각각 10위, 8위를 찍기도 했다. 이후 2001년엔 잉글랜드 논 리그 팀인 헬레틱 FC 감독을 맡아 역시 강등에 직면해 있던 팀을 마지막 경기에서 잔류시키기도 했다. 그 외에도 짐바브웨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겸 감독을 2번(1997, 1998년) 맡아서 잠시 대표팀을 이끌기도 했다. 그후 2006년까지 짐바브웨와 남아프리카에서 코치 및 감독으로서 많은 팀을 맡은 그는 돌연 잉글랜드로 돌아와서는 스윈튼 애슬래틱의 현역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4. 승부조작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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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94년 11월 10일. 영국의 유명 타블로이드 신문지인 더 선이 그로벨라가 승부조작을 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로벨라는 배팅 전문 회사와 손을 잡고 리버풀전에서 이윤을 더 많이 챙기기 위해 승부조작을 벌였다고 한다. 이 신문지는 그로벨라가 배팅 업체 관련자들과 의논을 하는 장면을 포착한 비디오테이프를 확보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들에 따르면 그로벨라는 윔블던의 골키퍼 한스 세가스와 아스톤빌라의 공격수 요한 파사누, 그리고 말레이시아 출신 사업가 Heng Suan Lim와 함께 승부조작에 깊이 개입했으며 4만 파운드를 받고 뉴캐슬에서 3골을 일부러 먹히는 등의 행위를 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보도와 뒤따른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로벨라와 세가스는 계속해서 경기에 출전했다. 반면 요한 파사누는 이 혐의가 씌워진 직후 은퇴를 선언했다. 그로벨라 본인은 이러한 혐의에 대해 자신의 무죄를 호소했다. 그는 그런 루머에는 아무 증거가 없으며 경찰에 자신의 결백을 입증했다고 주장했다. 재판은 2번에 걸쳐 진행되었고 그로벨라와 그의 변호인단은 무죄 판결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그후 그로벨라는 더 선을 무고죄로 고소했고 고등법원은 1999년 명예훼손 혐의를 인정하고 더 선 지에게 그로벨라에게 8만 5천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더 선은 여전히 자신들이 옳았다며 비록 유죄를 입증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정직하지 않았음을 입증할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더 선은 버밍엄 법정에 상소했고 양측간의 법정 비용은 50만 파운드에 달했다. 이윽고 2000년, 영국 대법원은 더 선이 그런 보도를 하여 그로벨라가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그가 승부조작에 가담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동한 것이 밝혀져 무죄 판결이 내려졌으므로 그로벨라의 명예는 훼손되지 않게 되었으니 더 선이 배상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참 허무하게 끝나버린 이 법정 다툼 동안 너무 많은 법정 비용을 쓴 바람에, 그로벨라는 파산 신청까지 했다고 한다.
5. 여담
- 그로벨라는 리버풀 시절 독특한 캐릭터성을 유감없이 발휘해 팬들을 즐겁게 했다. 훗날 리버풀의 골키퍼가 된 예지 두덱의 회고에 따르면 이스탄불의 기적으로 알려진 04-05 챔피언스리그 결승 승부차기 당시 선보인 댄스(?)는 캐러거가 그로벨라 특유의 페널티킥 움직임을 참고해서 AC밀란 키커들을 흔들러놓으라는 조언이었다고 한다. 혹자는 리버풀 특유의 '예능'(...)은 이 선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대표적인 익살스런 사진을 들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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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그로벨라는 한때 묘한 징크스를 갖고 있었는데 그 징크스란 선수들이 모여 있을 때 라커룸 벽에 있는 전등 스위치를 공을 차서 맞춰서 불을 꺼야 경기가 잘 풀린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사이에 선수들이 나다니면 안 된다는 이유로 선수들을 라커룸에 가둬놓고 화장실조차 못 가게 한 채 계속 공을 스위치에 차댄 것. 하루는 누군가가 라커룸 스위치에 테이프를 붙여놨고 그걸 몰랐던 그로벨라는 계속 스위치에다 공을 차댔다. 결국 이 기행은 로니 모란 코치가 와서 선수들을 라커룸 밖으로 끌어낸 뒤에야 멈췄다.
6. 수상
- 리그 우승 : 6회(1982년, 1983년, 1984년, 1986년, 1988년, 1990년)
- FA컵 우승 : 3회(1986년, 1989년, 1992년)
- 리그컵 : 3회(1982년, 1983년, 1984년)
-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 6회(1982년, 1986년, 1988년, 1988년, 1989년, 1990년)
- 유로피언컵 우승 : 1회(1984년)
- UEFA 슈퍼 컵 우승 : 1회(1986년)
- 전부 리버풀 시절 거둔 수상 기록이다.
[1] 이외에도 수많은 짐바브웨 및 잉글랜드의 아마추어 축구 클럽 선수 겸 코치로 활동했다.[2] 농담이 아니다! 현재까지도 잉글랜드 12부리그에 해당하는 돈케스터 & 디스트릭트 시니어리그에 속한 스윈튼 애슬래틱의 현역 골키퍼로 활약하고 있다!